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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평화를 향한 통일의 여정: 이론, 실천, 그리고 전망 본문
“평화를 향한 통일의 여정: 이론, 실천, 그리고 전망”
지난달 24일과 25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튀빙겐대학교 한국학연구소(Tübingen Center for Korean Studies), 그리고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주최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한반도와 독일의 사례를 총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통일문제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논구하는 것이 이번 학술회의의 취지였다. 제1세션에서는 ‘평화를 위한 통일, 통일을 위한 평화’라는 주제로 4개의 발표가 진행되었다. 이어서 제2세션에서는 통일 교육의 현황과 방향을, 제3세션은 남북한과 독일의 교류와 협력을 논의하는 발표가 진행되었다. 마지막 제4세션에서는 ‘남북한과 독일의 주민, 사회문화 통합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이에 본지에서는 주목할 만한 발표문 세 편을 뽑아 소개하고자 한다.
한반도 탈냉전과 평화통일의 경로: 남북 민중의 참여 확대와 ‘삶의 공동체’ 형성
냉전과 탈냉전을 겪으면서 남북한의 민중은 한반도 내부의 상처를 극복하고, 동아시아의 군사·경제·안보 문제를 고민하며, 기후·에너지 등 오늘날 당면한 새로운 국제적 과제에 따라 평화통일을 이루는 능동적인 주체로서 주목된다. 이에 허은은 한반도에서 탈냉전을 경험하면서 냉전·분단체제의 기반이 되었던 공동체가 해체되고, 평화통일의 기반으로 민중이 참여 주체가 되어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전쟁의 비극과 강력한 반공주의로 물들었던 1950년대였지만, 당시 국민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남북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인식은 남아있었다. 민중이 자신의 ‘삶의 공동체’를 위한 풀뿌리 정치를 벌일 여지는 ‘4월 혁명’을 통해 분출되는 듯했지만, 이어진 5·16군사쿠데타와 지방자치제의 폐지는 이러한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군정기에는 국민통합의 수단으로서 도시와 농촌, 군과 민간을 연결하는 자매결연운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는 1950~1960년대 초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남베트남에서 벌인 한국군의 대민사업과 연계되면서, 진영의 구도 안에서 분단국가를 유지하는 목표를 공유하는 차원에서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정이 끝나고 자매결연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일면서 이는 위축되었고, 베트남전 참전과 한일협정 체결, 경제개발계획의 본격적인 추진 등으로 인해 점차 전시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전선국가’로서 한국의 성격이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자치에 대한 중앙통제가 강화되면서 남북관계를 경제·문화의 공동체로 바라보는 인식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민중의 관심사에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1960년대와는 달리,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민중을 정부의 ‘승공통일’ 노선에 결합시키고자 했다. 박정희는 ‘8·15 선언’을 통해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체제경쟁을 통해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해결해가고자 하는 구상을 밝혔지만, 통일을 명분으로 한 유신체제가 수립되면서 민중의 정치적 참여는 제도적으로 배제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남북대화를 진행하면서도 북한의 인민혁명전략 노선을 경계했고 이에 따라 민중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겼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범국민 대공조직’을 수립하면서 민중의 일상은 마을 주민의 상호 감시와 경찰의 외부감시라는 중층적인 감시체계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러나 국제적 데탕트(détente) 기류에 따라 통일문제가 진영의 사안이 아닌 국내문제로 전환되면서 민중과 통일문제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었다. 이에 ‘범국민 통일조직’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자율적인 국민조직이라기보다 “정부지도 아래 국민총력을 기울인 국민단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여러 사회단체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통일 홍보요원을 양성하는 ‘통일꾼 운동’ 역시 신군부에 의해 확실하게 제도권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결국 1970년대 통일문제에서 민중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기 시각했지만, 평화통일을 이루어낼 주체가 아닌 그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1980년대 전반기를 거치면서 분단국가체제를 뒷받침한 냉전 논리에서 벗어나고 ‘6월항쟁’에 따라 민간의 참여 요구가 분출되면서, 점차 북한보다는 국내 정치모순과 빈부격차 등 사회 내부의 문제가 더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통일문제에서도 ‘통일정책의 민주화’가 요구되었는데, 민간협의체를 통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아 국회에서 결의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인식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에는 종교계, 학계, 학생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범국민 차원의 평화통일운동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표출되었고, 이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와 여당은 민간의 통일운동 추진을 ‘창구단일화’라는 논리로 정부 주도하에 통제하고자 했다. 이에 민주화운동세력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 등 자율적인 남북교류를 시도하면서 남북 민중과 해외 한인의 다양한 이해가 반영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전 시기보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민간 영역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음을 시사하지만, 민중의 삶의 영역과 구체적인 접점을 형성해가기보다 국내외 통일기구 조직에 중점을 두었다는 한계가 있다.
