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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죽음을 느낀다는 것-상실에 대하여 3 본문

5면/문학의 향기

죽음을 느낀다는 것-상실에 대하여 3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5. 4. 23:47

죽음을 느낀다는 것-상실에 대하여 3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김지연, 「내가 울기 시작할 때」,  『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

 

 

 

이번 학기 ‘문학의 향기’에서는 죽음 또는 상실을 테마로 하는 작품을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생존자 인물 중심의 서사(편혜영)와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주치는 서사(이유리)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김지연의 「내가 울기 시작할 때」를 다룬다. 이 소설은 죽음을 맞이한 이가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점점 세계로부터 살았던 시절의 기억이 파편화되어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할 때 죽은 자의 시선에서 역전되어 기억되는 생을 회고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김지연은 다른 작품에서도 꽤 빈번하게 죽음을 다루었다. 이를테면  『마음에 없는 소리』의 다른 수록작인 「작정기」에는 일본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유코에게 (사실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함께 오지 못한 친구 원진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원진이 유코에게 죽은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을 바로잡지 않는 ‘나’가 등장한다. ‘나’는 훗날 정말로 원진이 사망하고 난 뒤 우연히 재회한 유코에게 그제서야 원진이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오열한다. 한편 「그런 나약한 말들」에는 정은이라는 인물의 은사(恩師)의 사망을 다룬다.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라 자신하는 정은은 왜 그녀가 자신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리지 않았는가에 골몰하고 동창 혜수로부터 실은 선생님이 정은을 좀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음을 전해 듣고 거리감을 느낀다.이렇듯 죽음을 마주하는 인물들은 끝내는 격정적 감정에 휩싸이게 되더라도 타인의 상실을 구체화하는 일련의 시간 동안만큼은 그 사건을 일부러 그러나 다소간 건조하게 생각한다. 「내가 울기 시작할 때」 또한 그런 면이 있다. 이때 ‘건조하다’는 표현은 아주 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도 있겠는데 이 소설이 사실은 다정에 대해 아주 많이 말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말할 때 자신의 느낌보다 특정 상황에 대한 진술 위주로 묘사된다. 즉 다정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고 상황에 대한 판단으로 드러난다. 이는 소설이 말하려는 것과 인물의 표현 사이의 거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떨어져 있는 거리 사이에 다정하고 폭신한 분위기가 놓여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한편 이 소설이 보다 과감하게 죽음 이후의 시점에서 망자를 중심으로 삶을 돌아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 주목할 때 이런 점도 살필 필요가 있다. 죽음을 맞이한 첫날 떠올리는 기억이 가장 세세하게 묘사되고 소설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며, 이틀 사흘 나흘 닷새에 이르는 과정은 매우 압축적으로 서술된다는 점이 그렇다. 이는 단순히 작법 상 소설적 사건 서술에 가중치를 두었기 때문만은 아니고 하루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에 대한 기억이 파편화되어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실 이 파편화에 대한 힌트는 소설의 첫머리에 제시된다. 소설의 주된 내용이 생전 ‘삼’과의 연애와 이별에 맞춰져 있다 할지라도, ‘삼’과의 기억보다 훨씬 더 이전의 과거에 누군가 “죽는다는 건 어쩌면 그냥 마음이 산산이 흩어지는 건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는 것, 그리고 “죽은 지 일 일째, 심연을 잃어버린 기분”이라고 고백한다. 뚝뚝 끊어지듯 묘사되어있는 이러한 장면은 이미 죽음 상태에 있는 ‘나’가 그런 방식으로 죽음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의 근거로 작동한다. 죽자마자 떠올리는 ‘삼’과의 기억을 서술하는 톤이 산발적으로 다정의 분위기를 형성하면서도 다소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마음이 산산이 흩어지는” 경험을 드러내는 구체적 방법인 셈이다.

이 소설이 죽음에 이른 ‘나’가 자신의 흩어지는 다정의 감각들을 그러모으는 하나의 행위를 담았다고 할 때, 빠르게 흩어져가는 다정의 기억들 중에서 왜 하필 ‘삼’을 떠올렸는가도 이 표현 방식과 연관성을 지닌다. ‘삼’은 처음 ‘나’에게 마치 실속 없는 농담처럼 다가왔던 사람이다. 그는 잎맥 같은 것을 확대 관찰해서 그리면서 모든 포유류가 파충류를 조상으로 삼고, 그 파충류는 어류를 조상으로 삼았고…그런 식으로 꼬리를 물고 가면 결국 모든 생물은 단세포생물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모든 침팬지 모든 벌레 모든 풀잎 모든 삼나무와 조상이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거나 블루투스의 기원을 아냐면서 10세기에 살았던 한 바이킹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의 치아가 지나치게 하얀 탓에 밝은 밤이면 푸르게 빛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진실 여부에 있지 않다. 그가 표명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러니까 그는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살아 있음 자체로 어떤 다정을 행위하려 한다.

한편 ‘나’는 정합적 언어를 지향하고 비견되는 차이에 주목하는 사람이다. ‘나’가 “우리만의 언어를 발명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삼은 그에 대해 “언어란 건 상대를 속이려고 만들어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가 흩뿌려지는 존재 상실의 시간을 겪는 중에 결국은 그 어떤 정합적 언어 세계로 이것이 감각되지 않고 다소 뿌연 분위기나 뭉근한 감정처럼 와닿는 기억으로 되살린다는 것은, 적어도 그런 언어적 세계를 지향했던 이에게는 “심연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주 강력한 메시지나 특별한 사건 없이 자신의 죽음의 상태를 하나의 연애 기억으로 내어놓는 이 소설에 마음이 동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정합적 언어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 때로는 별수 없이 감정이나 분위기 또는 느낌 따위로 구성돼있는 그것을 말하는 한 방법으로 이 소설은 제출된다. 우리는 이 소설로부터 뭔가를 깨닫는 것이 아닌 끝내 불가해한 존재의 자리를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