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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왜 지금 아동인가 : 아동과 ‘돌봄’에 대한 여성주의적 사유 본문

6면/학술동향

왜 지금 아동인가 : 아동과 ‘돌봄’에 대한 여성주의적 사유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6. 3. 13:21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 팬데믹 상황은 우리 사회에 산재해있던 다양한 문제점들을 가시화하였으고, 그것은 아동 학대라는 가정 내의 가장 내밀한 범죄마저 드러내기 충분했다. 최근 많은 아동이 유기되고 방치되고 심지어 물리적 폭력으로 생을 마감한 사건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은 모성애의 부재에 책임을 전가하고, 개별 여성에게 비난을 쏟는다. 그러나 돌봄은 여성만의 문제인가? 모성의 강조는 자연스러운 것인가? 사실 여성과 아동들의 관계 맺음 자체 역시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모성과 돌봄은 강요되어 왔고, 그 의무를 방기하거나 거부한 여성들은 악녀로 취급당해왔다. 사회적 불안이 증가할수록 한편에서는 모성담론을 혐오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류의 구원은 궁극적 모성이라면서 숭배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모성 언급은 공격과 비난을 받는다. 공격과 비난에 맞서 취약한 사랑으로서 모성을 페미니즘의 정치적 장에서 어떻게 또다시 열어나가야 하느냐는 물음은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된다. 돌봄과 아동 그리고 여성에 대한 도돌이표 같은 물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자 지난 424일 한국여성문학학회의 상반기 학술대회가 열렸다.

 

정치적 감정으로서 사랑의 취약성 - 여자, 아이, 그리고 모성담론

  임옥희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여자와 아이 관계를 살펴본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공·사 영역의 엄격한 분리가 시작되면서 공적 영역의 남성화, 사적 영역의 여성화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엄마가 키워야 반듯하게 제대로 자랄 수 있다는 과학적이론이 등장한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모성의 자연화가 가세한다. 사회의 보수화와 더불어 모성은 여성의 생물학적 현상이자 자연적인 현상으로 만들어진다. 이상적인 모성은 결혼제도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결혼제도 바깥에서 남자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근본 없는불량한 미래세대를 만들어낸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정자 기증을 받아 비혼 여성이 출산하는 행위는 다 같은 모성이라고 하더라도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이성애 정상성 이데올로기는 정상성/비정상성, 결혼/비혼, 단정함/난잡함, 윤리/비윤리의 가면 아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강화한다.

 

  여자와 아이는 사회적 약자로 묶이며, 그중 절대적인 약자는 아이다. 아이를 보살피는 자로서 여성은 절대적으로 무력한 타자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흥미롭게도 아이는 자신의 절대적 무력함과 취약함을 전능성으로 뒤집어놓는다. 아이가 가진 전능성의 환상은 폭력을 야기한다. 이는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타인을 굴복시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의 파괴 행위에도 죽거나 굴복하여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때 엄마는 타자로서 주체가 된다. 주체의 완벽한 지배가 실패하는 지점, 그래서 서로에게 애증과 배신이 드러나는 틈새야말로 타자가 출현하는 공간이다. 나의 지배와 기대에 어긋나는 다른 타자의 등장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분법적 윤리에서 볼 때 나를 배신하는 행위가 된다. 서로가 배신을 견디고 버텨내면서 대상을 완벽하게 소멸시키지 않을 때, 상호 주체성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제 모성을 재생산노동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혁명의 영점으로서 재생산을 분석한다. 여기서 재생산은 임신, 출산, 양육, 돌봄, 간호, 모성, 가사노동이다. 모성을 재생산노동에 포함해 임금화하면 여성이 사적 영역으로 유폐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주체가 될 수 있는 탁월한 정치적 장이 열린다는 점을 주목한다. 지금까지 모성의 무임금성(賃金性)은 사랑의 이름으로 지워져왔다. 가사노동의 자연화를 종식하고, 집안일을 노동으로 인정해달라는 투쟁이 재생산의 정치화 투쟁이다. 반면, 재생산 없는 퀴어들은 임신, 출산, 양육의 부담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상화된 모성을 무임금 재생산노동의 측면으로 보게 되면, 모성은 결혼제도로 묶인 핵가족 이성애 정상성을 지탱하기 위한 지주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사회의 기본가를 생산 노동이 아니라 돌봄 노동으로 설정하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된다면 여성은 왜 남성 시민과 같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이 왜 남성은 여성 시민과 같이 돌봄 제공자가 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한다. 후기산업시대의 복지국가보델은 생계부양과 돌봄 노동 사이의 성별 대립을 해체함으로써 젠더 정의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질적인 존재에게 열리는 경험으로서 낯선 타자를 환대하고 포옹하는 것이 모성이다. 환대로서 모성은 성모/마녀, 기혼모/미혼모, 순혈/혼혈, 정상적 혈연가족/비정상적 혈연가족/퀴어가족과 같은 윤리적 위계의 경계 허물기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타자의 환대는 생물학적인 임신, 출산에 바탕을 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투쟁을 거쳐 상호주체성을 형성하는 관계다. 이상화된 모성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어 무보수 돌봄 노동을 여성에게만 맡겨두고 강제할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함께 키우고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보편적 보살핌이자 타자의 환대로서 모성으로 열리는 길이 아닐까하고 임옥희는 제안하고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과학자-어머니 되기

