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아름답다! 본문

8면/미니픽션

아름답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1. 13. 22:25

심아진

 

굴토끼 아토가 게으르게풀을 뜯고 있습니다. 아토는 다른 토끼들처럼 신선한 풀을 찾아 깡충거리며 뛰어다니지 않고 마지못한 듯 아주 조금씩만 이동합니다.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이 먹기는 해도 먹는 것만이 삶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토는 어제도 먹었고 엊그제도 먹은 씀바귀, 질경이들을 오늘도 습관처럼 먹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합니다. 어째서 풀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걸까요? 또 냄새 지독한 똥은 어찌 그리도 많이 나오는 걸까요?

그래도 아토는 동굴 속에 있기보다는 동굴 밖에 있는 걸 더 좋아합니다. 새끼를 만들거나 잠만 자는 동굴 속 생활보다야 동굴 밖 생활이 차라리 낫기 때문입니다. 컴컴하고 비좁고 질척거리는 동굴은 정말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겹기 짝이 없습니다. 아토는 본 적 없는 놀라운 세계, 미지의 존재를 다채롭게 펼쳐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남루한 일상을 간신히 잊습니다. 아름답다! 감탄하면서요.

아토를 오래 좋아해 온 진토는 그런 아토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진토의 눈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 아토입니다. 풀을 씹느라 오물거리는 작은 입, 석양빛을 받아 타오르는 붉은 목덜미 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 하늘을 바라보는 저 꿈꾸는 듯한 눈은 또 얼마나 요염한지요! 아토가 방귀 뀌는 소리마저도 경이로워 미칠 지경인 진토는 곧 아토를 자신의 색시로 맞이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평화로운 이곳에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머리가 작고 몸이 긴 북방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끼들은 족제비가 주위를 맴돌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호랑이도 엿 먹이는 멋진 꾀를 자랑하는 토끼가 족제비 따위에게 당할 리 없을 테니까요. 사실 족제비는 그다지 커 보이지도 않고 날렵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긴 토끼들에게 유리한 언덕 아래입니다. 족제비가 덤벼도 빠르게 도망가는 토끼들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겁니다. 토끼들은 풀 뜯기를 멈추지 않은 채 족제비를 흘깃거리기만 합니다.

진토만이 홀로 걱정스러운 듯 족제비를 노려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냥꾼이라 해도 무방비 상태로 넋을 놓고 있는 아토에게는 위협이 될지 몰라서입니다. 앞니로 나무뿌리를 갉고 있는 진토의 눈이 족제비를 따라 신중하게 움직입니다.

조심해. 족제비가 근처에 있어.

진토가 경고하지만 아토는 들은 체도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동풍의 신 에우로스가 구름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곱슬머리를 휘날리는 바람의 신은 언제 봐도 아름답습니다. 아토가 감탄하는 사이, 에우로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손에 든 꽃병을 뒤집습니다. 거대한 손잡이가 있는 병에서 후르르 물이 흘러내립니다. 아토는 다른 토끼들보다 더 빨리 비가 내릴 것을 알아차리지만 구름의 숭고한 몸짓에 빠져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토끼들이 서둘러 동굴로 돌아갑니다. 초조하게 이리저리 오가던 족제비도 어느 사이엔가 자취를 감추었네요. 아토는 또다시 긴 잠과 교미와 어둠만이 존재하는 동굴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비를 흠뻑 맞으며 들판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아토는 밀려드는 권태를,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을 난잡한 성교로 해결하려는 제 동족이 싫습니다. 다른 토끼들은 왕성한 정력으로 암곰을 범하기까지 했다는 전설 속 수토끼를 숭상합니다. 그러나 아토는 그 설화가 자손을 불리는 데만 열중하는 굴토끼들을 비웃기 위해 생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아토, 비 맞아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빨리 가자.

진토가 아토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아토는 땅에 스며든 빗방울이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강으로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멋진 여정을 조금 더 오래 그려보고 싶습니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인 강의 신이 수염을 발까지 기른 바다의 신과 만납니다. 투명한 두 신의 몸이 꽈배기처럼 꼬이며 합쳐지다가 이내 보석처럼 빛나며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번에는 서풍의 신과 만날지도 모릅니다. , 그 장엄한 광경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흠뻑 젖었어. 어서 가자.

진토가 안달을 하지만 아토는 고개를 가로젓기만 합니다.

차라리 감기에 걸려 앓아누워버리면 좋겠다.

아토가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털썩 드러누워 버리자, 진토가 온 힘을 다해 아토를 끌고 동굴로 갑니다.

 

다음 날, 다시 나타난 족제비의 행동은 좀 더 위협적입니다. 등을 낮추고 빠르게 달려오더니 귀가 유난히 긴 토끼에게 덤벼듭니다. 그러나 경험 많은 그 토끼는 지그재그로 몇 번 뛰어 달아나 쉽게 족제비를 따돌려 버립니다. 그 광경을 본 다른 토끼들이 우물우물 풀을 씹으며 환호합니다. 족제비 따위에게 당할 우리가 아니지! 아무렴, 우리가 어떤 종족인데! 토끼들은 시체인 척해서 인간 사냥꾼마저 따돌린 꾀 많은 토끼 이야기가 그냥 생긴 게 아니라며 뿌듯해합니다. 그 토끼는 파리들을 꼬셔서 구더기처럼 보이는 침을 자신에게 뱉게 하고는 누워 있었다지요. 다른 토끼들은 그 토끼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아토는 파리가 몰려든 토끼를 상상할 때마다 구토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곤 합니다.

