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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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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면/강사 칼럼

가정의 달, 가장 가까운 폭력을 멈추자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5. 6. 16:20

가정의 달, 가장 가까운 폭력을 멈추자

 

어느 시간강사

 

  연구자에게 봄과 가을은 참 바쁜 시기이다. 봄에는 개인 연구, 연구소, 학과, 단과대학의 프로젝트 계획서를 공모하고, 가을에는 그 결과물을 제출하느라 정신이 없다. 봄의 공모 과정은 연구의 이름을 띠었지만 행정업무일 때가 많다. 두 달간 각종 계획서 작성, 공모, 기관 계약에 치이다 보니 4월이 끝났다. 캠퍼스에서 중간고사에 지친 학생들 얼굴을 보며, “너도 힘드냐, 나도 힘들다 속으로 외치다 보니 5월이 성큼 다가왔다.

  바쁜 일정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지친 마음은 주변에 날선 말로 흩어진다. 학생들이 팀플을 하다 싸우듯 연구자들도 협업을 하다 삐걱대는 일이 꽤 있다. 강한 위계와 어른스러운 척 때문에 터지지 않을 뿐이다. 공모를 잘(?) 마치고 한시름 놓으며 각종 프로젝트 단톡방을 둘러봤다. 냉랭한 분위기가 곳곳에 감지된다. 콕콕 박힌 내상들이 화면 너머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다. 이럴 땐 일대일이 진리다. 농담과 진담을 섞어 통화로 달래고, 개인톡을 나누다보니 담배가 절로 당기는 점심이 되었다. 그제서야 가족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나는 3, 4월에 그들에게 날선 말을 던지진 않았을까?”, “내 바쁨을 핑계로 상처 주는 행동을 하진 않았을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온라인 쇼핑몰부터 공공기관까지 여러 행사가 줄을 잇는다.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캠페인부터 가정폭력 추방 프로그램까지 스펙트럼이 퍽 넓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보고서가 있다. 2014년 작은 파장을 일으킨 <한국의 존속살해와 자식살해 분석> 보고서이다.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살인사건에서 가족 간 사건을 분석했는데, 한국의 가족 살해는 전체 살인사건 중 5%로 미국의 2.5, 영국의 5배에 달했다. 보고서 작성자인 정성국 박사는 이후에도 여러 매체에서 높은 가족 살해 비율을 한국적 특수성이라 말했다.

  다시 검찰 범죄 통계를 찾아본다. 2019년 발생한 847건의 살인범죄 중에서 부모나 조부모를 살해한 사건은 65건으로 7.7%에 달한다. 통계는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말해주기도 하는데, 그 결과는 더 참혹하다. 타인 관계가 23.4%인 반면 친족 27.1%, 이웃/지인 18%, 애인 7.5%, 친구/직장동료 5.8%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 무려 58.4%에 달한다. 최근 언론에 등장하는 아동학대와 영유아 살해는 익숙한 범죄 형태로 우리 곁에 있었다. 특정 가해자 또는 피해자의 이름으로 마치 없었던 일이 발생한 것처럼 말하지만 가족 또는 친족간 강력범죄는 한국의 오래된 민낯이다. 아직도 빈번히 사용되는 가족집단자살이란 잘못된 용어는 부모의 자녀살해를 은폐하고 있다. 가족처럼 친밀성을 전제로 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살인은 유독 잔인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족 간 친밀성이 붕괴했을 때, 배신당했다고 느낄 때 가해자는 잔혹한 방법으로 옆 사람을 해친다. 우발적 사건이라기보다 켜켜이 쌓이고 징후를 보였던 갈등이 살인사건의 주요 동기로 작동한다.

  나는 곧 발표될 2020년 살인범죄 통계가 상당히 두렵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작년 코로나19가 확산되던 때의 첫 기자회견에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증가할 수 있는 가정폭력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지침을 밝혔다. 영국 런던 경찰은 작년 4, 봉쇄기간 중 4,000여 명의 가정폭력범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유럽에서는 코로나19와 가정폭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사회취약계층은 코로나19의 경제적 충격을 그대로 흡수해야했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족간 대면접촉의 시간을 늘렸다. 유난히 가족살해 비율이 높은, 그리고 가족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냉소가 모두 존재하는 한국에서 가정불화는 코로나19 시대에 더 무서운 얼굴로 나타날지 모른다. 일상의 폭력이 극단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다시 가정의 달, 5월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에서 멈추면 안 된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보통은 가족을 선천적이라 여기면서 등한시하거나 과하게 몰입하곤 한다. 중간이 없다. 가족 사이라서 말 못할 것이 많고, 가족 사이라서 하지 않아야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냥 현재 모습 그대로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모습이 좋든 나쁘든 말이다. 만약 가족이 소중하다면 상호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어떻게 갈등을 풀어야 하는지, 어떤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지, 친밀함을 핑계로 은폐한 폭력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고, 가능한 것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새로운 가족 형태도 논의 해볼 법하다. 영원한 관계나 공간은 없다. 변화를 맞이할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할지 모른다. 제도적 도움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정폭력과 가족 살해는 일상에서 누적된 갈등이 폭발한 비극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시한폭탄을 해체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폭력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