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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자유를 외치지 않는 민주주의 본문

3면/쟁점 기고

자유를 외치지 않는 민주주의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9. 11. 15:06

자유를 외치지 않는 민주주의

 

황정아(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문학평론가)

 

 몇 가지 키워드로 트렌드를 읽는 시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의 변화는 늘 언어적 변화를 동반하거나 앞세워왔다. 그렇다면 세상이 혼탁해질 때는 사람들이 고통 받듯 언어도 무사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돌아보면 전두환 정권이 서슬 퍼렇던 시절에는 정의가 고초를 겪었고 그 이래 실용이나 창조가 잇따라 시달렸는데, 오늘날 유독 고생하고 있는 단어로는 아무래도 자유가 꼽힐 것이다. 우리가 느닷없이 쏟아지는 자유의 세례에 시달리듯 자유역시 달갑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로 곤혹스러울 이즈음이기 때문이다. 서른 번 넘게 부르짖은 취임사부터 올해 8.15 경축사에 이르기까지, 짐작컨대 모든 공적 연설에서 대통령이 빠짐없이 언급해왔으니 못해도 수백 번은 더 동원된 셈이다. 난데없는 자유의 엄습이라는 사태를 당하며 한동안은 많은 이들이 대체 무슨 뜻인지, 왜 이제 와서 그토록 절박해졌다는 것인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를 말하며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지 1년 넘게 관찰한 지금은 그것이 대략 냉전시대 자유진영을 말할 때의 그 자유에 내 마음대로 해먹을 자유가 버무려진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자신의 다채로운 의미 스펙트럼에서 하필 가장 부끄러운 것들을 걸친 채 다시 무대로 불려 나온 자유의 심경도 착잡하겠거니 싶은 것이다.

 못난 권력에 의해 억지로 호명되는 사태는 여러 면에서 자유의 최대 위기로 보인다. ‘정의의 사례가 뚜렷이 예시해준 것처럼, 경험적으로 이런 유형의 호명은 해당 언어가 담은 가치를 한 차원 더 고양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보다 그 가치가 상당히 훼손되리라는, 아니 훼손하리라는 예고나 마찬가지다. 자유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도록 자유를 억압하겠다는 어떤 도착적(倒錯的)’인 기제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일례로 최근 새 방송통신위원장 임명을 전후하여 언론을 상대로 벌인 정부의 여러 움직임을 보면 언론의 자유가 다시금 긴급한 의제가 되리라 쉽게 전망할 수 있다. 그것이 또다시 노골적으로 억압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집회결사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비롯하여 열렬히 추구하지 않아도 꽤 누리고 있다고 느껴지던 다른 많은 자유들 또한 비슷한 노선으로 내몰리는 중이다. 자유의 위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억압당하기에 추구하게 되는 이 왜곡된 진로는 애초에 자유 자체가 억압을 하나의 존재조건으로 내장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자유가 맞닥뜨린 진짜 위기는 바로 이 의문에 있는지 모른다.

 일찍이 20세기 영국 소설가 D. H. 로런스(David Herbert Lawrence)는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과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등 미국의 고전작가들을 다룬 책 미국고전문학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왔다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주장을 간단히 일축한다. 당시 미국보다 영국에 훨씬 더 많은 종교의 자유가 있었음을 지적한 것인데, 미국의 선조들이 말한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우리만의종교의 자유였음은 호손의 소설들이 신랄하게 증언해주는 바다. 로런스는 초기 역사만이 아니라 자신이 방문했을 당시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만큼 자신의 동료 시민들을 비참하리만치 무서워하는 나라에 가본 적이 없다거나 이들은 누군가가 자기네와 같지 않다는 걸 내보이는 순간 자유롭게 그 사람을 린치한다는 말로 자유의 땅이라는 미국의 신화를 사정없이 비웃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아메리카로 왔는가를 다시 질문하며 로런스는 그들 중 대다수는 그저 주인 없는(masterless)’ 상태가 되려고 도망쳐 온 것이고 여태껏 도망노예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주인 없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자유인이 아니라 여전히 도망노예라고 부르는 데 로런스의 자유론의 핵심이 있다. 그에 따르면 자유란 무언가 하고싶은 대로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되고싶은 무언가를 찾는 문제이다. ‘주인 없는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각자가 진짜 주인, 깊은 내면의 종교적인 믿음에 따르는 일, 또 그와 같은 믿음이 살아있는 공동체에 속하여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채 깨닫지도 못한 어떤 것을 함께 실현해가는 일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롭다는 외침은 언제나 사슬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일 뿐이고 가장 자유를 의식하지 않을 때 가장 자유로운법이라고 로런스는 강조했다.

 자유를 애타게 외쳤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 되짚어보면 우리의 역사에도 자유와 사슬소리의 상관관계는 뚜렷하다. 물론 원주민들을 쓸어버리고 광활한 와일드 웨스트를 질주하며 외치는 식의 미국적 자유와 달리,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거나 누군가를 쫓아내는 대신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머물러 사슬에 저항하는 입장이었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꼽히는 이 자유의 이름이 사슬을 끊어내는 과제가 긴급하지 않을 때는 어떤 민주주의적역할을 했는가, 그러니까 압제와 싸울 때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더욱 숙성시키는 데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안타깝게도 민주주의의 반대편에서 자유가 활용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가장 가까이는 신자유주의라는 명칭의 일부로 포섭되어 시장의 자유’, 곧 가진 자의 이익추구가 제약받지 말아야 함을 가리키는 지시어로 널리 사용된 바 있고, 현 정부의 자유 찬미 역시 그 의미장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민주주의의 본뜻을 나타내기보다 다만 민주주의의 결핍을 나타내는 표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이를테면 언론은 감독과 통제라는 사슬에서 자유로워야 하지만 언론의 존재 이유가 언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로 수렴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디까지나 진실의 추구가 언론의 근본이며, 사슬이 있고 없고와는 다른 차원에서 진실이란 어떤 것이고 또 그것이 언론을 통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고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주의의 구성요소를 짚을 때 언론의 자유는 말하면서 진실은 곧잘 누락시키는데 거기에는 자유의 민주주의적 가치가 확대 해석되어온 탓이 적지 않으리라 본다.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민의 자치라는 말은 주권자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두가 주권자라는 의미이다. 로런스가 말한 대로 주인 없는 상태가 아닌, 각자가 자신의 주인을 따르는 믿음의 공동체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 민주주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때 유의할 대목은 로런스가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적 주권이란 그렇듯 에게 속한 듯 보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나의 믿음에 속한 것이다. 그러니 작은 주인들끼리 자신의 자유로운권리를 다투거나 조정하거나 보장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가장 본연한 사무는 아니다. ‘내면의 깊은 믿음’, 곧 우리가 민주주의를 믿는 한에서 말한다면, 아직 실현은커녕 제대로 정의조차 안 된 민주주의적 가치에 충실하고자 애쓰는 일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살아 있게 만든다. 사슬을 효과적으로 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제 자유를 외치지 않는 민주주의를 사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