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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집은 어디인가 본문
돌아갈 집은 어디인가
서울괴담 <힘든 귀가>(공동창작, 각색·구성·연출 유영봉)
김소연 연극평론가
객석을 양편에 두고 런웨이처럼 사각의 무대가 길게 놓여있다. 무대 양 끝은 벽으로 높게 올라가고 다시 천장으로 이어진다. 양면을 오려낸 거대한 상자가 극장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것 같다. 텅 빈 무대를 향한 시선을 끝으로 돌리면 벽으로 이어지는 모서리에 긴 소파며 상자들이, 어느 좁은 골목길 담벼락에 바짝 붙여 내놓은 단출하고 낡은 세간처럼 놓여있다. 눈부시게 흰 무대와 추레한 사물들. 이 무대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무대 한편 바닥이 열리며 청년이 불쑥 등장한다. 군복 같은 상의에 흰 분칠을 한 청년은 상반신만을 내놓고 객석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망설임인지, 뚝뚝 끊기는 두서없는 이야기다.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가득 담겨있는 투명한 병을 안고 있는 청년은 구멍을 빠져나오려고 애쓰지만 빠져나오질 못한다. 그러다가 불쑥 무대에 올라서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급작스레 구멍으로 사라진다. 여기는 어디고, 청년은 누구인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청년의 기괴한 등장을 밀어내는 듯 무대에는 소음과 옛 가요가 뒤섞이고 추레한 행색의 남자와 청소부 그리고 큰 가방을 끌고 오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청소부도, 추레한 남자도 청년처럼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가방을 끌고 있는 여자, 마찬가지로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가방에 몸을 얹은 채 느리게 움직이는 이도 있다. 머리 한가운데에 작은 얼굴 가면이 또렷해 마치 몸통 없는 기이한 존재 같다. 흰 분칠에 빨간 코를 한 추레한 남자는 바닥에 앉아 소주병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역시 두서없다. 그는 주물공장 기술 좋은 노동자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었다. 아내와 한 아이를 살렸다고 하는데, 지금 그의 곁에 가족은 없다. 그가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 짐작이 간다.
연극을 여는 청년의 등장처럼 연극의 장면들은 익숙하고 낯설다. 추레한 행색의 노숙남 이야기는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이들의 익숙하다면 익숙한 사연이다. 불쑥 등장한 청년의 이야기도 그렇다. 아마도 그는 애인과 헤어진 것 같다. 두 인물은 놀이인지 싸움인지 무대 바닥을 구르다가 청년이 안고 있던 병이 열리면서 빛나던 작은 것들이 바닥에 쏟아진다. 무대 바닥에 작은 별들이 떠 있는 것 같다. 그때 배우들이 등장해 쪼그려 앉아 흩어진 별들을 주워먹고 있으면 청소부가 별들을 쓸어내며 배우들을 향해 비둘기들이라고 말한다. 익숙한 인물, 익숙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뚜렷한 상황설정이나 맥락 없이 등장하고 물러나며 이어지고 언뜻언뜻 기이한 장면들이 끼어든다. 선명하게 차오르는 역내 방송과 기차의 굉음이 역 광장을 떠올리게 하지만 기괴한 모습의 행인들이 섞여 있고 어떠한 변형도 없이 작은 물건을 줍고 있는 배우들이 비둘기가 된다. 인물들은 흰 분칠을 하고 등장하는데 누군가는 죽은 자이고 또 누군가는 산자이다. 죽은 자와 산자가 말을 나누는가 하면 또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다.
기이함은 흰 분칠, 늘어뜨린 머리, 가면 때문이 아니다. 연극에는 노숙남이 넋두리처럼 전하는 사고만이 아니라 자살, 방화, 린치 등등 끔찍한 사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끔찍한 사건들은 실없는 농담처럼, 애틋한 애가처럼 전해진다. 갑자기 굉음 같은 록음악이 무대를 채우는가 하면 방화 사건을 진술하는 장면에서는 배경음악이 라이브로 연주된다. 돌이킬 수 없는 파괴의 사건을 전하는 말과 표현은 과장된 놀이처럼 전개되는데 과장된 놀이는 어느 순간 슬픔이 되어 차오른다.
슬픔은 어떤 한 인물, 어떤 한 사연 때문은 아니다. 청년, 노숙남, 불지른 여자처럼 사연이 있기도 하고 청소부나 점술사처럼 거리의 풍경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문득 마주치고 스쳐 지나기도 한다. 광장의 풍경처럼 등장하는 비둘기도 있다. 싸움인지 놀이인지 노숙남과 청년이 엉켜붙어 바닥을 구르다가 노숙남은 청년에게 “너 죽었잖아”라고 말하고, 청년의 병에서 쏟아진 별을 먹던 한 비둘기는 죽는다. 청소부는 쓰러진 비둘기를 치운다. 과장된 놀이는 미처 우리가 돌아보지 못한, 돌아보지 않은 죽음을, 슬픔을 마주하게 한다. 마치 조각조각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 같지만, 연극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청년과 폐지 줍는 할머니가 이 슬픔들을 보듬는다. 연극의 장면 사이사이 등장하는 허리가 굽은 폐지 줍는 할머니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연극을 여는 청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청년의 엄마는 아들의 죽음을 모른다. 두 인물의 상황이 겹쳐질 뿐 연극은 덧붙이지 않는다.
<힘든 귀가>에는 집이 등장하지 않는다. 길에서 살고 있거나, 무작정 기차를 타고 떠나거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또는 길의 한켠에 앉아 가쁜 숨을 고른다. 그럼에도 이 연극의 제목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이유는 이 길 위의 삶들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연극은 끝내 집에 도착하지 못한 채 길에서 마무리된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광장에 우뚝 선 청년의 금빛 동상이고 폐지 줍는 할머니는 아들이 있는 곳이 집이라며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다.
서울괴담은 극단의 이름처럼 기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왔다. 탈춤에 등장하는 사자처럼 털이 북실북실한 몸에 사자 가면이 아닌 사람의 얼굴 가면을 하고 서울 도심을 능청능청 걸어다니고, 도심 골목길에 샴쌍둥이 할머니가 앉아 이야기를 전하는가 하면, 재개발로 철거되는 집을 지키고 있는 노인은 알 수 없는 존재와 함께 철거반원들을 따돌리는 숨박꼭질을 한다. 연극은 어떤 뚜렷한 사건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데 이들의 기이한 이야기들에는 낯설지 않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떠돈다. 이들이 말하는 ‘괴담’은 말뜻처럼 괴상하고 이상야릇하고 때로는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그 낯설음과 공포는 지독히 익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힘든 귀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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