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한국 전쟁, 냉전체제의 형성과 평화체제의 모색 본문

6면/학술동향

한국 전쟁, 냉전체제의 형성과 평화체제의 모색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12. 10. 15:15

한국 전쟁, 냉전체제의 형성과 평화체제의 모색

-한국전쟁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지난 9월 25일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연구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한국학중앙연구원 주관으로 한국전쟁 7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온라인으로 개최되었다.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사실상의 기원”이자 “현재 진행형”인 한국전쟁을 되돌아보기 위해 위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 중 주목할 만한 글을 뽑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950년대 미국의 6·25전쟁사 연구와 냉전문화 
 정용욱은 미국 사회에서 6·25전쟁을 다루는 서사가 한국전쟁기와 종전 직후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당시 편찬된 역사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미 육군이 편찬한 6·25 전쟁사 중 하나인 『정책과 지도』와 이지 스톤이 출간한 『비사 한국전쟁』(이하 『비사』)가 그것인데 전자는 학계에서 전통주의를, 후자는 수정주의적 시각을 대표한다. 전쟁 발발 시기에 6·25 전쟁사의 원형이 만들어진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분위기를 살펴보는 가운데 전쟁 서사와 기억이 생산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사서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시대적·역사적 맥락과 편찬 경위, 그리고 지성사적 맥락과 학계·언론계의 반응을 두루 살펴본다.
 먼저 미 육군의 전쟁사 편찬을 담당한 최상급기관은 육군부 군사감실이었다. 이들은 1950년 8월이라는, 전쟁이 한창인 시점에 자료수집과 역사기록에 착수하고 한국전쟁사 전체의 편찬으로 연결하려는 기획을 마련한다. 이 작업은 정부 차원의 역사편찬 사업의 하나이기도 했으며 종전 후에도 냉전사 계획의 일환으로서 계속되었다. 
 군사감실은 전쟁사와 전투(작전)사로 나누어 전사를 편찬해 6·25 전쟁기에 미군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이해방식을 제시했다. 집필을 주로 담당한 것은 극동군사부 소속 군사관 제임스 슈나벨이었는데 이 책은 그의 저서이면서 동시에 군사감실 군사관들이 편찬에 대거 참여한 작업물이다. 서술 내용을 구상하는 단계부터 군사관들이 동원되어 회의 끝에 내용을 확정했고 주요지휘관들의 구술인터뷰 내용을 담아 그들의 작전을 합리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원고가 완성된 뒤에도 육군 내 상위부서, 군부와 정부의 관련기관 및 상부기관들의 검열을 거쳤다. 그 과정 가운데 보안부는 여러 내용을 삭제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첩보작전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전쟁 발발을 예측하지 못한 미군 첩보기관 활동의 실패에 관한 내용이다. 삭제를 지시해 첩보활동을 계속해온 사실은 은폐하고, 이들이 전쟁 발발 징후 예측에 실패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책은 군부가 행위와 편찬의 주체였던만큼 미국 정부와 군부가 표방한 애초의 편찬 취지와 목적에 충실한 내용을 담았다.

 책이 출간된 후 학계에서는 당시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합동참모본부나 육군본부의 자료를 활용한 것을 연구사적 기여로 인정하면서도 이미 공개된 것 이상의 논쟁을 보여주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독립저널리스트 이지 스톤은 비슷한 시기에 정세를 추적하며 독자적으로 6·25 전쟁사를 집필했다. 『비사』는 당대의 언론보도나 정부 보고서만을 활용하며 사건의 배경이나 정책결정자의 의도를 추론하고 가정하는 데에 그쳐 현 시점에서 내용의 학문적 의의는 부족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집필되던 시기의 정치·사회문화적 배경과 당대 언론, 미국 정부와 군부의 대응을 살펴보는 일이다. 스톤의 글은 6·25 전쟁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 정계와 재계, 군부에 의해 세계 평화가 훼손되고 있다는 인식, 미국 언론이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의식을 주로 한다. 스톤의 원고 출판은 번번이 거절당했고 좌파 계열 출판사에서 겨우 출간할 수 있었다. 책은 출판되자마자 불온도서 목록에 올랐다. 대부분의 언론은 책을 두고 편파적이고 친공 경향이 극심하다고 비판했다. 학계의 서평에서는 스톤의 주장이 가진 편향성과 자료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그의 추론이 부분적으로 진실을 포함하고 있고 그의 문제제기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
 6·25 전쟁은 미국 지성사에 충격을 주었고 누가 전쟁 발발에 책임을 질 것인가, 냉전의 관점에서 한국에서의 전투가 지닌 중요성은 무엇인가,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6·25 전쟁에 미국이 개입한 것은 소련과의 대결정책에 맞선 정당한 개입으로 자리매김했고 이는 전후 신우익의 탄생과 보수주의적 정치 구조 수립에 기여했다. 스톤의 『비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6·25 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의문을 제기하고 당대 미국의 냉전 전략을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지면을 얻기 어려웠던 그는 결국 독립매체를 창간해 60년대에는 베트남전 개입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언론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미 육군 군사감실과 독립언론인 스톤의 6·25전쟁사 편찬과 연구는 미국에서 냉전과 냉전문화가 자리잡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Izzy” Stone 이라고 불렸던 Isiodor F. Stone

