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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램지어 교수 ‘사태’를 통해 본 아카데미 역사 부정론 - 역사적 오류는 어떻게 부정론이 되는가? - 본문

6면/학술동향

램지어 교수 ‘사태’를 통해 본 아카데미 역사 부정론 - 역사적 오류는 어떻게 부정론이 되는가? -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4. 4. 21:34

  지난 202012월 하버드 법대 미쓰비시 교수 존 마크 램지어(John Mark Rameseyer)는 국제학술지 국제법경제학리뷰에 게재된 논문 태평양 전쟁의 성()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하고 위안부피해와 일본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하버드대 내 뿐만 아니라 국내외 학자들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버드대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교수 등은 이 논문의 문제를 지적하는 학술성명을 냈고, 동대학 로스쿨 소속 석지영 교수도 기고문을 통해 논문 내용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램지어 교수는 일부 오류를 인정하였지만, 논문과 관련된 토론은 다른 학자들의 몫이며 개인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램지어 사태가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역사를 왜곡 부정하는 주장을 과학과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연구윤리 위반일뿐만 아니라 의도적 역사부정론과 혐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사태에 대해 지난 312, 일본군성노예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일본군위안부연구회, 일본군위안부역사관(나눔의집)이 공동 주최한 긴급 토론회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 하버드 법대 미쓰비시 교수 존 마크 램지어 교수                                       ⓒ하버드대 로스쿨 공개 동영상 캡처

<공창제와 일본군 위안부제도의 차이>

  호사카 유지(保坂 祐二)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는 램지어 교수 논문의 성매매계약부분에 대해 반증한다. 램지어 교수는 19382월의 일본 공문서 내무성 통첩을 근거로 위안부를 시키기 위해 해외로 보내는 여성들은 원래 일본에서 추업(醜業)’을 하는 여성이었고, 경찰서에 출두해서 해외도항증명서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춘부가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무성 통첩에 실린 일본정부의 방침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외무성 공문서가 존재하며 일본 병사의 증언도 있다. 중국 남부의 난닝(南寧)에서 헌병대의 조장으로 근무한 스즈키 타쿠시로(鈴木卓四郎) 헌병 하사관(憲兵下士官)(1974, pp. 91)에 쓴 내용에 따르면 위안소는 일본군이 개설한 군위안소였고 여성들은 계약 사기로 유괴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군의 부조리를 바로잡아야 하는 헌병인 저자는 그 상황을 방치했는데 바로 군이 설치한 위안소였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일본병사가 조선인 위안부를 묘사한 사례는 많고 모두 여성들이 유괴되었다고 적혀있었다.

 

  1937년까지 해외 매춘업소와 1938년 이후의 일본국 위안소는 별개의 존재이지만 램지어 교수는 1937년까지의 일본이나 조선에서의 매춘업이 그대로 일본군과 관계없이 해외 매춘업소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 일본은 1925취업을 시키기 위한 부녀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매춘을 시키기 위해, 미성년자뿐만 아니라 성인여성이라고 해도 해외로 보내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편법으로 공창제대신 요리점 작부제를 도입했는데 이는 일본군 위안부제로 연결된다. 작부란 술을 따라주면서 손님을 접대하는 여성이고 매춘부가 아니다. 창기가 아닌 예기, 작부, 여급, 메이드, 댄서 등으로 작부계약서를 작성한 여성들은 일본에 가서 매춘을 강요당했으며 그들은 공창대신 위안부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램지어가 증거로 제시한 성매매계약서 양식은 19381월에 군마현(群馬県)에서 체포된 업자가 갖고 있던 양식으로 모두 4장이고 그 중 1장은 각 방면에 대한 협조 요청서였다. 계약서에는 계약기간 2’, ‘벌어들인 돈의 10% 가 소득’, ‘육군위안소에서 작부과업을 할 것’, ‘계약을 중도 해약할 경우 위약금을 낼 것등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양식은 성매매계약이 아닌 작부계약서이다. 193712월 군위안소의 본격적인 개설을 결정한 일본군은 업자들을 시켜 여성들을 작부라는 이름으로 모집했으며 여성들은 매춘계약이 아닌 작부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이다.

