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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기자 칼럼

미나리가 되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5. 7. 21:11

미나리가 되어

 

최서윤 기자 

 

  최근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와 차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전 세계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찡하면서도 이내 진작에 그랬어야 했는데하며 쓴웃음을 짓게 된다. 기술과 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그토록 자랑하면서도 여전히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아메리칸 드림과 끈끈한 가족애로 물든 영화 <미나리>에서 주인공 가족이 교회에 간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백인 소년 조니는 데이빗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불쑥 묻는다-“넌 얼굴이 왜 이렇게 납작해?” 교회 반대편 다른 구석에서는 한 소녀가 앤에게 말을 건넨다-“내가 아무 소리나 막 내 볼 테니까 너네 나라 말이 나오면 알려줘. 칭챙총총가거고모….” 

  이 짧은 장면이 이토록 강한 여운을 남기는 건 왜일까. ‘백인들의 나라에 사는 아시아인 꼬맹이였던 내가 수없이 겪었던 일이어서였을까. 아이들의 실수라며 웃어넘길 수도 없게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경험했던 탓일까.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는 관객들과는 달리 화면 너머의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친구가 된다. 데이빗은 조니의 집에 놀러가고, “고모. 한국어로 aunt라는 뜻이야라는 앤의 말에 소녀는 “Cool!”이라며 활짝 웃는다. 아이들이 던진 것은 조롱이 아니라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이 호기심은 결국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0년 남짓한 인생에서 처음 보는 외모는 유난히 신기했으며, 입에서 마구 내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동양인의 언어는 신선했을 뿐이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들은 자신의 발언이 모욕적이었는지도 모른 채 사회에서 그려지는 짠돌이 세탁소 아저씨’, ‘영어 못하는 기센 아줌마의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다. 미디어나 오랜 편견을 벗어나는 사람은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을, 생김새와 피부색이 그 사람의 환경과 인생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직접 깨닫지 않으면 말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배울 수는 있다. 차별과 혐오를 낳는 것은 결국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와 거부가 아니던가. 그 두껍고 수치스러운 껍데기를 깨고 나옴으로써 얻는 배움만이 결국 우리가 모든 편견을 넘어서는 방법이다. 데이빗과 앤은 자라면서 차별과 혐오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해도 괜찮다고 배울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힙한 한국 할머니가 수상소감을 말하는 모습을 보며 교회 아이들은 납작한 외모와 기괴한 언어가 전달하는 공감이 국경도 넘을 수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공유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들을 향한 편견에 조금씩 균열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움의 굴레는 모두에게 공유되고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는 타지에 간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것을 깨닫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