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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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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면/원우발언대

불안과 고요함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6. 3. 12:55

-어느 대학원생

 

  불면은 가뭄과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두운 방에 누워 언제 잠들지도 모르고 그저 눈을 감고 잠들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이 어쩌면 가뭄 속에서 비를 기다리던 농부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였다. 기나긴 밤, 잠 못 들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오롯이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말 생각만 많아진다. 낮에는 그렇게 피곤해하면서 정작 밤에는 잠을 못 자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누워 생각해 낸 결론은 불안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체 없이 막연한 걱정과 고민들이 밤마다 숙면을 방해한다. 도대체 뭐가 그리 불안한 것인지.

 

  학부 시절에는 서울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들 각자의 청춘을 열심히 채워나가고 있는 이곳에서 나만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이었다. 어쩌면 수업 시작할 시간이 다 지나서 교수님이 휴강을 통보한 스무 살의 어느 봄날 동기들과 중앙광장에서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면서 막연히 느낀 감정은 불안이었을지 모른다. 이 엄청난 자유의 책임이 결국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사실 리스(RISS)에서 산업혁명을 키워드로 논문을 검색하면 4차 산업혁명 관련 논문이 주르르 쏟아지는 시대에 18세기 산업혁명을 공부하고 있는 인문학 전공자의 하루하루가 불안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긴 하다. 한 학기 내내 18세기 산업혁명에 시달렸으니 리스에 산업혁명만 치면 영국 산업혁명 관련 논문이 줄줄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과학 분야 논문만 가득한 모니터를 바라보며 세상은 벌써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도달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그 시기 비슷한 과제를 하고 있던 동료들에게 했을 때 모두 공감해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덕분에 나만 아직 18세기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는 묘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모두가 인문학의 위기를 외칠 때, 세상이 급변할 거라는 언론의 외침이 이젠 고루하게 느껴질 지경인 이 시기에 과거만 바라보고 공부하는 일이 마냥 만족스럽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스스로 좋아서 선택한 일이 맞지만, 마음에서 자꾸 불안이 피어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불안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불안은 지금까지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안에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보낸 덕분에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며 지금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더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의 뿌리는 마음속의 불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불안이 많은 나는 마음이 고요한 사람들을 항상 동경해왔다. 그리고 자신의 고요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묵묵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 불안의 대가답게 소위 말하는 대2병을 아주 크게 앓고 있던 나에게 하지만 십 년 후에도 우리는 이렇게 마주 앉아서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있을걸이라고 말해주었던 선배는 내면의 고요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보여주었던 사람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멋진 선배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의 불안한 마음을 한마디 말로 위로할 수 있는 단단함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원 생활 중에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은 지도교수님이 전공수업 종강 날에 지나가듯 하신 말씀이었다. 매일 공부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엔 다 날아가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시간이 몸 속 어딘가 쌓여 언젠가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내공에서 나오는 단단함 같았다. 무엇보다도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당신도 학생일 땐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것 같은 공부에 허무함을 느꼈다는 사실의 반증 같아서 힘이 되었다. 책 읽고 기록하는 공부의 과정은 하염없이 길지만, 망각은 한순간인 것 같아 힘들고 불안할 때 종강하던 날 교수님의 한마디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진다.

 

 요즘 나에게 이와 같은 고요함을 나눠주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길고양이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정말 바쁘게 살고 있으면서도 점심을 먹고 나면 항상 고양이를 만나러 그의 집이 있는 공원으로 산책을 간다. 온 세상이 안방인 양 평안하게 자는 그 모습이 처음엔 귀여워서 좋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평화로움을 사랑하는 거였다. 매일 쫓기는 사람처럼 살면서도 고양이를 마주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추운 날은 햇빛 아래, 더운 날엔 그늘에 똑똑하게도 자리를 잡고 누워있는 그 기특함이 나에게는 고요함을 선물한다. 그 작은 생명이 한가로이 낮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오늘도 고요함과 불안함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해 애써본다. 그러고 나면 언젠가 나도 평안하게 밤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