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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엄마의 엄마의 엄마에서 딸의 딸의 딸까지 본문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 2021.
지난 호에 여성 서사와 역사성을 주제로 하여 황정은의 『연년세세』를 소개한 바 있다. 박완서의 서사의 큰 줄기로 발견되는 전쟁 경험을 거친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친족으로서의 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힌트를 얻어 그러한 서사의 연속으로서 황정은의 소설을 읽고자 했다. 이 흐름에 이어 이번에는 최은영의 『밝은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황정은의 서사가 전후(戰後)~산업화 시기를 지나온 여성의 삶과 그 자녀의 삶 사이의 유사성 혹은 연결성을 짚고 있다면 최은영은 그 연결의 시대적 폭을 더 넓힌다. 최은영의 소설은 화자 지연, 지연의 엄마 미선, 미선의 엄마이자 지연의 할머니 영옥, 영옥의 엄마이자 지연의 증조할머니인 삼천이(출신 지역을 이름으로 부르는 호칭)의 4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황정은과 마찬가지로 최은영의 서사 역시 선대 여성과 후대 여성의 삶의 유사성과 연속성을 포착하는 것으로서 여성 서사의 역사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가부장제 폭력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백정 출신의 부모를 두어 오래도록 사회적으로 차별받아온 증조모의 삶부터 살펴보자. 아버지나 남자 형제 하나 없이 삼천에서 병든 노모를 돌보면서 살아가던 증조모는 어느 날 일본 순사가 사회적 보호 장치로서 가부장제에 속하지 않은-남편이나 아버지 등 남자 형제 없는-조선인 여성을 눈여겨보았다가 어디론가 차출하며, 자신이 그에 적합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천주교도이자 양인 계급 박희수는 그녀에게 혼인을 제안하고 그녀를 구하고자 한다. 그를 의심하면서도 오직 살길은 그것뿐이라 박희수와 개성에 가 혼인신고를 하는 증조모의 삶에서 남자 가족 구성원을 취하는 일은 가부장적 보호 장치를 통하지 않고는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당대 여성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훗날 돌이켜보건대 박희수의 그러한 행위는 그가 숭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허영심의 힘”(60)에 의해서였다고 판명된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한다는 영웅주의적 면모에 도취되어 있었고 희생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자 아내를 구박함으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해소하려 한다. 이렇게 행해진 가부장제 폭력은 살아남기 위해 결혼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던 증조모의 삶을 해치고 딸인 영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영옥은 물정 모르는 아버지의 말에 떠밀려 남선과 결혼한다. 그런데 영옥의 결혼은 증조모의 선택과는 사뭇 다르다. 한평생 아버지가 딸이란 이유로 자신을 맘에 들지 않아 했다는 걸 알았던 영옥이 “남선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증조부에게 인정받을 수”(218) 있으리란 조심스러운 기대를 품고 결혼을 택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영옥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결혼에 투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선이 아내를 착취함으로써 세간의 호평을 얻는 사람이었으며, 끝내는 자신이 재취였음을 알게 되고 본래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통보하면서 영옥은 끝내 남편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한 명의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은 남편의 행동에 영옥의 잘못도 있다며 그녀를 질타하는데, 이러한 영옥의 삶을 통해 여성에게 가정의 책임을 전가하는 가부장제 폭력은 그것이 당사자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어 온 측면이 있음을 적시한다.
영옥의 딸이자 지연의 어머니인 미선은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왔다. 서사 속 다른 여성 인물에 비하면 낱낱이 그 역사가 설명되지는 않지만 미선의 결혼 역시 순탄하게 성사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교수 직함을 달고 있는 미선의 남편은 가족에게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남편과 여태껏 살고 있는 미선도 그가 뭔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리라 여기면서도 미선이 영옥과의 한 시절을 끝맺기 위해 서로 반기기 어려운 결혼을 택한 정황이 짚인다. 한편 할머니인 영옥에 의해 이러한 삼대 여성의 서사를 듣게 된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막 이혼한 참이다. 미선이 영옥을 원망하듯 지연 또한 이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선을 원망한다. 그러나 조모가 손녀에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원망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넓어져 가며 결혼과 가부장제 폭력에 대한 그녀들의 삶을 아우른다.
이 서사에서 중요한 것은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의 이들의 삶이 그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남지 않고 (설령 완전히 이해받지 못할지라도) 할머니에서 손녀에게로, 엄마에서 딸에게로, 또 그 역으로 서로의 삶을 투영해보고 연결 지으려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소설은 그저 폭력적 삶의 대물림이 아니라 오래도록 성찰 없이 반복되어 온 가해하는 사회에 맞서 온 여성들의 서사로 보는 편이 옳다. 유사하고도 차이 나는 방식으로 가부장제의 폭력적 현실에 둘러싸인 여성들은 자신들의 어머니가 줄곧 그래왔듯 그 현실에 별수 없이 기입될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이 다음의 여성에게까지 그 폭력적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유사하고도 차이 나는 방식으로 증조모부터 증손녀에 이르는 이들은 폭력적 현실에 맞서는 방법을 서로의 삶에 기대어 찾을 것임을, 영옥과 지연을 연결함으로써 이 소설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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