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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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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모녀, 그 상충하는 관계성에 대한 힌트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6. 3. 13:16

정한아, 술과 바닐라(술과 바닐라, 문학동네, 2021)

-선우은실(문학평론가)

 

  521일부터 3일 동안 디아스포라 영화제가 열렸다. 난민, 여성, 퀴어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몇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그중 엄마와 딸을 주제로 한 단편들이 인상에 남는다. 이 단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딸은 엄마를 한 명의 개별자로 보고 그러한 모습을 찾아주려고 하지만 동시에 딸자식인 자신이 엄마에게 타인이 되는 과정에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이 두 가지 감정이 상충하는 듯하게 그리고 있다.

 

  자식이 성인이 되어 사회인으로 거듭나는 시점에 이르면 보호자와 피보호자라는 부모 자식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되는데 이때 모녀 관계의 특수성이 드러난다. 딸에서 엄마로 향하는 역전된 보살핌은 단순한 생활상의 케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머니-여성이 자식인 딸에게 증여했던 보살핌의 저변에는 여성으로서의 희생과 한 명의 여성 개인의 삶의 희생이 존재한다. 여성 개인의 삶의 희생은 궁극적으로는 가부장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포기해야 하는 개인의 선택적 삶인 것이다. 보살핌은 가부장제 안의 여성 역할인 어머니이자 아내에게 부과된 책임과 관련돼 있다.

 

  엄마의 애정과 등가로 여겨지는 희생이 궁극적으로 가부장제와 연관된 것임을 주지할 때 딸은 엄마 됨의 선택과 희생을 여타의 가족 구성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게 된다. 자신과 다르지 않은 여성인 엄마가 엄마아닌 채로 선택할 수 있었던 삶을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한 여성 개인의 삶을 톺아보게 만드는 일은 모녀라는 관계에 기대하는 불가해한 일방적 사랑의 양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엄마의 무조건적인 애정을 갈구하는 딸의 욕망은 엄마를 한 명의 개인으로 보는 것과 상충하는 욕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녀 관계를 다루는 여러 영화에서도 이러한 상충의 지점을 보여주었는데 해석의 차이는 있었으나 자식의 애정을 희생 삼은 어머니-여성의 자유또는 엄마의 희생을 토대로 한 자녀와의 애정 관계중 한쪽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는 모녀 중 꼭 한 쪽의 희생을 담보하여 다른 쪽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모친의 자유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상충하는 양상을 갈등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이러한 질문의 연장선에서 정한아의 술과 바닐라를 읽어봤다. 이 작품은 극본 작가인 가 결혼 생활 중 출산한 아이 율이를 돌봐줄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어린 시절 부모의 별거로 인해 이집 저집 전전했던 는 부모 중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율이를 돌봐주게 된 이모님과 관련한 것이라 그의 부모에 대해서 많은 정보가 주어지지 않지만 딱 한 번 그녀의 친모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얼마 뒤 어머니가 처음으로 집에 찾아왔다. 밍크코트에 가죽 부츠를 신은 어머니는 두 손 가득 빵을 사 들고 왔다. 이모님은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안고 있던 율이를 넘겨주었다. () 어머니는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저 여자 무슨 향수를 저렇게 들이부었다니.”/차에 오르기 전 어머니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향수 아니야.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뭘.”/어머니는 불만스럽다는 듯 쯔, 혀를 차더니 곧장 떠났다. (51~52)

 

  율이를 낳은 의 집에 처음 온 의 친모의 모습에서 다정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아이의 칭얼거림을 견디지 못하며 이모님의 짙은 섬유유연제 향을 흉본다. 딸의 안위에도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일면 이런 식의 묘사는 모친이 개인의 삶을 선택할 때 딸의 애정 결핍이라는 희생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돌봄과 여성을 주제로 하는 이 소설에서 모친에 대한 옹호 또는 비판의 문장이 더 기술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이로부터 모녀의 자유와 사랑의 문제에 있어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아름답게 봉합되는 관계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나 결핍이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자체로 모녀 관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소설은 경력단절을 원치 않아 아이의 돌봄을 위탁하는 가 생계와 커리어를 양육보다 우선으로 선택하며 이모님의 도움으로 사람 같이살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모친이 아닌 타인이 선취하게 되는 것에 대해 엄마로서의 질투와 죄책감을 느끼는 복합적인 내면을 다룬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궁극적인 원인이 가사 및 돌봄 노동이 오롯이 여성의 것으로 부과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다만 자식을 돌보는 것과 커리어가 상충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여성이 학습하게 되는 책임감과 부담감에 주목해 보아야 하겠다. ‘어머니 됨이란 분열적인 내적 충돌을 경험하는 일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이러한 명제 위에서 모녀를 이해할 때, 여성이라는 동질성에 기반한 여성 개별자로의 인식과 돌봄으로 구축된 모녀 관계는 어쩌면 구성적으로 상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