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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진실의 미학+현상학 -한국미학예술학회 가을 정기학술대회- 본문
지난 10월 17일에 한국미학예술학회와 한국현상학회 주관으로 온라인 학술대회가 열렸다. ‘포스트진실’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현시대를 진단하고, “진실의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문화와 예술의 위상과 가치에 대한 철학적 및 미학적 숙고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였다. 이에 본지에서는 주목할 만한 발표문 세 편을 뽑아 소개해보고자 한다.
탈진실의 시대에 대한 담론 주체의 위기
-진실과 주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脫眞實, post-truth)’을 선정한 바 있다. 사전에서는 탈진실을 “객관적 사실이 개인적 믿음이나 감정보다 대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덜 영향을 끼치도록 관여하거나 혹은 표시하는 환경”이라고 정의했다. 김분선은 이러한 정의가 지칭하는 바가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현상에 대한 진단에 가까울 뿐 특정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탈진실을 정확히 규정하고 원인을 밝히려는 학문적 시도들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탈진실의 연원을 추적하는 가운데 서양 철학의 전통과 그에 맞서는 현대철학의 논의를 대립적인 양태로 설명한다. 김분선은 학자들이 탈진실의 정신과 방법적 서사에 가장 큰 역할을 한 현대의 철학자로 푸코를 지목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매킨타이어는 탈진실의 원인 중 하나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꼽으며 특히 텍스트의 해체를 주장하는 이론들이 저자의 의도와 의미에 대해 제기한 회의주의적 논점들이 탈진실의 관점을 야기했다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접근법에서는 어디에도 정답이 없고 “각자만의 이야기”만이 존재하며 이러한 객관적 진실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탈진실의 정신적 기반이 된다. 그러나 논자는 철학의 성찰 과정 자체가 줄곧 참된 것을 찾기 위한 사유였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과학적이고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의 연속이었다고 반박한다.
철학에서 보여주는 회의주의적 태도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진리를 찾기 위한 지속적․절차적 방법론의 과정이며, 진리를 독점하려는 진리주의(the regime of truth)를 배격하는 시도였으며, 과학이 개입해 유통하는 현재의 파편적 정보들은 철학적 진리 게임과 무관하다. 논자는 철학이 해온 진실 전복의 행위와 탈진실의 현상은 다른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철학적 진실 전복 행위는 권위를 가지고 독점화된 진리에 대항하는 대결 구도로 철학적 지식을 확장하게 한 본체라면, 과학기술의 제반을 배경으로 유통되는 진실의 정보들은 목적적 사유 없이 단편적 진단을 목적으로 해 기존의 정치적 관계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분선은 푸코가 탈진리를 추구했던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푸코 윤리학의 중심 개념인 배려 주체에 대해 논한다. 푸코는 서양 전통 철학의 주체 개념을 인식 주체와 배려 주체로 구별한다. 인식 주체는 무엇이 참인지 파악할 수 있는 인식 능력을 통해 필연적 참을 추론할 수 있는 사유의 주체를 말한다. 배려 주체는 자신에게 제약된 경험적 삶과 자기 육체의 쾌락에 저항하는 윤리적 실천 규약을 토대로 보편적 질서를 따르는 대신 자기 삶에 부합하는 개별적 삶의 양식을 구축해 공동체의 윤리를 위반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주체이다. 푸코는 데카르트적 인식 주체인 코기토는 자신의 사유를 통제할 수 있는 제한적 상황에서만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장성이 부재하게 되고, 따라서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삶의 기술을 연마하는 배려 주체의 환경을 확장하고 윤리적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근대 이전의 주체로 회귀할 것을 권고했다. ‘파레지아(parrhesia)’는 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공론의 장에서 진실하게 말하기, 진실하게 말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이를 수행하는 주체는 자신의 내면적 진실과 대면하고 권력적 질서와 무관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칠 용기를 감행함으로써 윤리적 주체로 나아가게 된다.
논자는 파레지아가 자기 실현의 방책이자 윤리적 주체를 형성하는 자기 훈련의 과정임에 주목한다. 결국 푸코가 데카르트적 주체를 해체한 의도는 참지식에 대한 해체 자체가 아니라 인식 주체의 형성 가정에서 배제된 인간과 담론의 문제를 재점화하고 자기 배려 주체의 회복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탈진실의 시대에 요청되어야 할 주제는 오히려 푸코가 논의한 자기 배려 주체인데, 권력 질서에 대항해 주어진 상황마다 자신의 윤리적 행위를 규정하고 선포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포스트 진실/포스트 미디어/포스트 예술
-동시대 예술의 이율배반적 조건들-
최종철은 ‘포스트 진실’이라는 용어가 2016년에 주목받게 된 이유는 당시 미국의 정치적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지적한다. 대선에 출마한 트럼프의 선동적 수사와 그에 열광했던 유권자들의 무지와 맹목, 거짓된 선동이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며 사람들은 진실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갔다.