 

한국전쟁과 유럽방위공동체(EDC) 창설 드라마
-글로벌 차원에서 본 냉전전개의 에피소드 
 유럽에서 냉전의 전개는 유럽통합의 발전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신종훈은 한국전쟁 이후 유럽에서 전개된 유럽방위공동체 체결 움직임, 독일 재무장 문제를 둘러싼 각국의 반응과 대응을 살핌으로써 냉전 체제 하에서 여러 유럽 국가에 두려움으로 작용했던 “허구적 요소의 현실화”적 특성을 지적한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대립으로서의 냉전이 열전으로 분출될 수 있다는 염려를 현실화해 냉전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 영향력은 세계적이었다. 군사적 충돌이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은 서방진영에 확산되었고 이를 계기로 독일의 재무장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유럽 국가들은 공산주의와 독일의 위협이라는 두 공포에 대응하며 통합의 움직임을 벌여나갔다.
 나토(NATO) 창설 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서독의 군사적 기여가 필요하리라는 주장이 시작되었다.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이 성공하고 12월 중국 공산주의가 승리하면서 논의는 설득력을 얻어갔다. 특히 국무부와 국방부 관료 및 핵에너지 전문가들이 작성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서 NSC 68은 소련이 비공산주의 진영 정부와 사회체제를 완전히 전복하고 파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냉전 전략을 위해 서방동맹을 군사적·경제적·정치적으로 강화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유럽 국가들은 비판적이었고 독일 점령군의 지위로 독일 재무장에 대해 사실상 거부권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반대가 특히 거셌다. 
 대서양 동맹 내부의 독일 재무장에 관한 찬반논의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급격히 찬성 쪽으로 기울게 된다. 1950년 9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서독 군대 창설과 서독이 참여하는 나토 방위군의 창설을 요구했고 미국 정부는 나토의 틀 안에서 독일을 재무장시키고자 했다. 독일의 군국주의 부활을 두려워한 프랑스의 대안은 공동의 방어를 위해 통합된 유럽의 정치적 기구와 유럽군의 창설을 핵심으로 하는 유럽방위공동체 창설이었다. 그러나 이를 구상한 플레벵 플랜은 독일을 차별하는 여러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영미 정치가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정작 서독은 유럽방위공동체 창설에 찬성하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당시 독일의 총리 아데나워는 서독의 주권 확보 문제를 우선시하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 
응했는데 서독이 유럽방위공동체의 회원국이 되면 곧 나토의 회원국이 되리라 전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방세계에서 독일 재무장을 위해 두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는데 미국의 제안에 따라 서독군을 나토에 통합하는 방안과 프랑스가 제시한 유럽군에 통합하는 경우였다. 1951년 9월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독의 군사력을 유럽방위공동체에 통합시키는 것에 합의했고 서독의 주권확보와 유럽방위공동체의 창설이 함께 이루어졌다. 1952년에는 파리에서 유럽방위공동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미국은 프랑스에게 빠른 비준을 종용했다. 
 점차 정세는 프랑스의 유럽방위공동체 비준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는 유럽방위공동체에서 병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서독보다 적은 의결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군 기지가 베트남군에게 함락된 후 바뀐 정권에서 프랑스 의회는 유럽방위공동체 비준을 안건으로 삼는 것조차 거부해 유럽방위공동체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이후 독일 재무장의 주도권은 영국에 넘어가게 된다. 유럽방위공동체 설립의 실패 후 서유럽 안보공동체의 총체적 붕괴라는 위험을 목전에 둔 상태라 서유럽국가들은 극적인 양보를 통해 협상에 도달하고 서독은 주권을 확보하고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유럽은 소련 공산주의의 서유럽으로의 팽창과 독일 부활의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가상의 위협과 마주했다. 유럽방위공동체 창설과 실패의 과정은 이런 허구적 요소의 현실화에 기초하고 있다. 사실상 NSC 68의 전제는 오판으로 드러났으며, 프랑스가 독일에게 느꼈던 위협 역시 역사적 기억에 뿌리를 둔 가상의 위협이었다. 프랑스는 그 두려움 때문에 유럽방위공동체를 주저 없이 사장시켜버렸다. 독일재무장을 둘러싸고 일어난 가상 공포의 현실화는 유럽 통합 발전을 저해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득이 된 측면이 있다. 유럽방위공동체 창설의 실패로 유럽통합이 군사 분야를 배제했고 이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악화시킬 수 있는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군사적 통합의 실패는 
유럽통합의 영역을 경제적 분야에만 집중하게 해서 이후 유럽통합의 과정을 더 원활하게 만드는 효과도 발휘했다. 이처럼 한국전쟁과 유럽방위공동체 창설 과정을 연결해 고찰해 볼 때 냉전 전개의 양상이 글로벌 차원에서 함께 밀접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 1955년 결국 NATO에 가입하게 된 독일

