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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모교와 밀당하기 본문
대학원도서관 앞 벤치를 지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그곳의 풍경은 대학원생이었을 때, 수년간의 유학생활 이후 다시 찾았을 때, 시간강사로 오고가는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다. 그곳의 유의미한 변화는 도대체 언제쯤 있었을까. 한국담배인삼공사가 KT&G라는 이름으로 바뀌며 느닷없이 학교 곳곳에 빨갛고 예쁜 쓰레기통을 놓아주었을 때였을까. 여러 신분을 거치며 대학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참, 변하지 않는구나’ 싶은, 이런 장소가 하나쯤 있을 것이다. 대학이란 그런 곳이다. 매년 수천 명이 들어오고 떠나고, 신축과 리모델링 공사 중에 지형이 바뀌고, 새로운 단체와 기관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한편에서, 문을 두드리면 언제나 그곳에서 만나지는 사람이 있고, 80년대 학번부터 기수를 따지는 단체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고, 나의 과거를 움켜지고 끝내 놓아주지 않는 구석 하나쯤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대학은 짧은 주기로 정기적인 변화를 겪지만, 어쩌면 지독히도 바뀌지 않는 제도이자 공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틀렸다. 이것은 모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 특히 고려대만큼의 역사와 규모를 갖춘 대학을 졸업하고 시간강사로 채용된 경우의 제한적인 경험이다. 이런 조건 안에서는 변화를 감상적으로 관조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대학은 변화를 겪어낼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해 과거에 갇혔거나, 축적된 시간이 받쳐주는 지지대가 없어 아슬아슬하게 현재만을 살아간다. 과거에 남겨져있는 대학도, 현재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대학도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리고 이제 일부 대학의 미래는 심지어 고꾸라진다.
2021년 8월 17일 속칭 대학의 살생부로 불리는 교육부의 대학 기본역량진단 결과가 발표되었다. 대학에 관한 정부의 여러 사업과 평가는 장기적인 인구 감소 속에서 요구되는 대학 구조 조정과 연동된다. 교직원이 아닌 다음에야 시간강사를 비롯하여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큰 관심을 표할 리 없는 소식이었다.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대학이 ‘나의’ 직장이 아니고, ‘나의’ 직장이 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전공은 규모의 경제를 갖추지 못한 대학에서 개설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른바 소외학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시작되는 교육부의 대학 구조조정이 앞으로 시간강사로서 살아갈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한다. 교육 분야에 있어서의 구조 조정은 교육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재고하게 만든다. 하나의 산업 분야에서 시작되는 구조조정이 어떻게 파고를 높여 모두를 덮치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적인 경험을 했다. 다만 그 역사를 망각하거나,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착각 안으로 도피할 뿐이다. 지금 내가 시간강사로서 주로 생활하는 나의 모교 고려대는 그러한 망각과 도피를 돕는다. 모교는 강한 중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나의 에너지도 모교를 향한다. 이곳에는 내 기억 속의 장소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나의 인연들이 버티고 있다. 후배이자 학생인 이들과의 관계는 더 돈독하고 더 특별하다. 한 장소에서 과거와 현재를 공유하는 경험은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강사로서 모교와 맺는 이 특별한 관계는 자칫 특권적일 수 있다. 고려대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도 나의 ‘스위트홈’이 되어줄 것만 같은, 분명 특권적 지위를 가진 대학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한다. 여러 대학에서 일하지 않을 때도, 시간강사는 내가 가진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이다. 시간강사로서의 삶은 나를 이루는 중요한 토대이지만 나의 전부가 아니다. 모교와의 특별한 관계가 내가 가진 모든 직업을 관할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나를 구성하는 여러 자아를 지배하도록 허하는 순간, 나는 내가 몸담고 있는 산업군 안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변화에 무지한 무구한 박사로 전락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강사로서의 일반적인 노동조건과 대학교육이라는 산업군의 변화 안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로서 자아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모교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달달함’은 중독성이 강하다. 징글징글한 악연처럼 느껴지는 ‘씁쓸함’이라면 중독성은 더 강하다. 내가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 모교에서 ‘달콤쌉싸름’ 정도는 느끼지 않을까? 시간강사로 모교 이외 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은 훨씬 덜 자극적이다. 모교의 중독성에 현혹되는 순간 내가 발 딛고 있는 기반을 잊는다. 나는 특정 대학의 시간강사 이전에 연구자이며, 연구자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래서 나는 모교인 고려대와 언제나 밀당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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