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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슬픔을 증명하는 일 본문
배진희 (고려대학교 생활과학과 석사과정)
2022년 10월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을 계기로 나는 얼마간 망자를 애도하는 마땅한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 일 이후, 사람들은 애도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진과 글과 말과 눈물을 게시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정부는 ‘국가 애도 기간’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애도를 위해 가급적 예정된 행사들을 취소하거나 축소할 것을 국민들에게 강하게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행사들이 취소 또는 연기되었고, 약속을 강행한 누군가는 생일을 축하했다는 이유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애도에 참여하지 않은(것으로 비치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을 읽으면서, 도대체 그 비난들이 ‘그 일’과 ‘그 상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동시에 궁금했다. ‘애도’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애도이고, 어떤 것이 애도가 될 수 없는지. 그 경계를 깔끔하게 정리해 낼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며, 그것은 누가 만들었고 누가 동의했는지.
덧붙이자면 나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따져 물을 만큼 그 일에 대해 소상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짧은 글에서 애도에 선행한 일이 참사인가 사고인가, 그로 인한 상실이 사망인가 희생인가, 어떤 표현이 더 적절한 표현인가를 논하는 일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 그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일시에 많은 생명을 잃는 큰 불행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에 대해, 표현 방식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뿐이다.
‘애도’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서는 ‘애도(哀悼)’를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라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사람의 죽음 외에, 동물의 죽음에도, 실체가 없는 것들의 종말에도 ‘애도를 표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편의상 애도의 정의를 ‘의미가 있는 대상의 상실을 슬퍼함’으로 확장해보기로 하자. 이 정의에 따른다면, 어떤 것이 애도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세 가지가 확인되어야 한다. 첫째, 대상이 주체에게 의미 있을 것. 둘째, 의미 있는 대상이 상실되었을 것. 셋째, 의미 있는 대상의 상실이 주체에게 슬픔을 일으킬 것. 외에도 엄밀히 ‘의미 있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상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슬픔’은 어떤 특성의 감정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테지만, 지면의 한계를 핑계 삼아 안이한 태도로 넘어가도록 한다.
다음의 이슈는 슬픔을 확인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번처럼 상실됨이 명백한 경우, 애도가 되기 위해서는 상실의 대상이 주체에게 의미 있었는지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슬픔만은 확인되어야 한다. 주체는 자신의 슬픔을 타인에게 어떻게 증명해낼 것인가. 슬픔은 감정이므로, 슬픔 그 자체를 타인이 확인할 방도는 없다. 그래서 슬픔은 반드시 확인 가능한 형태로 발현되어야 하고, 그것이 다름 아닌 ‘슬픔’의 결과라는 타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슬픔은 새로운 어떤 것을 하거나, 하기로 예정된 것을 중단함으로써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던 것을 지속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을 여전히 하지 않는 형태로는 슬픔을 증명해 낼 수 없고, 나아가 ‘애도’를 증명할 길이 없다. 반면, ‘애도하지 않음’ 의혹을 제기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 것 같다. 바로, 하기로 예정된 일을 하거나, 하지 않았던 일을 그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러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누군가에게, 슬프지 않냐는 의혹을 제기해볼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증명의 의무는 의혹을 제기하는 쪽이 아닌, 의심을 받는 쪽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슬픔을 증명하는 일은, 슬픈 사람에게도, 슬프지 않은 사람에게도 쓸쓸하고 참 구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번 일로 유명을 달리한 아무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그들 중 내 인생에서 의미를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이 ‘생명’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고, 누군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것을 뜻하지 않게 잃게 되었다면, 그 사실은 내게도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그저 하던 일을 지속하고, 하지 않던 일을 여전히 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두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늘 상실된 이름들을 특별히 입에 올리지도, 명복을 소리 내 빌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출근길 내가 좋아하는 라테로 아침을 시작하고, 논문을 읽었다. 저녁이면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때때로 혼자 달리기를 했다. 다름없이.
다만. 나는 그날 이후 난데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운전을 하는 중에, 가족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에, 연인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는 중에 문득 그 일과 관련한 슬픈 생각들이 떠올랐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가족과 연인을 상상하고, 그들의 슬픔을 마음대로 헤아렸다. 또 문 앞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럴 때면 전기가 오른 것처럼 코끝 언저리가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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