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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지금 여기 왜 민중미술인가?-6월 민주항쟁 33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본문
지난 2020년 6월 25일부터 이틀간 부산 민주공원 중극장에서 민주항쟁기념사업회 주최, IDS 민주주의사회 연구소 주관으로 ‘지금 여기 왜 민중미술인가’라는 주제의 6월 민주항쟁 33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1980년대 한국사회에 등장했던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미술운동이었던 민중미술을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역사적 등장배경과 영향 관계를 묻고, 한국현대미술사와 시민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며, 민중과 괴리된 채 추상성에 매몰되어 버린 모더니즘 미술과는 다른 족적을 그리며 평택 대추리, 용산, 제주 강정의 시민들과 함께 동시대성과 현장성을 공유하며 만들어가는 최근의 현장미술에 미친 영향에 이르기까지 민중미술의 의미를 묵직하게 새겨보는 시간이었다. 본지에서는 이 중 주목할 만한 발표문을 몇 개 뽑아 소개하고자 한다.
동아시아 민중미술의 지평-저항미술의 단편
이나바 마이는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동남아 일부를 포괄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미술의 특징을 살펴본다. 여기에는 1930년대 일본의 판화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 루쉰에 의한 중국 목판화운동, 패전 후 일본에서 이러난 판화운동과 르포르타주 회화, 광복 후 대만 판화운동, 중국 현대미술의 효시가 된 싱싱화회(星星畵會), 동남아시아에서 진행 중인 콜렉티브의 실천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를 통해 논자는 동아시아 미술의 ‘저항의 근대’로서의 지평을 살펴본다.
목판화는 저항적 미술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일본에서는 그 역사가 길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다이쇼 시대(1912~1926)에 일본에서 판화운동에 대한 청년 작가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서구에서 들어온 판화의 영향과 더불어 판화잡지가 다수 발행되고 192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일본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프로미 운동)과도 친근성을 가지게 된다. 특히 오도 타다시게(小野忠重 1909~1990)는 계급투쟁을 주제로 한 판화작업에 몰두하며 동료작가들과 ‘신판화집단’을 결성한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대중화’라는 슬로건을 판화에 도입해 ‘판화의 대중화’를 내세우며 하나의 주제를 복수 판화로 표현하거나 연작판화를 제작하는 등 집단제작에 힘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부적으로 출품한 전시회에서는 유화에 비해 판화가 적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들이 프로미운동으로서는 ‘변종(變種)’임을 반성하기도 한다. 1937년 이후 국가총동원 체제가 진행되면서 일본 내에서는 언론과 표현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고 예술가들의 실질적인 표현활동은 중지된다.
중국에서는 루쉰을 중심으로 목판화(목각 운동)가 항일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판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루쉰은 소련 판화가 사회운동에서 전투력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 판화운동을 제창했다. 기존 미술에 대해 반기를 들며 민중들의 현실을 그림에 담은 ‘일팔예사(一八藝社)’와의 교류나 일본인 우치야마 카키츠에게 요청해 시작된 목판화 강의가 그 예이다. 이를 통해 청년 작가들의 목각연구회가 발족하고 목판화 창작 단체가 중국 각지에서 결성될 수 있었다. 루쉰은 중국의 전통판화에도 주목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중국 서민들이 옛날부터 즐겼던 연환화(蓮環畵)였다. 당시 중국에는 문맹 대중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판화제작을 위해 옛날 화법을 도입해야한다고 젊은 작가들에게 권했고 많은 연환화가 제작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대도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중국 혁명예술운동의 무대는 지방 농촌과 전투 현장으로 바뀌었고, 노동자와 농민들 중에서도 새로운 예술가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목판화운동은 저항 미술이 되어갔다.
