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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죽음의 이해 (불)가능성 : 상실에 대하여 4 본문

5면/문학의 향기

죽음의 이해 (불)가능성 : 상실에 대하여 4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6. 3. 23:18

죽음의 이해 ()가능성 : 상실에 대하여 4

- 이장욱, 잠수종과 독, 트로츠키와 야생란, 창비, 2022.

죽음-상실을 테마로 한 이번 학기 학의 향기의 마지막 꼭지다. 그간 다룬 서사의 공통점은 서사를 이끄는 인물이 죽음 사건의 직접적 관계자라는 것이었다. 편혜영의 소설 속 인물들은 죽음 사건으로부터 우연히 살아남은 자였고, 이유리의 소설에서는 전 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였으며, 김지연의 소설에서는 서사를 이끄는 자가 곧 죽은 자였다.

이장욱의 잠수종과 독도 그렇다. 이 소설에서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차 사고로 사망한 현우의 애인 이다. 앞서 다룬 소설들이 여전히 살아있음(혹은 죽어 가고 있음)의 형태로 죽음과 여남은 삶을 애도하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듯 이 소설도 그렇다. 다만 여기에는 서늘한 공기가 깔려있는데, 이는 공의 애인 현우의 죽음이 국가 폭력이나 사회적 책임 방기로 인해 벌어진 죽음처럼 비의도성에 의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우연하게 발생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공은 현재 생명이 위독한 방화범을 환자로 돌보고 있다. 공은 그가 회복되어 자신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처벌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그가 죽기를 바란다. 이 극단적인 마음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까닭은 소설 말미에 그가 방화범이자 환자인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내뱉었던 것과 같이 그가 살아있어야만 그래야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은 어째서 사회 정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모조리 부정하고 싶은 충동을 숨기지 못하면서까지 방화범에게 적의를 느끼는가.

보도에 따르면 방화범 A씨는 유력 언론사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 모든 과정을 자신의 SNS에 생중계하고 불로 뛰어드는 퍼포먼스까지 보였는데 이로 인해 당시 건물에 있었던 언론인 다수가 다치거나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방화범은 구조되었으나 진술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기에 병원에서 회복 중인 상태다. 의사인 공은 그를 환자로 맡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과 연속된 현실의 한 장면 속에 현우의 죽음이 놓여 있다.

범인이 입을 열 수 없는 처지이기에 언론은 저마다 이 자의 신원과 동기 등을 추정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객관적 사실이 진실을 드러내는 한 조각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이 있을 것이라 믿는 이들에 의해 몇몇의 사실이 그 서사에 맞게 자리를 맞춰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이 하나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어째서 다름 아닌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골몰하는지 묻게 만든다.

 

60대 독신자로 도둑질을 하고 징역 16개월에 처해진 당사자는 (...) 13개월이 흘러 감형을 받고 출소했다. (...) 출소 후 그가 저지른 범행은 엉뚱하게도 진보 색채의 신문사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장 발장 비유로 사법부를 비판한 신문사였다. 그가 그 기사를 (...) 읽었든 읽지 않았든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28)

 

현우의 사망은 우연이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인터뷰가 잡혀 있었고, 하필이면 그 시간에 좌회전 차선의 맨 앞에 정차해 있었으며, 하필이면 그 순간에 신문사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 현우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집어 들었으며 좌회전 신호가 뜨려는 순간 액셀을 밟았다. (32)

 

음모론을 방불케 하는 방화범의 개인사 및 정치 성향, 종교 등에 대한 정보는, 검증 결과 그가 하필 특정 시간에 그 건물에 방화를 저지른 것을 설명해주지 못하며 그의 방화 동기에 대해 언론이 그려놓은 서사의 근거도 되지 못한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범인의 증언만이 유효한 상황에서 벌 받아 마땅한 이는 바로 그렇게 되기 위해 회복되기를 기대받는다. 한편 현우의 죽음은 방화범의 소행과 그다지 연관이 없어 보인다. 현우의 사망은 객관적 사실 정황만 보더라도 다른 여지 없는 사고사다. 다만 사람들에게 방화범의 소행이 불가해하듯 공에게 현우의 죽음 또한 그러하다. 오지와 분쟁지역을 탐사했던 현우는 마침내 조용한 생활, 그런 생활 속의 평화와 고요한 투쟁, 마침내 찾아오는 사랑과 죽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촉망받는 사진작가일 뿐이다. 그런 그가 인터뷰 장소로 향하던 중 하필 그곳에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급히 좌회전을 하다가 직진 차량과 충돌해 사망했을 때, 적어도 현우에게 삶을 기울이고 있는 공은 이 죽음과 그 방화 사이에 최소한의 연쇄를 찾아내지 않고서는 이 우연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떤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물론 죽음을 초래한 원인과 책임의 소재가 명명백백한 것도 있다. 특히 특정인에 의해 묵인됐거나 혹은 사회적 폭력에 의거해 발생되어 해당 죽음을 초래한 원인이 규명될 수 있는 사례가 그렇다. 이 경우 법적으로 처벌 가능한 인과성이 증명된다. 그러나 이를테면 현우의 죽음은 어떠한가? 이 죽음은 어떤 식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그 사건은 어떻게 그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나. 점점이 흩어져 있는 사실에 인과를 부여해 서사를 만들어내는 일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행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의식 작용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그저 우연에 필연적 조작을 가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허망하기 그지없다. 다만 타인과 자신의 연관성을, 세계에서 어떤 존재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노력 안에 이런 인과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는 것을, 공의 ()가해한 적대감을 매만져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