한국아동청소년 SF문학에 나타난 모성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김젬마는 포스트휴먼 시대 속 아동청소년 SF문학에 나타나는 모성 이데올로기를 면밀히 살펴본다. 포스트 휴먼 시대 속 여성의 재생산능력은 과학·기술 영역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기술의 진보는 여성해방의 열쇠로 인식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이 오히려 여성의 모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협력함으로써 재생산기술이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오히려 강화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재생산과정에 투여되는 첨단 생명공학 기술은 여성 신체의 전일성(全一性)을 파괴하고, 재생산능력을 갖는 세포들과 그렇지 못한 세포들을 구별하는 새로운 이분법에 의해 모성 자체를 파편화한다. 이는 또 다른 방식의 차이를 생산할 뿐 아니라 모성에 대한 개념 또한 변형시킨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모성 개념은 해체되어야 하는가, 재규정되어야 하는가? 포스트휴먼 시대의 여성은 생명공학 혹은 유전공학 등의 기술에 힘입어 자신의 신체와 재생산능력을 분리시켜 전통적 여성 능력으로 간주되었던 재생산 영역에서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모성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은 한국아동청소년 SF 문학 중에서 자신의 직업적 윤리의식과 모성 사이에서 가치 충돌하는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 과학자들을 살펴본다. 이들은 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 과학자이자 피조물을 창조하는 창조주로 묘사된다. 이들의 창조적 경험이 여성으로서, 과학자로서, 어머니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는 것은 포스트휴먼의 조건, 가능성, 곤경 등을 복합적으로 읽어내려는 일련의 시도로써 의미를 지닌다. 이들에게 처한 여성의 실존 문제와 모성 기능의 강화 여부, 과학적 책임 및 윤리 문제 등을 짚어봄으로써 포스트휴먼 시대의 과학자-어머니 되기가 모성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글에서는 열세 번째 아이(이은용, 문학도엔, 2012), 복제인간 윤봉구(임은하, 비룡소, 2017), 아빠를 주문했다(서진, 창비, 2018)를 중심으로 과학자 여성, 그리고 이들 창조주와 피조물인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모성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조망해보고자 한다.