포스트 진실의 언어는 현대의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는 정보의 흐름을 개별적․사적 구조로 바꾸었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은 개인을 특정한 정보 군락 속에 가두는 선별 작업을 수행하고 개인의 편견을 고착화시키며 소셜미디어는 편향적 사실을 공명하고 확장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실들은 진실의 보편타당성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이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가짜 뉴스 생산자들은 “자신이 바로 진실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추구해 사실성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포스트 미디어는 가타리가 처음 제안한 용어로 원래는 매스 미디어의 경제적․이념적 패권에 대항하는 독립 미디어의 정치적 비전을 응원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마노비치는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미디어 혁명이 과거의 다른 매체혁명(출판혁명, 사진혁명)과 다른 양상을 띤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매체들이 매체 내부의 특정한 가능성(출판-텍스트, 사진-이미지)에 천착했다면 뉴미디어는 미디어가 모든 단계의 소통과 경험에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 공간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매체 경험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었다. 물질성(materiality)과 유형학(typology)에 얽매인 기존 미디어 담론 대신 새로운 포스트 미디어 미학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제 물리적 매체를 기반으로 한 예술 작품은 낡은 것이 되었고 관객이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작품에 대한 감각경험 대신 데이터를 직접 생산․유통․수신하는 기술적 경험의 주관자가 되었다. 그러나 포스트 미디어 역시 정보의 질과 객관성보다 양과 주관성을, 내용의 진실성보다 불확실성이나 우연성을 강조하며 영향력(affect)에 대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사유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맹점을 지닌다. 사용자 일반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해 경험의 질적 가치(작품이 관객에게 미치는 감각적 깊이와 영향력)를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 속에서 예술은 “미학적 아노미” 상태로 열리게 된다. 독창성과 창조성은 사라지고 새로운 형식을 고안하기보다는 기존의 예술을 재활용하는 사후 제작(postproduction)의 전략에 만족하게 된 상황 속에서 예술이라는 특정한 실천은 어떻게 가능해질까?
미학과 반미학, 매체 특정성과 일반성,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복잡하게 엉킨 현 상황에서 예술은 포스트 미디어의 전자적 복제 기술에 의해 전유되는 관례들의 잔상(afterimage)을 통해 지속되며 이들은 이종적 포맷을 통해 새로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현대미술은 완전히 종합될 수 없는 이율배반(antinomies)에 종속되며 설치, 아카이브, 관계와 같은 반미학적 형식들이 극단적인 자기 모순의 구현을 띤 모순 대상(paradox objects)로서 현대 미술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이 안에서 예술은 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된다.
논자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포스트 예술의 양상을 담고 있는 작품의 예를 살핀다.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는 2008년 쓰촨성 대지진에 대한 반정부 발언을 기점으로 소셜미디어를 정치예술의 핵심적 도구로 활용해왔다. 그의 온라인 게시물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지속적으로 복제․확산되어 작가의 예술적 신념을 억압하는 정부기관의 통제를 상쇄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진실 이후의 전체주의적 위협과 예술 이후의 양식적 아노미를 극복하는 정치 예술의 새로운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다학제적 리서치 그룹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 작업은 협업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국가폭력, 인권위반, 환경파괴 사례를 조사 분석하고 시각적 증거 파일로 제작해 국제사법재판소와 같은 공적 포렴에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시각적 증거의 결핍과 진실의 공백에 대해 사건을 “감식(forensic)”하고 맥락을 “축조(architecture)”해 다양한 가능성의 조건들을 투사하고 사법적 논의에 유효한 대안적 진실을 구성한다. 레바논의 미디어 예술가 왈리드 라드 역시 비진실의 언어로 당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강의 퍼포먼스라는 독특한 소통/감상 경험을 수반하는데 사실과 허구, 역사와 이야기, 미학적 행위와 정치적 담론이 교차하는 강의 속에서 맥락과 수행성이 강조되는 포스트 예술의 조건과 역할을 시연한다. 자명한 역사적 진실보다 맥락과 의견에 의존하고 작품의 물리적 현존보다 유기적 변형과 수행성을 강조하는 라드의 작업은 모순대상이 되며 포스트 예술의 이율배반을 드러낸다.
