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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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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모녀 관계로 톺아보는 여성 서사의 역사성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0. 17. 16:55

모녀 관계로 톺아보는 여성 서사의 역사성

-황정은, 연년세세(창비, 2020)

 

 

 양조위가 빌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열 개의 링으로 영구한 힘과 생명을 얻어 세계를 제패하던 쑤가 전설의 장소에서 아내 리를 만나 개과천선하여 아들딸을 낳고 살다가, 지난날 그의 힘과 권력을 두려워한 자들에 의해 아내가 살해되면서 맹렬한 적의에 휩싸인다는 이야기다.

 아내/어머니의 숭고한 죽음에 바쳐지는 아버지/자식의 갈등과 사랑을 주제 삼는 이 서사에서 빌런 역의 매력과 별개로 드는 의문은 선악의 대결로 표상되는 부자갈등에 어머니 리의 삶과 죽음이 바쳐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계 최고의 빌런마저 변화토록 만든 위대한 어머니에게 바치는 사랑으로 이들의 싸움을 요약하건대 이는 오랫동안 비판 없이 재생산해 온 어머니 당신은 위대하다의 또 한 번의 반복은 아니었을까?

 다소간 아쉬움을 느끼며 문득 황정은의 연작 소설 연년세세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연년세세1945년생 어머니 이순일, 장녀 한영진, 차녀 한세진, 막내아들 한만수를 구성원으로 하는 가족의 서사로, 개중 이런 장면이 있다. 뉴질랜드에 정착하려는 한만수는 한국에 귀국한 어느 날 이순일에게 선물을 건넨다. 그것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는 어느 할머니의 유품으로, 한만수는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라는 노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살짝 눈물을 훔치는 이순일의 모습을 본 한세진은 서서히 분노와 모욕감을 느끼는데 한만수가 홀을 쥔 왕이 그것을 하사하듯 그 애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을 들어오며 성장했던 한세진이 자신의 삶 전체를 경험적 토대 삼아 이순일의 삶을 헤아리건대, 이순일이 부모로서 자식들과 맺는 삶의 양식을 그저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로 요약되어 숭배되고 말 것이 아니다. 전쟁 시기 보호자로부터 거듭 버림받고 가사 노동자로 부려졌을 뿐만 아니라 화재 사고로 어린 동생이 사망한 데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온 이순일에게 결혼과 출산, 즉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머니 되는 삶의 선택이란 찬란한 미래를 위한 전진이 아니라 당장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최선을 보류하기를 요구받아온 한세진의 시선에서 한만수는 식구 중 유일하게 자신을 위한 미래를 꿈꾸고 그것을 이뤄온 사람이다. 그의 눈에 비친 이순일의 삶이 다만 위대한 어머니로서 치환되고 숭배될 따름이라는 데 느끼는 분노란, 이순일의 영향 아래 성장한 한세진이 역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통틀어 이순일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이외에도 소설은 모녀 관계를 주축으로 하여 그녀들의 시선에서 발견되고 다시 쓰이는 여성 가족 일원의 삶에 주목한다. 왜 하필 모녀 관계에 주목하고 있는가는, 한국 전쟁을 시작으로 이후 정치적/경제적 변화를 관통하며 여성의 삶이 어떤 것을 지향(하지 못)하는지, 그러한 제약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이 한 가운데 가로 놓여있는 가부장제의 영향권 속에서 여성 가족 일원이 서로에게 어떤 애증을 품으며 현재와 미래를 타진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박완서 소설(나목, 그 남자네 집)에서부터 그 계보를 따져볼 수 있다(단 이때 계보란 박완서를 원본 삼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쟁 경험과 모녀 관계의 연대 가능성이 어떤 점에서 교착될 수밖에 없는지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박완서에서부터 두드러지는 이러한 모녀 관계와 역사성에 대한 성찰이 2020년대에 이르러 어떻게 연속적으로 살펴지고 있는가와 관련해 해방둥이 세대인 이순일의 삶의 역사에서부터 그 자식들의 삶을 연속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서사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한국 전쟁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이르는 역사적 흐름을 서사화 할 때,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이 그저 과거로서 단절되지 않고 현재와의 연속선 상에서 어떤 식으로 후대의 인물들과 관계 맺으며 이어져 왔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요컨대 전쟁 경험과 모녀 관계의 성립과 연대 가능성은 한 치 앞의 미래도 꿈꿀 수 없는 삶의 위기가 모녀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 의식을 형성토록 하는가와 관련돼 있다. 가령 한영진이 아이를 낳고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자신을 모체로 보는 수많은 이들에게 적의를 품었던 시간을 지나 아이와 비로소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성찰의 장면을 보라. 모체화 되는 경험을 통해 자기 훼손을 겪어본 적 있는 여성이, 환란의 시대를 관통하며 마치 자기를 벌하듯 내일은 없지만 다만 오늘이 있는 삶을 인고하는 또 다른 여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내일 없는 오늘의 감각이 가로놓여 있다.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삶의 마주침은 전쟁 또는 흡사 고요한 전쟁을 치르는 듯한 세계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연년세세가 보여주듯 대대적인 위기 상황에서 여성은 어떤 것을 요구받았고 어떤 것을 감내했으며 그것이 후대의 삶들과 어떻게 교류되는가는 그저 저 시대의 단절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이어져 오고 교류되는 하나의 흐름이다. 여성의 역사적 일대기를 어떻게 현재로 이어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룸에 특히 모녀 관계가 주요한 힌트가 될 수 있음을 거듭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