 

  『복제인간 윤봉구는 생명 창조의 욕망을 품은 과학자 윤인주가 미국의 줄기세포 연구실에서 자신의 아들을 복제인간으로 탄생시킨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윤인주는 자신의 피조물을 마주하자마자 과학자로서의 성취와 욕망을 뒤로하고, ‘내가 만든 이 아이를 지켜내겠다고 다짐하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남성 과학자들의 창조 행위를 여성적인 창조 능력의 결핍을 대체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궁선망으로 본다면, 윤인주는 신체적 재생산능력과 과학기술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여성 과학자혹은 포스트모던 엄마 기계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지닌다. 자신의 피조물인 복제인간의 정체성과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창조주인 과학자의 권리가 포기되거나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필연의 논리가 뒤따르는데, 윤인주에게는 어머니 혹은 여성의 이름으로 수행해야 하는 모성의 당위성이 부여된다. 즉 복제인간인 봉구의 존재가 긍정되기 위해 과학자인 윤인주의 존재는 은닉되고 부정되어야 하며 과학의 영역에서 이탈한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모성인 셈이다.

 

  『아빠를 주문했다는 로봇 연구원인 엄마 박수정의 아들 철민이 인터넷으로 아빠를 주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박수정은 아픈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온 싱글맘으로 아픈 아이인 철민을 외부와 단절시켰지만 이는 철민에게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과 갈망을 환기시킬 뿐이었다. 철민은 충동적으로 인터넷에서 아빠를 구매하게 된다. 한편, 아빠 로봇 사호는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 연구원이었던 박수정에게 정보를 얻고자 엄마로서의 취약점인 모성을 이용해 비밀 금고를 열게 만든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오히려 철민이 인간이 아닌 소년 23였다는 증거가 들어있었다. 엄마에 의해 봉인되어 있던 철민의 출생의 비밀은 아빠의 존재로 말미암아 세상 밖에 나오게 된다. 이후 철민은 아무 일 없는 듯 보통 아이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철민의 정체성 문제는 박수정이 초래한 결과이며 이에 대한 창조주의 변명 혹은 설명이 필요한데 작품에서 이를 소거함으로써 다시 박수정을 과학자가 아닌 어머니의 자리로 고정시킨다.

 

ⓒ창비

 

  『열세 번째 아이는 완벽한 사회가 빚어낸 맞춤형 인간과 감정 로봇의 존재를 통해 인간과 로봇의 존엄성을 재고하게 하는 작품이다. ‘시우는 유전자 조합으로 만들어진 열세 번째 아이며, 이 프로젝트의 설계자인 시우의 엄마는 기계든 사람이든 뭐든 완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며 모든 것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엄마의 컴퓨터에서 장시우 프로젝트 폴더를 본 시우는 자신이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재조합되는 과정을 거친 파편화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완벽에 가까운 인간으로 만들어진 시우는 자신이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한 존재임을 인식한다. 억압되어 있던 감정의 변화들을 겪으며 시우는 결국 장래 보류 판정을 받아 선택된 삶에서 이탈한다. 이는 언제나 계획대로 실행해온 엄마의 삶에 변수를 발생시킨다.

 

  이상의 작품들에서 살펴본 포스트휴먼 시대의 과학-어머니되기는 과학자의 창조 행위에 대한 대가를 모성을 통해 구원받거나(복제인간 윤봉구), 피조물의 출생의 비밀을 은닉하기 위해 모성이 강화되거나(아빠를 주문했다), 피조물을 통제하려는 수단으로써 모성이 활용되는(열세 번째 아이)양상을 통해 모성 이데올로기가 드러난다. ‘여성 과학자또는 포스트모던 엄마 기계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은 자신의 피조물을 생산 및 설계하지만 결국 이들은 과학자에서 어머니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고정된 영역에 위치 지어진다. 결론적으로 김젬마는 한국아동청소년 SF 문학에서 여성, 어머니, 과학자로서의 삶과 주체성, 행위 등이 모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자율성과 가능성이 배제되는 양상을 재현하기보다, 긍정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지점들을 통해 다양한 전망을 모색하길 바란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를 둘러싼 상징 투쟁 - 2000년대 이후 영화에 나타난 아이 돌봄