포스트온라인 매체 조건과 수행성의 역설
-데리다와 루소를 통해서-
미국 미술가 래더맨 유켈리스는 지난 9월에 「for→forever」라는 공공미술을 개시했다. “서비스 노동자에게, 뉴욕시가 살아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쓴 손 글씨를 비닐 배너에 전시해 퀸즈미술관 전면 유리에 설치하고 이 메시지를 띄우는 에니메이션이 타임스퀘어 광장의 디지털 빌보드와 지하철 역 광고판에 동시 게재되었다. 이 작품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강타 당한 도시가 붕괴되지 않도록 사회 기반 시스템을 유지한 특정 분야의 노동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취지였다. 두 번째로 비슷한 시기, 뉴욕 맨해튼의 배터리파크에서는 ‘트럼프 조각상 계획(TSI:The Trump Statue Initiative)'이라는 예술가 집단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벌어졌는데, 7월 워싱턴 D.C.에서 시작되어 미국 대선이 치뤄지는 11월 3일까지 세 도시에서 수행된다. 황금색으로 전신을 칠한 남녀 4명이 “제45대 미합중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시민의 권리의 자유와 파괴자/2016-2020”이라는 활자가 박힌 제단 위에서 공연을 펼치는데 무덤을 묘사하는 제단에는 “비극을 기리며: 어쩔 수 없다”와 “비극을 기리며: 루저”가 새겨져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서 공적 책무를 저버리고 코로나 19사태에 대해 내뱉은 부정의하고 검증되지 않은 발언, 미 참전용사들에게 표를 얻기 위해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패자’, ‘호구’라고 조롱한 사건을 환기시키기 위해 사용된 어구였다. 위의 두 작품은 ‘성과/성능(performance)'에 따른 보상이라는 성과주의가 우세한 정치․경제적 현실과 경제논리와 착취로 잠식되어버린 예술계의 ‘퍼포먼스’ 아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논자의 논의를 직접적으로 예표한다. 사회구조적 조건과 인간의 수행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분기점은 2007년이다. 이 해에는 애플의 아이폰 1세대와 클라우드 서비스가 개시되었고,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국제금융위기가 몰아쳤으며, 퍼포먼스 아트가 서서히 부상하던 시기이다. 능력주의 사회는 양극화가 심화되는 방식으로 사태를 해결했고 경제위기와 연동된 미술시장의 위축은 퍼포먼스 아트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퍼포먼스 아트는 당대 미술계의 형식이자 미적 양식으로 재위치되어 미술관의 대형 커미션 작업과 갤러리 컬렉션으로 수렴되었다. 달라진 디지털 미디어 환경 하에서 우리의 인식, 행위, 의사소통, 관계는 달라졌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과 ‘성과’는 객관적 지표처럼 여겨지고 성과는 각 개인의 주체성을 자발적으로 시스템에 바치도록 강제했다. 퍼포먼스 아트에서도 스펙터클한 연출과 물량 경쟁, 협업의 명목 하 이뤄지는 행위의 위임, 제작진의 불완전 고용과 단기계약, 대리 신체에 의한 창작 등의 모순이 나타나게 되었다.
논자는 이러한 동시대의 매체조건과 수행성을 살피기 위해 루소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데리다의 이론을 끌어온다. 데리다는 루소를 통해 음성 언어의 직접적 현전과 문자 언어의 재현이라는 이분법적, 차별적 정신사의 근원을 비판한다. 데리다는 루소의 직접성과 투명성에 대한 이상, 매개되지 않는다는 환상, 대리 보충에 대한 인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모순을 읽어내고 해체했다. 루소는 절대적 토대이자 투명성을 지닌 ‘기원’을 가정한 채 논리를 펴나가지만 이것은 텅 빈 실체이며, 논증방식 자체가 그런 투명성이 불가능하거나 매개(의 조건과 가설적 관계)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성질의 것임을 스스로 노출해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데리다는 루소와 그의 문학적 글쓰기 속에서 ‘대리 보충(supplement)’ 개념을 설명한다. 문자는 음성 언어에 비해 배척당했지만 실제로는 전자에 의해 후자의 존립과 지배가 가능했고, 현전이 아니라 서로에 의해 서로의 존재가 성립이 가능한 대리 보충과 매개를 통해 연쇄와 차이는 무한히 지연된다.
강수미는 데리다의 이론적 수행을 동시대의 문제에 적용해보인다. 모두가 매개되며 대리보충적인 관계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개개인을 대상으로 한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분리된 평가와 보상은 가능하지 않다. 퍼포먼스 아트에서도 예술 행위를 위임 노동/대리 보충하는 퍼포먼스와 아티스트 간의 여러 사회․ 경제적 관계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서두에 언급한 퍼포먼스는 팬데믹 시대에 예술가의 신체적 현존이 예술작품으로 제시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변화된 양상을 보여준다.「for→forever」는 작가가 현장에서 퍼포먼스를 수행하지 못하고 감상자도 현장 참여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손으로 쓴 메시지를 작품화했다. 그의 공공미술은 작가의 신체가 직접 투여되어야 퍼포먼스가 촉각적이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나 그간 사회가 익명의 정체성으로 찍어 누르고 비가시적으로 사용해왔던 주체들을 예술의 자리에 초대해 감사와 존경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했다. 그는 주체들의 자리를 만들고, 새로운 호명방식을 시연했다. 이와 같이 몸에 익숙해진 투명성과 직접성의 논리, 깊게 구획된 차별적 관계의 경험을 영점에서부터 다시 새롭게 질문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현 시대에 필요하다.
■ 정리: 윤정인 기자 cherisheep@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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