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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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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어떤 기행 : 상실에 대하여 1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3. 7. 22:11

어떤 기행 : 상실에 대하여 1

-편혜영, 「리코더」, 『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저마다 취약한 감정의 선이 있다.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의미의) 보편적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누군가의 상실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러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상실감 또는 그 인접한 영역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건드려지는 지점이나 타이밍은 저마다 다르겠는데, 최근에는 이런 문장이 그 감정선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도시락은 늘 남겼고 체육과 교련 시간에는 교실에 남았고 수업시간에 질문을 받으면 입을 꾹 다물어 선생을 질리게 했다. (107)

 

 이 문장은 편혜영 「리코더」의 한 구절이다.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고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아 사람을 질리게 만든 이는 무영이다. 무영은 극기훈련 수련장이 무너지며 학생 다수가 사망한 사고의 생존자 중 한 명으로, 이후 멀쩡한 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오래도록 다리를 저는 시늉을 하곤 했으며 위의 문장에서처럼 어떤 행동을 하지 않고 또 어떤 말은 결코 하지 않아서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저 무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나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고도 표현되었을 수 있는 상황이 타인을 “질리게 했다”고 쓰여 있다. ‘질린다’는 상태가 타인으로부터 추동되었을 때 그것은 더는 도저히 참아줄 수 없다, 적당한 선을 넘어섰다는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의 죽음을 등에 업고 살아난 것만 같은 죄책감과 상실감이 무영의 기행을 불러왔으리란 것을 타인은 적어도 이해는 하지만, 이 ‘이해’는 ‘적당’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 같다. 적당한 시간, 적당한 기행, 적당한 상실감. 허용된 적당의 시기와 깊이를 넘어서면 어떤 행위는 그저 그것인 채로 내버려둬지지 않고 남을 질리게 만드는 것으로 여겨지며, 누군가를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지나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당시에 무영 말고도 살아남은 자가 또 있었다.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있다가 구조된 수오가 그렇다. 사고 당시 겁에 질려있던 수오는 벽 너머에 있던 친구의 제안으로 끝말잇기를 했다. ‘더’로 말을 이어가야 했던 수오는 대뜸 “더럽게 재수없”다고 소리쳤다가 이내 “더듬이”라고 말한다. 답이 없는 친구에게 “치사하게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수오는 이윽고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대고 “크게 소리 질러 제 위치를 알렸”고, 이후 “수오는 절대 소리를 지르지 않고 대답하는 데 시간을 끌지 않는 사람이” 된다.

 생존자 두 사람이 여러 사람의 죽음의 무게를 삶으로서 지니고 살아가게 됨에 그들이 서로의 고통과 상실감을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을 것임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이십 년 가까이 만나지 않았으며 그들의 기억이 소환된 까닭 역시 훗날 수오가 실종되면서다. 다시 말해 서사는 고등학교 때의 사고가 아니라 수오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 이 불행한 사고와 수상한 사건은 어째서 얽히는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창에게 사정해가며 돈을 꾸려고 했던 어른 무영은 오랜만에 연락이 된 수오가 자기 집의 방 한 칸을 빌려주겠다는 말에 염치 불고하고 그 집에 기거하지만, 머잖아 수오가 실종되면서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무영을 의심하는 건 경찰뿐만 아니라 무영의 처지를 아는 동창 세준도 마찬가지다. 수오가 실종되었음을 확신하는 시선에서 무영은 소름 돋는 기행을 저지른, 그렇게 여전히 타인을 질리게 만드는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서사의 끝에 가서 수오가 실은 돈을 주고 고용한 두 남자에게 “자발적 실종”을 돕게 했음이 밝혀진다. 수오는 죽지 않았고 다만 기행을 저지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라 수오가 이끄는 ‘사건’이다.

 무영과 수오의 이런 행위들은 단발적 기행처럼 읽히기도 하나, 곰곰 생각해보면 한 세계에서 타인이 상실된 이후의 삶 자체가 일종의 기행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애도의 정도와 기간에는 ‘적당’이라는 것이 없고 남은 이의 삶으로서 아주 조금 갚아질 뿐이라면 더 그렇다.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종결되지 않는다. 그들과 한 세계에 속한 남은 이들의 살아감은 이제는 없는 이들의 죽음을 아울러 하나의 사건이 된다. 사고는 종종 우연의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사건은 필연성을 지닌다. 타인의 죽음을 아직 살아가는 나의 삶이라는 필연으로 지속해가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은 그저 적당히 처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살아가는 이들의 삶 속 그리움, 상실감 따위의 감정들은 죽음을 ‘끝’인 채로 두지 않고 그 죽음을 유예해나가는 두 번째 기회를 부여한다. 

 「작가의 말」에서 편혜영은 이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밝히면서 한 토크 쇼에서 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했던 말을 언급했다. “우리가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가 죽으면 사랑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워하리라는 걸 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가 말하듯 “우리는 사후에 누군가의 그리움이 된다.” 사는 동안 해결되지 않는 그리움과 상실을 안고 가는 이들의 삶이 사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