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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오래되고, 지혜롭고, 큰 존재를 잃기 전에. 본문

8면/과학칼럼

오래되고, 지혜롭고, 큰 존재를 잃기 전에.

Jen25 2024. 12. 28. 11:42

오래되고, 지혜롭고, 큰 존재를 잃기 전에.

심혜린(과학칼럼니스트)

 

누구나 나이가 든다.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인간 동물과 식물은 물론이고 효모와 같은 세포 수준의 생명체까지 모두가 노화를 겪는다. 그래서일까, 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노화에 관해 탐구해왔다. 그러나 ‘노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긍정적인 감상보다는 신체의 구조적·기능적 쇠퇴나 죽음 등 부정적인 감상을 떠올리기 쉽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노화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자동 완성되는 ‘노화 방지’라는 키워드, 노화란 ‘나이를 먹으면서 정신적, 신체적 기능이 약화되는 현상’이라는 사전 검색 결과, 안티에이징에 대한 무수히 많은 광고와 기사 사이에서 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노화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사이언스』 지에 실린 한 리뷰 논문에서 저자들은 기존 연구 문헌 대다수가 노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조명하는 연구이며, 많은 연구에서 ‘노화(aging)’가 ‘노쇠(senescence)’와 혼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처럼 죽음과 생물학적인 쇠퇴에 집중하는 기존의 많은 연구물을 연구진은 ‘노쇠 중심 패러다임(senescence-focused paradigm)’이라 칭한다. 이러한 기존 패러다임은 생식적 또는 개체통계학적 측면에서 나이든 생명체의 가치가 낮다는 잘못된 인식에 일조했다. 

연구진은 리뷰 논문을 통해 나이 든 야생 동물이 개체군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과 더불어 이들의 손실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했다. 해당 논문에서 언급한 바에 의하면, 야생 개체군에서는 노화가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이전까지 야생에서 나이 든 동물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야생 동물 집단 속의 개체는 고령까지 살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날씨를 포함한 환경적 조건, 포식자 등의 이유로 야생 동물은 노화가 일어나기 전에 사망하며, 따라서 자연 속의 동물은 노화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최소 1950년대부터 등장했다. 196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피터 메더워(Peter Medawar)는 1952년 『생물학의 미해결 문제(An unsolved problem of biology)』를 통해 동물의 노화는 야생에서 거의 도달하지 못하는 나이까지 살아남는 조건을 만족할 때, 즉 대다수의 개체가 도달하지 못하는 나이에서 나타날 것이라 언급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실제로는 야생 동물에서도 노화를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확인되었다. 특히 2000년대에 접어들어 장기간의 개체 기반 연구가 다수 진행되며 조류, 포유류, 파충류, 곤충 등 여러 동물군에서 연령에 따른 생존, 번식, 생리적 기능 저하, 즉 노화 현상이 확실하게 관찰되었다.

수명이 긴 동물은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 모두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척추동물인 그린란드 상어는 적어도 392년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무척추동물인 해면동물의 경우 수명이 하루보다도 짧은 종부터 10,000년에 달하는 종까지 다양하다. 수명이 긴 편인 생물은 몸집이 크고, 성장 속도가 느리며, 성적 발달이 늦고, 성체의 자연 사망률이 낮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고 수명이 짧은 생물종이 대부분 유리한 환경에서 번식이 증가하는 기회주의적 생존 전략(r-선택종)을 택하는 데 비해 수명이 긴 생물종은 적은 자손에게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상대적 평형을 이루는 생존 전략(k-선택종)을 택하거나, 자손·번식체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최소한의 보살핌만을 제공하는 주기적인 생존 전략을 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형 전략을 취하는 생물의 예시로는 새, 포유류, 일부 상어 등이 있으며 주기 전략을 취하는 생물의 예시로는 참치, 바다거북, 거대 조개 등이 있다. 