한편, 토끼를 잡는 데 실패한 족제비는 화가 나서인지 마구잡이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토끼가 있는 곳으로도 달려가고 토끼가 없는 곳으로도 달려갑니다. 토끼들이 조금쯤 긴장한 채 고개를 들고서 귀를 쫑긋거립니다. 하지만 자신들 머리통의 반도 안 되어 보이는 족제비의 머리통을 본 순간, 다시 클로버를 먹는 일에 열중합니다.

아토가 무심코 족제비를 봅니다. 제 털보다 더 반짝이는 족제비 털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지만 곧 눈앞에 핀 마가렛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노란 중심부에서 엷고 하얀 꽃잎이 둥그렇게 난 마가렛은 아토가 알지 못하는 모험과 사랑을 이야기하듯 방싯거립니다. 아토는 꽃잎을 하나씩 떼어 내며 미지의 사랑이 자신에게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를 점쳐 봅니다.

진토는 그런 아토를 쓸쓸히 바라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미친 듯 뛰고 있는 족제비가 가까이 오기라도 하면 얼른 아토를 데리고 도망가야 하니까요. 하지만 족제비는 정말 미치기라도 한 듯 혼자 아무렇게나 뛰어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셋째 날, 족제비는 멀리서 오면서부터 춤을 춥니다. 등을 동그랗게 구부려 올리고 뛰어오르기를 여러 번, 빠른 스텝으로 이쪽저쪽을 오가기도 합니다. 배를 드러내고 누웠나 싶은데 순식간에 제 꼬리를 물고 돌고 있습니다. 광란에 빠진 듯 보입니다. 토끼들이 질겅질겅 풀을 씹으며 말합니다.

뱃속에 회가 끓는 게 아닐까?

독버섯을 먹은 걸 거야.

토끼들은 족제비를 바라보며 제멋대로 떠듭니다. 눈 먹던 토끼, 얼음 먹던 토끼 다 제각각이라는 딱 그 말처럼요.

암컷에게 버림받아 괴로운 모양이야.

발정이 났나 봐. 안 됐군, 안 됐어.

이번에는 아토도 족제비의 현란한 몸짓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 열렬히,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네요.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가 드러낼 때마다 족제비의 털이 초콜릿색이었다가 윤기 나는 올리브색이었다가 합니다. 아토는 빛을 따라 신비롭게 변하는 색의 향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제 족제비는 숫제 머리를 아래로 하고 한 바퀴를 뱅그르르 도는 곡예도 선보입니다. 네 다리와 긴 꼬리를 모두 길게 폈다가 한순간에 오므리기도 합니다. 아토는 족제비의 몸짓이 우아하진 않지만 강렬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지 같은 일상에 깨끗한 물 한 바가지를 쏟아부은 듯 청량한 느낌이 듭니다.

아토의 눈이 호기심으로 커지는 것과 비례해 진토의 눈은 걱정으로 커집니다. 진토는 아토의 목덜미 털이 더욱 붉어진 것 같아 어쩐지 기분도 나쁩니다.

아토, 그만 동굴로 가자.

그러나 아토는 진토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습니다. 숫제 앞발을 모두 들고 고개를 뺀 채 열렬히 족제비를 바라봅니다. 이쪽에서 흙을 튕기고 저쪽에서 풀잎들을 뭉개는 족제비는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진 듯 보입니다.

다른 토끼들도 일제히 동작을 멈춘 채 족제비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참 신기한데?

요상한 춤인데 눈을 뗄 수가 없어.

모두가 씹는 것도 잊은 채 족제비를 바라봅니다. 환각 성분이 들어 있는 다투라를 실수로 삼켰을 때처럼 반쯤 얼이 빠져 있습니다.

긴 귀의 털 하나, 뒷발의 단단한 근육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 채, 아토는 벅찬 감동을 느낍니다. 구름으로 만드는 상상의 댄스가 아니라 진짜 춤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족제비의 춤은 그동안 아토가 아슴푸레 짐작만 했던 세계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고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헐겁지 않은 진짜 세계를 말이지요. 아토는 낯설고 그래서 더욱 생생한 광경에 완전히 압도당합니다.

다른 토끼들도 비슷한 상태입니다. 놀란 토끼 벼랑 바위 쳐다보듯 한다는 말 그대로, 멍하니 눈만 껌뻑거리며 족제비를 보고 있습니다. 족제비의 몸이 술 취한 뱀처럼 유연하게 흔들리자 지나가던 바람마저도 숨을 멈춘 듯 보입니다. 아토의 가슴이 두 방망이질, 세 방망이질 치며 두근거립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진토가 빨리 도망가자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도 듣지 못한 채, 아토는 깊고 낮게 말합니다.

아름답다!

바로 그 순간, 족제비가 아토의 목을 단번에 뭅니다. 진토도 다른 토끼들도 족제비가 그렇게까지 가까이 온 줄 몰랐습니다. 날카로운 족제비의 송곳니에 목이 반쯤 찢어진 아토를 뒤로 한 채, 놀란 토끼들이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진토는 굴을 향해 뛰어가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아토, 불쌍한 아토! 그러나 아토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 , , !

 

'8면 > 미니픽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가 심아진 북콘서트  (1) 2023.11.29
안내  (1) 2021.12.04
만유의 기억  (0) 2021.10.18
한 놈은 잡는다  (0) 2021.09.20
한 놈은 잡는다  (0) 2021.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