전후 일본 미술계에서 중요한 과제는 군국주의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 일본의 건설’을 내세운 일본사회와 호응하는 미술운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1946년 4월 일본 미술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발전과 새로운 가치 창조를 목적으로 ‘일본미술회’가 발족되었고, ‘북관동(北關東)’지부가 최초의 지부로 결성되었는데 1950년대 판화운동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되는 이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거나 자신들이 거주하는 농촌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하며 많은 대중들의 참여를 이끌었다. 특히 북관동 지부 작가들 중 4명의 작가들 이름을 딴 ‘오스니타(押仁太)’라는 그룹은 집단제작을 했고, 중국의 연환화 방식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는데 1951년의 연작판화 『하나오카 이야기』는 패전직전 1945년 7월 아키타(秋田)현의 하나오카 광산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노동자가 봉기한 사건을 주제로 했다. 노동자, 운동가, 시인, 문학자, 음악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협업했으며, 역사적인 사건을 다룸과 동시에 새로운 집단창작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전후 일본에서 르포르타주 회화가 등장한다. 평화, 자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흐름 가운데 직접 미술가들도 현장에 참여하고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제작하고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새로운 리얼리즘 시도였다. 르포르타주 회화는 현장적인 소재와 초현실주의를 결합했다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대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황롱찬, 양쿠이 등이 루쉰의 목각운동에 대한 열정을 이어받아 저항미술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대만 당국은 검열을 강화했고 1947년 2월 28일에 대륙인 지배에 대한 대만인들의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각종 출판물들이 정간되고, 대만 민중들은 침묵하기에 이른다. 2․28 사건을 계기로 대만에서는 계엄령이 내려지고, 저항미술의 명맥은 끊긴 채 대만 미술계는 소구 미술을 지향해갔다. 1970년 후반에 이르러서야 해외에 피신했던 작가들 일부가 대만으로 돌아오고 대만 화단의 식민지적 성격을 비판하고 미술의 사회기능을 제기했다. 1991년에야 ‘2․28사건, 백색 테러 희생자 추도 기념회’ 팜플렛에 황롱찬의 작품 「공포의 검사」가 채용되고 2002년에는 그의 원화가 대만에서 전시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싱싱화회(星星畵會)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하고 통제하는 미술에 반기를 들고 예술가의 자유로운 표현활동을 추구하는 운동체이자 중국 최초의 현대미술 그룹으로 평가받는다. ‘붉은 태양(紅太陽)’에 비유되었던 마오쩌둥에 대항해 ‘별’이라는 이름을 가져온 이들 그룹은 예술의 자유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감행하고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야외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멤버의 대부분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다양한 미술기법과 양식을 수용해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을 이어나갔다. 2000년대 이후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아트콜렉티브’ 집단이 미술과 음악을 결합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는 지역사회 공동체 운동을 이끌어나가기도 했으며 이는 1980년대 한국의 민중 미술, 문화 운동의 실천과도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아시아의 저항미술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저항의 근대’라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들은 기술과 양식을 유연히 횡단하며 저항의 정신을 담은 사회 운동을 실천해나갔다. 한국의 민중미술 역시 아시아의 세계미술사적 흐름 안에서 자리매김하고 역사화해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술과 주체: 민중/미술과 공공/미술
최범은 이 글을 통해 민중미술이 지닌 낭만성, 반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공공미술, 대중미술과의 관련성과 차이성을 살피면서 민중미술을 비판적으로 계승해나가야 함을 주장한다.
문화이론에서는 생산자와 수용자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문화의 형식을 구분하는데 민중문화(popular culture)는 생산자와 수용자가 일치한다. 민중의 삶 속에서 생겨난 민요나 놀이는 민중이 생산하고 민중이 수용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문화 역시 생산자와 수용자가 엘리트로 일치한다. 대중문화(mass culture)는 생산자와 수용자가 일치하지 않는데, 생산자는 엘리트(감독, 작곡가)이지만 수용자는 대중이고 대중시장이 그 둘을 매개한다. 논자에 따르면 우리가 말하는 민중미술은 생산자와 수용자 모두가 엘리트(전문 미술가)이므로 분류상 엘리트문화에 속한다. 민중미술 내부에서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과 민중들이 직접 생산자로 참여한 경우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중미술은 “엘리트 미술의 일종”이며, 민중미술을 매개하는 장 역시 “민중운동이라는 대항 공론장”에 속하는 대안적 공간임을 지적한다. 또한 문화이론에서 말하는 민중문화의 ‘민중’과 한국 미술사에서 등장한 민중미술에서의 ‘민중’ 역시 다른데, 민중미술에서의 민중은 사실상 생산주체나 수용주체가 아니라 “민중미술이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이념적인 용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민중미술이 상정한 이념적 주체로서의 민중은 억압 받는 피지배계급으로서의 민중이었으며, 한국의 민중운동이 민중을 역사의 주체이자 변혁의 주체로 내세운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즉 민중미술은 민중운동이라고 불리는 대항 공론장 안에 배치된 하나의 문화적 실천 양식이었으며. 기존 미술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등장했다. 민중 미술은 지배적이었던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이 지배 권력에 봉사하는 것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서구지향적이고 한국의 지배 권력에 추종하는 것에 반대해 민중을 형상화하고 각성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논자는 민중미술이 민중, 민족, 민주주의를 동일시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의 적절성을 문제 삼는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중미술의 시대가 열렸다. 반외세적이고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민중미술의 입장에서 대중미술의 팝아트는 반동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비추어졌지만 팝아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도 많았다. 이는 민중과 대중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지만 민중과 대중 사이의 의미론적 낙차는 컸다. 한편으로 공공미술에 대한 관심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공공미술은 사적(私的)예술을 넘어서 ‘공공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으로 논자는 이를 시민사회적 관점에서 사회적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며, 민중/민족적인 것을 뛰어넘는 ‘시민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민중미술의 직선적이고 단순한 확대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공공성(publicness)'이란 국가와 지방자치 단체라는 공공주체, 즉 공급중심적 접근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주체가 된다는 측면을 이른다. 민중이 피지배계급이라면 시민은 지배계급임과 동시에 피지배계급이고 민주주의 역시 시민의 자기지배를 이른다. 또한 시민은 민중의 발전된 형태이며 공공미술 역시 민중미술이 변증법적으로 내부의 부정성이 지양된 형태이다.