1991년 12월, 남북은 ‘남북 사이에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였지만, 9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북핵 문제를 비롯한 안보위기 고조와 남북 경색 국면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과는 달리 민간 영역에서는 1995년 지방자치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에 결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방자치단체가 남북 교류협력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면서 다양한 교류협력 사업이 시행되었는데, 특히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등 광역지방자치단체는 남북 교류협력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상호 신뢰를 쌓았고, 일방적인 지원이 아닌 상호 호혜적인 사업으로 추진했기에 실험적인 수준에서나마 자율성을 갖는 단계까지 남북교류협력을 진전시켰다.
이처럼 한반도에서의 탈냉전은 역사와 현재에 근거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삶의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전개되어왔다. 따라서 민중이 주체적으로 삶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은 한반도의 평화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이 될 것이다.
독일통일 이후 역사 수업 및 역사의식의 변화와 지속
교육제도는 통합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전문 지식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통해 형성된 도덕적, 정치적 견해를 전하며 집단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기도 한다. 특히 역사 수업은, 독일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국경 너머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상상력을 제공하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에 팔크 핑엘(Falk Pingel)은 통일 전후 동서독을 중심으로, 통일 이후 역사의식이 변화하고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역사 교육의 역할을 살펴본다.
통일 이전 동서독에서는 기본적으로 상이한 원칙에 따라 역사 수업을 진행하였다. 동독에서는 계급투쟁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인이라는 역사적 유물론에 근거하여 교육과정을 수립하고 역사를 서술했다. 이에 따라 서독 공화국은 반동적이고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인 반대 모델로 설정되었다. 한편 서독에서는 점차 사회자유주의 원칙에 근거하는 구상을 표방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동서독에서는 통일을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로 간주한 역사교육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일던 사회 변혁의 바람에 따라 서독 사회는 ‘객관성’을 지향하는 ‘체제 비교’를 부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제 동독은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체제를 비교하는 방향으로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서독에서는 역사와 정치 수업에서 동독의 국내 조건과 주민들의 삶에 대한 현실적인 지식을 중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접근을 통한 변화’의 원칙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한국의 사례와 달리 독일에서는 ‘국민’이 통일에 대한 희망을 표출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통일계획이 수립되었고 그전까지는 동서독 어디에도 ‘통일교육’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서독 국경이 개방되기 직전, 동독에서는 기존 교육제도의 핵심이었던 ‘군사학 수업’과 ‘국민 윤리학’이 교과과정에서 배제되면서 교육제도를 개편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러나 동독에서는 역사책이 국영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 탓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파격적인 가격 할인이나 서독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서독의 출판사들과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 하반기까지는 서독의 역사책 저자들이 독일 전역에 걸쳐 역사 서술을 독점했고, 이들이 표방하던 가치들은 구동독 주들에서 개혁을 위한 본보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초기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던 서독 중심의 역사 교과서는, 이를 활용하여 수업을 진행해야 했던 동독 교사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점차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동독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노예소유제도와 스파르타쿠스 노예폭동 등의 주제들을 누락하거나 부수적으로 서술하는 등 내용상의 문제도 지적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1990년대 초반부터는 통일 독일의 현실에 맞게 교과서를 개편하고자 했다. 시대사 관련 서적들은 통일 전 동서독 역사를 병렬적으로 기술했으며, 점차 동독에 관한 서술은 전체주의적 감시국가의 면모에서 동독 붕괴의 다층적인 국내외 요인을 살펴보는 방향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이 이어지면서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새로운 구상을 토대로 한 역사책들이 출판되었다. 