 

  또한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 원래 매춘부였던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많다. 194410월 작성된 연합군의 포로심문보고서 제49호는 생포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조사한 문서인데 위안부 20명 중 원래 매춘 경험이 있는 여성은 소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속아서 버마까지 연행되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의 군의관이나 헌병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속았다고 울부짖었지만 이미 가불금을 받았고 군인들의 감시 하에 있는 전쟁터에서 도주하려고 해도 도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위안소의 상황은 램지어 교수가 말한 업자와 여성들의 신뢰 하에 이루어진 성매매계약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군위안부부정론자들은 왜 강제연행성노예에 집착하는가?>

  김창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램지어의 이번 논문뿐만 아니라 논문이 등장하게 된 특별한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램지어의 글에서 돌출되는 두 부분에 주목한다. 하나는 한반도에서의 동원에 관한 기술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단락, 정부가 여성들에게 매춘(성매매)을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사기꾼 모집업자와 협력한 것이 아니었다. 모집업자가 군 위안소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수십년간 젊은 여성들을 속여 매춘업소에서 일하게 만든 조선인 모집업자였다라는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초록에 등장하는 “‘위안소라고 불린 전시매춘업소을 둘러싼 남한과 일본 사이의 오래된 정치적 논쟁이라는 부분이다. 전자는 특별한 논증이 없이 돌출적이며, 후자는 본문에 전혀 등장하지 않은 내용이 돌출적으로 담겨있다.

 

  위 논의들은 2019년에 발표한 논문인 위안부와 교수들에도 담겨져 있었다. 그 글은 강제연행에 초점을 맞추어 성노예 담론을 비난한 것이며,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을 염두에 두면서 쓰여진 것이다. 최근 발표한 글은 이 논문의 일부를 발췌·수정하여 작성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더욱 부자연스러워진 위의 두 가지 돌출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19년 글은 그의 1991년 논문 제국 일본의 계약매춘 : 상업적 성산업에서의 크레더블 커미트먼트와 일본군위안부부정론자들의 주장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1991년 논문에서 램지어는 일본 정부 등의 자료를 동원하여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매춘에서 매춘부와 업자 사이의 관계는 상호 계산된 계약관계였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그 논지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주목되는 것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램지어가 학문적 자제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논문이 산업구조의 역사에 대한 연구일 뿐 규범적인 에세이가 아니라는 점, “자료의 부족 때문에, 일본 여성들이 얼마나 빈번하게 자발적으로 매춘부가 되었는지, 그들이 얼마나 빈번하게 가족의 압력을 받아 그렇게 되었는지라는 기본적인 경험적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으며”, “설명의 편의를 위해 관련된 여성들이 일관되게 스스로 고용합의를 선택한 것처럼 묘사한다라는 점 등을 밝혔다. 그러나 2019년 글과 2020년 글은 전쟁 전만이 아니라 전쟁 중으로, 일본만이 아니라 식민지조선으로, 매춘부만이 아니라 일본군위안부로 한없이 확대 적용된다.

 

  김창록 교수는 20년을 사이에 둔 램지어의 이 비학문적인비약은 왜 등장하게 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본 정부나 기업과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관련 증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램지어가 1998년 가을에 하버드대학에 미쯔비시 일본법 교수로 임명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2018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을 받았고 그 사실이 라이샤워(Reischauer) 일본연구소 홈페이지의 소개글에 특별히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만이 확인되어 있을 뿐이다.

 

  램지어의 2019년 글은 1990년 이래 일본군위안부부정론자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여기서 주된 문제는 강제연행을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 ‘성노예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법경제학 논문이라는 외피로 써서 재구성한 것이 2020년 글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2006년 출범한 아베 신조 1차 내각 이래의 일본 정부의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근거가 매우 취약하다.