논자는 또한 민중미술이 ‘민족 전통 조형=선/서구 모더니즘=악’, ‘민중=피지배계급=선/엘리트=지배계급=악’이라는 이분법을 취해 민중과 전통을 이상화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공공미술은 더이상 ‘저항의 주체’이거나 낭만화되고 괴리된 존재로서의 민중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해가는 ‘생성의 주체’이자 근대시민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미적공동체’의 주체가 되는 시민사회의 미술로서 대안이 될 수 있다.
민중미술과 사회예술
김준기는 예술과 사회의 접점을 고민해온 사회예술의 한 흐름과 민중미술과의 관련성을 살펴본다. 특히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존재해온 현장미술을 일별해보고 2000년대 이후에 나타난 현장예술을 정리하여 민중미술과 사회예술의 관계를 밝히고, 그 의미를 정리한다.
한국의 사회예술은 20세기 초반 카프활동과 해방기의 조직적 예술활동을 통해 사회적 참여와 예술의 역사를 일궈왔으나 분단과 전쟁 직후에는 예술을 고유한 장의 논리에 가두고 검열과 억압의 시간을 거쳤다. 그 안에서 사회와 예술의 접점을 완벽하게 외면한 탈접점의 미학이 1970년대에 절정을 이뤘으나 이를 깨고 나온 것이 1980년대에 등장한 리얼리즘 계열의 새로운 미술운동과 소그룹 운동이다.
1980년대에서 동시대에 이르는 ‘현장에서의 예술 실천’은 행동주의 예술과 공동체 예술의 경향을 가지는 사회예술의 전조로, 생활세계와 미적 분리라는 근대성 프로젝트와 거리를 두고 심미적 영역과 생활세계와의 접점을 시도한다. 이들은 삶의 영역과 심미 영역을 통합적 관점에서 접합하려고 하며 동시대 사회에서 미술의 지위와 역할을 묻고 답하는 적극적 참여와 개입의 산물이다.
1980년대에 나타난 민중미술 운동은 크게 1)미술 제도의 전시장 중심 활동으로 미술 변혁 운동을 추구한 사회비판적 리얼리즘과 2) 사회 현장 활동을 통해 정치․사회 변혁 운동에 복무하는 미술의 사회적 실천을 중시한 민중적 리얼리즘으로 나뉜다. 전자에 속하는 오윤은 1980년대 감성을 대변하는 목판화를 대중적 차원의 소통언어로 삼아 민중의 생활정서를 담았고, 신학철은 한국 근현대사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해 콜라주 형식의 회화에 담았다. 후자에 속하는 <두렁>과 같은 소그룹 예술가들은 전통 미술의 요소를 계승해 걸개그림이라는 창작양식을 만들고 공동창작을 지향했으며,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는 광주항쟁을 겪으며 대중들을 상대로 한 미술교육에 나섰다. 이들은 예술의 의제와 방법을 확장했으며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투쟁으로서의 탈식민주의 운동이자, 예술지상주의에 빠진 제도 예술의 무기력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회참여적 미술운동이었다.
민중미술, 특히 현장미술의 유산은 2000년대 이후 한국미술이 정치적 비판에서 사회적 참여로 전환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 대추리와 강정마을, 용산 참사 현장 예술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공감, 애도와 저항의 예술공론장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그곳에서 공감의 윤리로 상호작용하며 지역 주민들과 기억투쟁을 함께 벌였다.
대추리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을 ‘들사람’이라 부르며 조직이 아닌 영토선 없는 네트워크로현장에 참여했다. 일군의 예술가들이 체계적인 예술운동을 조직했고 미술은 물론 문학, 노래, 연극, 춤, 영화, 만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1천여 명의 예술가들이 힘을 보탰다. 대추리의 예술작품은 사적인 맥락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자산이 되었고, 공동체와 동행한 공동체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경험은 강정마을과 용산참사 현장으로 이어졌고, 현장예술은 사회적 재난이나 역사적 사건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진화했다. 여기에는 예술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통합이라는 화두가 들어있다. 또한 엘리트 예술가의 문제의식이나 표현방식을 일방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현장의 구성원들과 대화를 통해 상호주의적 관점을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할만하다.
■ 윤정인 기자 cherisheep@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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