점차 독일의 역사교육은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라, 통일이 낳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1989~1990년의 격변기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통일 전 공교육에서 제시되었던 상이한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독일의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동독의 정체성이 강한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통일이나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종종 목격되기도 한다. 발표자는 이를 ‘실패한’ 역사를 지닌 동독 지역 청소년들의 시대사적인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역사와 현재의 단절을 경험한 적이 없는 서독인들과 비교했을 때, 동독 지역 청소년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현대와 구별되는 직접적인 과거이자 자신들의 유래에 대한 역사에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동독과 서독의 차이가 점차 희미해가는 상황에서 이는 역사 수업이 현대사 맥락에서 충분히 다루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본 분단과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통일의 방향과 가치가 새롭게 고안되어야 할 현실에서, 디아스포라는 분단체제의 막대한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경계인’으로서 통일운동에서 중요한 잠재성을 지닌다. 이에 최현덕은 남과 북의 주민, 전 세계로 흩어져 사는 ‘코리언 디아스포라’, 그리고 재한 이주민 디아스포라가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통해 통일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코리언 디아스포라는 수탈과 강제이주라는 식민지의 역사와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잔류하게 된 냉전·분단체제의 파급력을 보여주는 집단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발표자는 먼저 재일 조선인의 난민화에 주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혹은 반강제로 이주했던 재일 조선인 중 일부는 해방 이후 경제적 기반 문제나 혼란한 정치 상황 등을 이유로 귀국하지 못해 일본 국적자이면서 외국인이라는 모호한 상태로 방치되었다. 이어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의 구 식민지였던 나라의 국민들은 모두 일본 국적을 박탈당한 채로 남아있었다. 남북한이 해방 직후 일본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기에 재일 디아스포라는 모두 무국적자, 즉 난민이 되어 국민으로서의 기본 권리마저 상실하였다. 1965년에 한일협정을 체결한 남한과 달리 북한은 여전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지 않은 상태이며, 디아스포라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한편, 1967년 7월의 ‘동베를린 사건’ 역시 디아스포라가 한반도의 역사를 투영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당시 박정희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프랑스, 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영국 등 5개국에서 거주하거나 유학하고 귀국한 명망 있는 지식인, 예술인 등 한국인 30명을 한국으로 강제연행하였다. 단순 대북 접촉 및 동조행위를 보였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과 형법상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고자 했던 이 사건은 한반도 분단정치가 디아스포라에게도 적용된 사례로서 주목된다. 민주국가로서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에서 훨씬 더 느슨한 동서의 경계를 경험했던 이들이 귀국하여 한국사회의 이면에 의문을 제공하고 새로운 활동 공간을 형성하면서 주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정부로 하여 해외로 이주한 한인사회에까지 안보 의식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였다.
냉전·분단을 경험하면서 부상한 ‘경계인’의 개념은, 북한 혹은 남한의 양자택일 논리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들은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라, 양측의 관점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메타적 위치에 서 있으면서 ‘번역’을 함으로써 다른 존재들을 소통하게 하고 매개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디아스포라는 분단 극복을 위해서도 고유한 역할을 해왔다. 일례로 1970~1980년대 재독 동포사회는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 ‘조국통일해외 기독자회(기통회)’ 등의 조직을 통해 독자적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또 1980년대에는 해외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되었고, 1990년대 이래로 남북과 해외 학자들이 역사와 정치 등 분야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직접 학술교류를 진행하면서 일종의 통역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경계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이처럼 분단체제는 디아스포라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디아스포라 역시 분단과 통일의 당사자일뿐 아니라 ‘경계 위의 존재’라는 특성이 주는 잠재력을 지닌다. 이에 따라 분단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통일을 향한 고유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로서 주목된다.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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