 

  첫째, 1993코오노 담화에 의해 일본 정부의 강제연행 인정은 확실시되었다. 특히 한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어서,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전체적으로 보아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다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 부의 이송에 관해관여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아래 에서 이루어진 가혹한 것이었다. 램지어의 2020년 글에도, 일본의 국가기관인 일본군필요로 했고”, “부추겼고”, “협력했고”, “요구했고”, “약속했고”, “위안소를 세웠고”, “허가 했고”, “금지했고”, “명령했다라고 되어 있다. 그것만으로 당시의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며, 그것만으로 일본의 국가책임이 발생한 것이다. 아베를 포함한 일본의 여러 총리들이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둘째, 일본 정부는 “‘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반한다라고 주장하지만, 성노예가 무엇인지, 성노예에 부합하는 사실은 무엇인지, 성노예에 반하는 사실은 무엇인지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일본 정부의 주장은 그냥 성노예라는 표현이 싫다라는 감정의 표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부정론자들은 코오노 담화지우기, 일본군위안부지우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램지어의 2019년과 2020년의 글들은, ‘하버드대학 로스쿨 교수국제학술 지의 권위를 빌려, 바로 그 취약한 강제동원 부정’·‘성노예 부정주장에 자유계약이라는 그럴 듯해 보이는 원군을 제공하려 한 것에 다름 아니다.

램지어 사태는 학문 대 학문의 전쟁이 아니라 학문 이전에 대한 학문의 질타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저열한 일본군위안부지우기 기도에 대한 상식의 일갈이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라는 과제임을 드러낸다.

 

ⓒ하버드대 로스쿨 공개 동영상 캡처

 

 

<세계질서와 역사수정주의(부정론)의 정치>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은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떤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갖는지 보고자 한다. 먼저 시간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현재까지의 전후사 속에서 바라보며, 다음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파시즘 및 군국주의 철폐, 제국-식민지 관계의 해체를 가져오는 계기였다. 미국은 군사 점령과 법적 처리 같은 전후처리를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였다.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신뢰하는 동맹국으로 변화하였고, 자신들이 저지른 제국주의적, 반인륜적 악행들이 봉인되었다. 때문에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식민지·점령의 문제이자, 여성인권의 문제이지만, 미국이 구축한 세계질서가 해결하지 못하고, 해결할 수도 없는 유산이자 숙제가 되었다.

 

  한 사람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식민지와 전쟁 과정에서 자행되었던 여성인권을 드러내는 한편, ‘식민지란 무엇이었던가’, ‘일본은 왜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더욱 공격적인 행동을 시도하는가’, ‘2차 세계대전 후에 성립된 세계질서와 그 가치는 제대로 된 것이었던가’, ‘인권은 과연 실현되고 있는가라는 깊숙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제기와 이에 따른 시민운동은 단지 특정한 사실을 밝혀내는 의미를 뛰어넘어, 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 주도로 성립된 세계질서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현재성과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는 식민지배 및 제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래의 근현대사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특정 사건(난징학살, ‘위안부’, 징용)에 대해 일본이 취하고 있는 역사인식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인식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의 근현대사 인식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 역사수정주의는 아베 정권 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면, 2차 대전 배상 즉 전쟁 사죄가 종료했다고 바라보는 관점이다. 도교공습 및 원폭 피해 등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상기하며 교육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들이 저지른 식민지 지배와 착취, 강제 동원등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또한 식민지 피해에 대해 도덕적 책임은 인정할 수 있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며 전쟁 책임의 문제를 법적 문제로 국한시켜버린다.

 

  일본은 패전 이후 군대를 보유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아베 정부의 지상목표는 임기 중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일본을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 수많은 아시아인들을 침략의 희생자로 만든 과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미국을 주전장(主戰場)으로 삼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나 칼 슈미트(Carl Schmitt)같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다룬 연구자들은 지배를 위해서는 군사력 같은 물리적인 힘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가치관, 지식, 역사 인식 등 정신적 우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현재 세계 질서를 만드는 미국의 여론을 일본에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해 전략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역사수정주의와 세계질서의 보편적 가치와의 충돌이라는 모순은 미국이 추진하는 태평양지역에서의 대(()중국 포위망 구축이라는 현실정치에 압도되면서 외면, 묵인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 황지원 기자 h950301@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