그렇다면 생태학적으로 나이 든 동물의 존재는 어떤 장점이 있을까? 연구진은 ‘노령 동물의 생태학적 및 보존적 중요성은 노령 나무의 중요성과 유사하다’라고 말한다. 수명이 짧은 동물 대비 수명이 긴 동물은 더 안정적인 개체군을 형성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고령 동물 저장 효과(old animal storage effect)라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연구진은 ▲생식 및 생장 ▲행동, 지식, 문화, 사회성 ▲생태계의 구조 및 기능 ▲전 지구적 환경 변화에 대한 저항 및 회복성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나이 많은 개체의 기여를 분석했다. 장수하는 동물종은 성체 중에서도 중년에서 노년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현존 생물량(standing biomass)이 크며, 이들은 불리하거나 변동적인 환경 조건에 대항하는 버퍼 역할을 한다. 특히 인간, 비인간 영장류, 고래, 무리 지어 사는 육식동물 등 평형 전략을 취하는 동물에서 고령 개체는 지식과 경험의 저장소 역할을 한다. 이러한 개체군에서 나이 든 개체는 정보 전달을 포함해 어린 개체를 보살피고, 문화 및 사회 구조를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 든 개체가 개체군의 전체적인 생존력에 미치는 영향 중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분야가 바로 생식 및 어린 개체의 생존이다. 대부분의 야생동물에서 노령에 따른 생식 감소가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척추동물과 일부 무척추동물에서 나이가 많고 크기가 큰 개체가 자손의 생산, 품질, 생존율에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포유류에서는 나이 많은 개체가 혈연으로 이어진 자손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 어린 개체를 돌보고 지원해 미성숙 개체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일조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변온동물이나 새의 경우 포유류와 달리 매우 고령까지도 나이에 따른 번식량이 늘어나는 현상이 발견되기도 한다. 나이가 많고 크기가 큰 암컷이 더 큰 자손이나 더 성장률·생존율이 높은 자손을 생산한다는 보고도 다수 존재하나, 연구진은 이 현상이 개체군 및 생활사에서 가지는 중요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행동, 지식, 문화, 사회성 측면에서 고령 개체는 지식, 경험, 사회적 학습 등을 축적해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관련한 대다수의 연구는 포유류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나, 물고기, 새, 파충류 등 다양한 분류군에서도 나이 든 개체가 먹이, 포식자, 이동, 산란 위치 및 시기에 대한 지식을 저장하고 정보를 전달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나이 든 개체가 종종 집단 내 공격성을 조절하고 사회를 안정화한다는 경험적인 관찰 결과가 일부 문헌을 통해 보고된 바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남획 등으로 인한 고령 개체의 감소는 사회적 학습 및 문화적 전수를 단절시킴으로써 개체군의 생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고령 개체의 손실은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수명이 긴 주기적 · 평형 전략 생물은 먹이 사슬의 위쪽에, 수명이 짧고 크기가 작은 기회주의 전략 생물은 먹이 사슬의 아래쪽에 존재한다. 따라서 장수하는 개체의 감소는 초식동물이나 중간포식자를 피식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켜, 결과적으로 생태계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연구진은 종 내 개체의 연령 및 크기의 변동이 먹이 사슬, 영양 단계, 생태계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최근 보고된 바에 의하면 해양, 삼림, 담수 등 전반적인 생태계에서 상대적으로 크고 고령인 개체의 수와 생물량이 감소하고 있다. 개체의 장수는 육상 및 수생 종에서 해당 개체군의 안정성을 예측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다. 장수하는 생물종에서 나이 든 개체는 일시적인 환경 변화로부터 개체군을 지키는 완충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장수하는 생물종은 환경적 변화에 적합하게 대응하기 위해 높은 성체 생존율과 긴 기대 수명에 의존하는 전략을 세웠기에, 이러한 생물종에서 고령 개체의 손실이 개체군 감소와 불안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한다. 이에 대해 연구진은 오래되고, 크고, 경험이 많은 개체를 보존하기 위한 동물 관리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존하는 관리 기준 중 다수는 풍부도(abundance)나 생물량을 바탕으로 산정되어 있어, 실질적으로 개체군 내 고령 계층이 줄어들고 연령 구조가 변화하였음에도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각 개체군의 안정적인 연령 구조가 미치는 영향이 지속해서 보고되는 만큼, 산림·농·어업 종사자와 정책 결정자 모두 장수 개체 보존 문제에 대한 인지 및 관련 논의를 이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림 설명

정상 생태계의 영양 피라미드와 고령 개체가 감소한 생태계의 영양 피라미드 (10.1126/science.ado2705)

 

출처

  • R. Keller Kopf et al., Science 0, eado2705 DOI:10.1126/science.ado2705
  • D. H. Nussey, H. Froy, J. F. Lemaitre, J. M. Gaillard, S. N. Austad, Ageing Res. Rev. 12, 2013, 214–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