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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설마’ 때문에 망설이고 불안했던 본문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학교에 머무는 사람들끼리 대화하면, 우린 항상 답답함으로 시작해 자기비하로 끝나게 된다. 우리끼리 울화통 터뜨려가며 난리 친다 한들, 안타깝게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시 ‘잘못’이라고 단정 짓긴 아직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생각 역시 어리석구나 하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언제, 어디서부터 난 불안했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부쩍 더 많이 한다. 혹시라도 대학원에 진학해서 꿈을 펼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현실적인 조언 혹은 꼰대의 잔소리 등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의 과거를 되짚어보았다.
강사 칼럼에 기고한 많은 박사들처럼 나 역시 본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입학 때부터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했고 당연히 유학 가겠다는 생각에 학점관리와 영어점수를 만드느라 정신없는 학부 시절을 보냈다. 그 덕분인지 안정적인 영어점수와 수석 졸업의 기록을 남겼으나, 졸업할 때쯤 교환학생 경험으로 생긴 외국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금방 ‘그래도 석사까지는 본교에서 해야 유학 갔다 와도 돌아올 곳이 있다더라.’라는 합리화로 없앨 수 있었다. 나에게 석사과정은 이중전공을 하며 학점 꽉 채워 듣던 학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살짝 거만함이 있었다. 이 거만함으로 석사과정 중 교환학생 준비를 해 기어이 한 학기 미국에 다녀왔는데 그 뒤부터였던 것 같다. 편안하고 안정감 있으면서도 좀 쉽게 갈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게. 굳이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GRE부터 다시 준비하고 SOP를 쓸 생각을 하니 막막하고 귀찮기도 하고 막상 언제 끝날지 모를 여행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또다시 겁부터 났다. 그때 첫 번째 ‘설마’가 시작되었다. ‘설마 본교에서 나를 버리겠어? 넘쳐나는 게 외국 박사인데 내가 여기서 잘하기만 하면 날 버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틀렸다. 여기서 잘하는 것과 외국 대학에서 못 하더라도 끝까지 하는 건 차이가 크다. 물론, 주변에 유학하는 친구들 중에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중도 포기한 친구들도 있지만 지금 지나고 보니, 미국의 이름 모를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친구는 미국에서 교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의 박사과정은 널널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공부 및 연구를 해보겠다는 일념에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는 코스웍 기간을 보냈고, 방학이면 사비 들여가며 워크샵 듣고 말도 안 되는 일들 해가며 이 악물고 버텼다. 결혼 생각도 접어두고 학위만을 위해 달렸지만, 유학하고 있는 선후배들에 비해서는 덜 힘들었나 보다. 난 이제 학회지에 논문을 혼자 쓸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세상은 저명한 외국 학술지 논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때 두 번째 ‘설마’가 등장했다. ‘설마 외국 학술지만 보겠어? 내가 논문 더 많이 쓰면 되겠지.’ 그러나 이 역시 틀렸다. 내가 5년 정도만 더 빨리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국내학술지양으로 승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많은 학교들이 대표실적 3~5건만을 제출하라고 한다.
박사과정 이후 연구교수 이름을 빌미로 한 비정규직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국가사업 지원서 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나 아직도 ‘설마 우리 연구단에서 나를 버리겠어?’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학과에 신임교원이 올 때면 ‘설마 나보다 어리겠어?’라며 속으로 긴장하고 있지만, 이제는 더 버티기 힘들 때가 된 것도 같다. 여러 번의 ‘설마’를 경험하고 설마가 역시가 되는 광경을 목격 및 직면하고도 아직 ‘설마 나를 내팽개치겠어?’, ‘설마 나한테 강의가 없겠어?’하는 불안감을 가지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가 ‘설마’로 시작되는 고민이 들었을 때 유학을 가던가, 좋은 성적으로 전문대학원을 가던가, 임용고시를 봐서 선생님을 했다면 나의 삶은 달라졌을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무조건 대학원은 안 온다고 큰소리치지만,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때면 나는 아마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게 내 그릇이고 내 역량의 크기인 것이다. 다만, ‘설마’로 조바심내고 전전긍긍할 시간에 조금 더 나를 다그치고 몰아붙여서 지금 후회하는 일들을 만들진 않을 것 같다.
결국은 내가 스스로 한 선택이었다. 물론 어떠한 앞날이 있는지 전혀 몰랐고, 이 정도일지 몰랐던 세계가 펼쳐졌지만, 그 과정에서도 내가 선택해서 끝까지 긴 터널을 통과한 것이다. 설마설마하며 망설였던 순간들도 있었고 지금도 설마설마하며 불안해하고 있지만, 결국 난 여기 그대로 있다. 이쯤 되면 ‘설마’하며 사는 삶보다는 나만의 살아남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아직 버리지 못하겠다. ‘설마 내가 안 되겠어…?’ 하는 불안감 가득한 기대를. ‘설마’ 때문에 망설이고 불안했던 지난날들이지만, 난 계속해서 선택해왔고 지금도 선택한 것이다. ‘설마’에 달린 기대와 희망을. 앞으로도 설마가 ‘휴 다행이다’가 될 때까지 난 계속해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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