 

 

한국전쟁 전후 보건의료체제의 구성과 유엔 및 유엔군 기구의 역할

 코로나 19의 팬데믹 상황을 맞아 한국의 ‘K-방역’은 높은 성취를 인정받았지만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둘러싼 갈등에서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문제라는 약점과 과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질병관리청과 의료인들의 헌신은 주목받았으나 치료와 방역의 대부분을 민간 영역에 맡긴 점도 국가 의무의 외주화, 민영화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동원은 모순적 경향이 결합된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성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보건의료체계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살펴본다.
 광복 후 미군정은 경무국 위생과를 폐지하고 위생국을 설치한 후 보건후생국으로 개편, 보건후생국으로 개칭했다. 조선총독부는 질병과 범죄를 동일시해 격리와 배제 정책을 폈지만 미국인들은 질병과 범죄를 분리하고 질병을 퇴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보건후생국은 1946년 보건후생부로 승격해 미군정청 부서 중 조직과 인력 면에서 가장 강력한 부서가 되었고 보건사업을 집중적으로 수행했다. 미군정은 한국인 의사들을 미국에 연수를 보내 공중보건행정을 배워오도록 주선했고 이들은 정부 수립 이후까지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미군정은 전염병 예방과 치료에도 관심을 기울여 많은 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수립이 지연되면서 점차 보건행정 조직과 사업이 축소되었고 생활이 아닌 생존이 더 시급한 문제였던 한국인들에게 보건위생은 부차적 문제로 다가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보건후생부는 사회부 산하의 보건국으로 격하되고 조직도 축소되었다. 1949년 정부조직상 보건부가 독립함에 따라 정부수립 후 최초로 보건부 조직이 생겨났지만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에 미군정기에 비해 보건행정은 후퇴하고 있었다. 결핵과 전염병의 확산, 서울 중심으로 인력과 시설이 몰리면서 발생한 무의촌(無醫村) 문제는 특히 심각했다. 악화일로였던 보건 행정과 보건위생의 현실을 변화시킨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미군점령기에 미군이 한국의 보건위생과 전염병 방역에 힘썼던 상황이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뿐 아니라 유엔 등 국제사회가 한국의 보건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유엔경제사회이사회의 호소에 의해 한국에 대한 유엔군 사령부의 구호물자 원조가 시작되었고 교전지역을 제외한 곳에서 민사 원조를 담당할 기구인 주한유엔민사원조사령부(UNCACK)가 창설되었다. UNCACK는 한국인의 보건과 위생을 통제하고자 했고 각 지역에 공중보건 책임자를 파견했는데 국제기구와 유엔가입국의 전문가들이 많았다. 서울 수복 후 보건부는 인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속성으로 인력을 양성해 의료반에 참가시켰고 피난 때문에 서울에 집중되었던 의료인력들이 지방으로 분산되어 의료구호반 편성에 도움이 되었다. 1951년에는 국민의료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에서보건행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전시에 한국의 보건위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유엔과 유엔군 기구의 영향력은 휴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휴전 이후 UNCACK를 이어받은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와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한국의 보건위생 문제를 담당했다. 이 시기 보건진료소와 보건소가 확대되고 전쟁기부터 이어진 예방접종과 방역이 가시적 성과를 드러낸다. 1958년, 스칸디나비아 3국과 UNKRA가 공동으로 출자하고 한국 정부 재정이 함께 투입되어 개원한 국립중앙의료원은 의미가 크다. 국공립 의료기관으로서 무료치료 사업을 담당했고, 스칸디나비아 3국이 운영을 맡았으며 1958~1967년의 10년간에는 전체 환자의 절반이상을 무료로 진료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진료수준이 높은 의료기관으로 평가받았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한국보건의료체계의 전개는 미군과 유엔, 유엔군 기구의 공중보건 활동이 미치는 압도한 영향력과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 외부적 재정투입은 분명한 효과를 나타내기는 했으나 확고한 의료정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단기간 효과에 그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경험은 보건의료 인력의 확대와 보건학 발전으로 나아가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 정리 : 윤정인 기자 cherisheep@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