  마지막으로 송효정은 2000년 이후 한국 영화에 나타난 가족 형태와 아이 돌봄 문제를 살펴본다. 포스트 IMF, 신자유주의, 인지자본주의를 경유하면서 한국 영화에는 가족과 돌봄을 둘러싼 불안과 갈등이 반영되어 왔다. 결혼 제도로 결속된 이성애적 남녀와 자식으로 구성된 핵가족이 가족의 전범이 되었으며, 경제적 불안과 도덕적 위기가 가족의 갈등을 증폭하거나 봉합하는 서사의 요소가 되어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세대는 부모 세대의 부계적 가족주의가 만들어낸 남성 생계부양자의 역할이 해체되어가는 와중에 도래한 신자유주의적 체제 속에서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2000년대 이후 아이 돌봄의 문제를 중심 파악한 한국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신핵가족주의라 할 만한 가족주의의 쇠퇴다. 즉 아이 돌봄의 문제가 가족의 문제이기보다 모성 혹은 부성이 개별적으로 감당해야 할 개인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2000년대 한국영화에서 아이가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관심을 둔다. 이를 위해 영화 속 아동의 정체성이나 표상 방식보다 아이가 그 부모 세대에게 어떠한 대리물로 기능하는가에 주목한다. 특히 이러한 시대적 양상 아래 양육기 아이가 있는 핵가족 내지 한부모가족의 육아를 소재로 한 영화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돌봄, 양육을 다루는 영화들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 사회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에 가장 작은 단위의 가족이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갈등을 겪는가를 살피고, 더 이상 사회문화적 담론으로 해석이 불가능할 경우 논리 너머의 세계로 초월하는 양상을 따라갈 것이다.

 

  90년대 영화인 <해피엔드>최보라가 나쁜 엄마로 응징당한 이후, 한국 영화계에서 엄마의 자리는 점차 사라져갔다. 헤게모니를 잃은 가부장 서민기최보라를 응징하고 스스로 모성의 정체성을 전유한다. 엄마는 없다. 엄마는 일로 바빠서 아이를 돌볼 틈이 없거나(<미씽>), 계층의 재생산을 위해 양육의 임무를 방기한다(<하녀>). 그 자리를 대체해 아이 돌보미라는 하층민, 이주민 여성이 등장해서 양육 노동을 대리한다. 그런 점에서 <복수는 나의 것> 이후 부성 양육을 강조한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아내의 부재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일로 바쁜 아버지들은 어째서 경제권도, 양육권도 독점하고 있거나(<복수는 나의 것>, <부산행>) 독점하려 하는 것(<미씽>)일까. 돌봄을 수행하는 자들인 육체노동자나 하층민들은 어째서 자신의 모든 정념과 육체까지를 헌신하고도 돌봄의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인가.

 

▲영화 <곡성> ⓒ네이버 영화

 

  주목할 점은 이러한 영화들에서 자녀의 성별이 공통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점이다. 홀로 남은 남성에게 딸은 사라지는 아내를 대리하는 가치가 된다. 딸은 보호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되찾는 일이자, 여성에게서 나쁜 아내의 이미지를 거세한 채 순수한 취약함만을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반영이다. 이들이 필사적으로 딸을 돌본다(혹은 딸은 위해 복수한다)는 것은 자신이 과거 저지른 도덕적 과오에 대한 대가이며 희생을 치르고 아버지는 좋은 아빠라는 딸의 동반자가 될 수 있게 된다.

 

  2010년대 이후 아버지-딸의 결합은 한국 상업영화의 상당한 흥행코드로 자리 잡게 되는데, 생물학적 어머니는 그 과정에서 몰각된다. 노동자의 육체보다 인간의 지식, 감정, 소통, 정보를 자본 축적의 동력으로 삼는 인지자본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부산행><곡성>에 이르면 아이 돌봄의 영화는 사실적 드라마보다 판타지나 오컬트로 전향된다. 이 영화들의 세계는 여성의 생물학적 고통, 임신과 출산의 아브젝시옹(Abjection)이 거세된, 물리적 폭력과 좀비의 부분-신체들로 점철된 세계로, 아버지들은 선도 악도 사실도 허구도 과학도 주술도 구분하기 어려운 세계에서 딸의 구원이라는 불가능한 소명에 매달리게 된다라고 송효정은 주장하고 있다.

 

■황지원 기자 : h950301@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