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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어느 교사의 철 지난 고민 -이 시대의 학교를 살아가는 교사와 학생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본문

3면/쟁점 기고

어느 교사의 철 지난 고민 -이 시대의 학교를 살아가는 교사와 학생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0. 4. 23:48

어느 교사의 철 지난 고민

-이 시대의 학교를 살아가는 교사와 학생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앞으로도 아이들 곁에서 가르칠 어느 교사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운동장이 어느새 아득해지고 교실과 복도에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윙윙댄다.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왜 필요할까? 코로나 시절부터 작금의 사태까지, 연일 1면에 보도되는 핫플레이스의 중심 학교에서 속으로 묻는다. 아이들은 학교에 왜 다니는가? 그 속에서 교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실 교단에 서는 첫날 해야 했던, 철 지난 고민이기에 부끄럽다. 하지만 교사는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라는 선배 선생님들의 말씀을 변명 삼아 고민의 흔적을 남겨본다.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곳인가? 아니다. ‘아니다라는 답변에 좀 더 살을 덧붙이자면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이다. 사실 초임 때는, 거친 임용의 파도를 헤치고 서게 된 교단에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전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왜 더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다라는 제자의 말에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만 중얼거리며 그저 손을 꼭 붙잡았던 날들을 거치며 얻게 된 답이다. 학교는 아이들이 사회에서 어엿한 사람으로 존재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학교와 교사는 그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엄밀히 말하면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걸 가르쳐주기 위해서는 규칙과 통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른바 훈육이다. 그러나 현재 교사에게는 적절한 훈육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운이 좋아서, 요즘 언론에 보도되는 것과 같은, 혹은 옆 반 선생님처럼 학부모님으로부터 너 때문에 우리 애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책임져라와 같은 언사를 들은 경험은 아직 없다. 그러나, 매일매일 지각하는 학생에게 시간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지도하며 청소를 하게 한 일이 그저 운이 좋아서 학대로 신고 되지 않은 것임을 알았을 때의 무력감은 컸다. 그럼 난 학교에서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지각한 것을 나이스(NEIS)에 기록하기 위해?

왜 교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지면 학교는 무너지게 될까? 몇 년 전, 친구를 지속적으로 교묘히 괴롭히는 아이가 있어서 상담했던 때의 일이다. 수업을 들어가지 않고 선생님들에게 욕을 할 때마다 마땅한 제재수단이 없어서 학교에서도 지켜만 보던 학생이다. 복도에서 지나칠 때 째려보는 것, 허공에 욕을 하는 것은 친구에게 위축감을 줄 수 있는 행위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전 이 학교에서 선생님보다 높은 존재예요. 제가 째려보고 욕하는 건 제 자유인데요. 인권침해예요.” 비단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수업시간에 대놓고 엎드려 자더라도 조용히 옆에 가서(다른 학생들 앞에서 크게 이름을 부르며 지적할 수 없으므로) 책상을 톡톡 치는 것밖에(신체적 접촉을 하거나 일으켜 세울 수 없으므로) 하지 못해 수업 분위기가 망가진 경험은 교사라면 익숙할 것이다. 사회에 나가기 전, 다른 사람을 해하면 안 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기본을 가르칠 수 없다. 가르칠 권리를 잃은 교사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고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도할 동력을 잃는다. 이제 이 교사에게 배우는 다른 학생 또한 불행해지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혹자는 해결책으로 그런 애들은 체벌해야지!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은 퇴학시키자!”를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교단에서 만났던 동료 선생님 중에 이 과격한 의견에 찬성표를 던질 스승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학교가 제 역할을 못 하게 된 지금도 아이들을 걱정하는 선생님들은 모두 선생님의 인권을 올리자라는 말이 학생의 인권을 낮추자와 같은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나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선생님들은 선생님보다 제가 더 높아요!”라는 말을 하는 학생의 말을 젊은 시절의 치기로 품고 지도할 수 있는 사명감과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에게 어젯밤 늦게 잤구나? 선생님이 더 재미있게 수업해볼 테니 너도 열심히 참여해보렴.”이라고 손을 내밀 소명의식을 갖춘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작금의 사태가 교사 vs 학생·학부모의 시각으로만 비치는 것이 너무 아쉽고 걱정스럽다.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하지 않았는가. 교사와 학부모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아이를 바르게 자라나게 하는 것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진 교육 파트너이다. 파트너끼리의 신뢰는 필수적임에도, 현재 교사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 교사의 가르침이 아이가 바르게 자라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아이를 미워해서 그저 화풀이한 학대로 치부되곤 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아이에게도 해롭다. 교육 파트너끼리 지도의 방향이 다른 것은 혼동을 주고 마땅한 시기에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담임으로 맡았던 학생이 교우 관계의 어려움과 발표 울렁증을 심하게 겪고 있었다. 학기 초에 수업에서 발표를 시키지 않기를 부탁받았다. 학년이 끝나갈수록 학급에 적응을 잘하여 교우 관계의 어려움도 극복한 이 학생에게 수업시간에 발표를 시켜 보았다. 극복해내기를 바라는 응원의 마음을 담아서. 다행히 무사히 발표를 마친 제자에게 격려하며 사실 내심 걱정되었다. ‘학부모님께서 전화하시면 어떡하지.’ 학년이 끝날 즈음 학부모님을 뵙게 되어 그때의 일화를 말씀드리니 선생님, 선생님께서 극복해보라고 그런 경험을 하게 해주신 것 같았어요. 덕분에 해냈다고 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보내주시는 신뢰에 교사로서 초심이 한 번 더 활활 타오름을 느낀 순간이었다. 어릴 적 우리 어머니가 담임선생님께 더 혼내 주세요.’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마냥 꾸짖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여 서운해 하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정과 학교의 가르침 속에서 바르게 자라나 사회의 일원이 된 지금에서야 알겠다. 더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 선생님에게 보내는 파트너로서의 신뢰이자, 그러니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도 더 혼날 줄 알아라! 라고 나에게 보내신 강력하고 다정한 경고 메시지였음을.

연일 보도되는 암울한 교단의 상처들로 내게는 익숙하기만 하던 학교의 풍경이 또다시 아득해지고 아이들의 목소리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 같다. 그러나, 이제는 어렴풋이 알겠다. 내 철 지난 고민의 답을.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학교에서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오늘 수업 때 졸던데~ 혹시 무슨 일 있니? 너의 잠을 깨우기에 선생님 수업이 오늘 조금 지루했지?” / “오늘 수업시간에 졸아서 죄송해요. 수업은 너무 재밌었는데,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았어요. 다음시간부터 열심히 들을게요!” / “그래! 몸 안 좋았는데 노력해줘서 고맙다.”

 

뭐 해, 이 사람아. 단상은 그만하고. 애들 가르쳐야지. 오늘도 되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