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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괄호 속에 넣으려는 ‘역사’와 괄호에서 풀려나오는 ‘역사’ 본문

3면/쟁점 기고

괄호 속에 넣으려는 ‘역사’와 괄호에서 풀려나오는 ‘역사’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5. 23. 01:39

인천대학교 일어일문학과 남상욱 교수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가기 시작한 올 3월 중순 4년 만에 한일 정산 회담이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2019년 시행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 해제를 위해,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의 복구만이 아니라 강제징용 피해배상금을 한국기업이 대납안을 제시해 “굴욕외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러시아와 우크라니아 전쟁으로 인해 에너지 등의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커져 가는 지금, 한일의 협력 필요성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 쪽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일 정상 회담 이후 추락한 대통령 지지율은 그러한 의문을 많은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물론 미래 지향적인 경제적 협력을 이유로 ‘불행했던 과거사’를 괄호에 넣는 것은 이번 정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부터 반복된 하나의 패턴으로, 비단 일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1945년 패전 이후 성립된 일본 정부에서는 더욱 심하다. 패전국의 지위에서 한국전쟁을 계기로 경제적으로 도약하기 시작해 1980년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의 지위에 오를 때까지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역사’를 정면에서 마주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한 때 경제적 협력을 이유로 ‘역사’가 소환되는 경우도 있었다. 냉전 종식 후 정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글로벌 시장 경제 시스템이 확산됨에 따라 국가간의 경제적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청되는 가운데, 이를 위해 한일의 역사문제는 양국의 풀어야 할 마지막 남은 숙제로 여겨졌다. 실제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군의 개입을 인정한 고노담화가 발표된 것은 1993년 8월이었고, 이를 계기로 과거사에 대한 인식 공유에 대한 시도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국의 지식인들 중 일부는 기왕이면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 3개국이 공통의 역사 인식을 공유함으로써 유럽 연합과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공통 교과서를 만들어 실현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즉각 이에 대한 반발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경우 1997년에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으로 대표되는 역사수정주의 그룹이 발촉되었고, 이에 가입된 멤버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되었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는 일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며 자국의 역사를 미화하는 교과서가 비록 수정은 거쳤지만 마침내 문부과학성에 의해서 검정 교과서로 합격하게 된다. 이러한 소식이 한국 미디어를 통해서 알려지게 됨으로써 한국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시민 단체들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되어갔다. 

  이렇게 1990년대 후반 ‘역사’가 괄호에서 풀리자 ‘역사’를 지키거나 바로 세우기 위한 논의와 활동은 학술장을 넘어서 전방위로 확산되어 나가면서, 새로운 전선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탈냉전과 이후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속에서 ‘역사의 종언’이 거론된 것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 ‘역사’는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게 시작된 오늘날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에 대한 뜨거운 열기는 동아시아에서 역사를 괄호에 넣고자 했었던 시대에 대한 대상(代償)의 성격이 강한 것처럼 보인다. 한일 양국에서는 냉전 시대 동안 한편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이라는 이념을,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번영’이라는 생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리하게 침묵을 강제했는데, 냉전종식 후 이들의 삶들은 ‘역사’라는 이름하에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에서는 좌파 진영을 중심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부터 제주 4·3 희생자들, 멀게는 ‘위안부’와 징용공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동안, 일본에서는 좌파 진영에서는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 보수진영에서는 그동안 외면해왔던 대동아-태평양 전쟁의 전몰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요구가 활성화되었다. 한국의 미디어를 통해서는 식민 책임을 외면한 채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모습이 수시로 보도되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전몰자들)이 일본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감각이 깔려 있는 셈이다. 20세기 후반 한일의 정치체제가 남긴 부(負)의 유산으로서 이렇게 풀려나오게 된 ‘역사’는, 단순한 역사적 반복이 아니라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정신분석학의 원리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정치-경제적 이유로 ‘역사’를 괄호 안에 넣으려는 무리한 시도야말로 한일의 ‘역사’를 둘러싼 문제가 여전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지만, 그렇다고 양국 정부가 대놓고 역사적 갈등을 서둘러 해소하려는 시도는 더욱 사태를 악화시킨다. 박근혜-아베 정권에서 이루어졌던 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적인 합의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에 실은 적지 않은 일본의 지식인들이 환영했다. 1970-90년대부터 한국(인)과의 우애를 다진 지식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역사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는데, 상호협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기에 손자 세대까지 갈등을 넘기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어디 ‘역사’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합의’를 통해서 서둘러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위안부 합의의 실패를 통해서 그들도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을 것임은 이 정부의 대일 정책에 대한 미지근한 반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역사’를 둘러싼 진정한 갈등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민족’과 ‘국민’의 그늘 밑에 있었던, 여성과 노동자, 장애인, 이주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들이 어떠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재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야말로 양국의 역사를 둘러싼 가장 중요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힘든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한 고단한 작업에 엄두를 내지 못해서인지 아예 회피하기 위해서인지, 오늘도 각종 온라인 플랫폼에 업로드 되는 ‘영광’과 ‘증오’의 ‘새로운 역사’들은 끝도 없이 소비되면서 역사적 공회전을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