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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소설의 결말, 인물의 결말 본문
성해나 「오즈」, '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
작품을 효율적으로 읽고 분석하게 될 때가 있다. 대체로 마감에 쫓길 때의 얘기다. 물론 대부분 자처한 상황이기는 하다. 평론의 주제를 고려해 다룰 만한 작품들을 글에 배치하고 특정한 관점으로 작품을 풀어나갈 때 작품의 의의는 평론의 방향에 맞춰 간결하고 명료해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족한가? 애당초 한 작품을 선정한 까닭은 그것이 평론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시’ 읽었을 때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작품이 가진 입체적이고 자율적인 지점이 매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텐데, (평론에서 다루는 주제 이외의 지점이란 의미에서) 여분의 미덕을 괄호 치지 않고 넉넉하게 읽었다고 할 수 있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대충 밟아 끄고 나서 이런 질문을 떠올려본다. 소설을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할까? 정용준은 에세이 『소설 만세』(민음사, 2022)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이 소설이라면 내가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떠떠떠,떠」의 결말은 소설의 결말일 수는 있지만 인물의 결말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73)
그러니까 아무리 소설이라 할지라도 인물이 오직 그 감정과 그 감각밖에 느끼지 못하는 듯 쓰면 곤란하지 않을까. (…)
고통을 느꼈다.
슬픔을 느꼈다.
죽고 싶었다.
이렇게 소설은 끝나지만 인물에게는 소설이 끝난 이후에도 삶이 있다. (87)
소설의 결말은 인물이 지금 이 순간 처한 하나의 상황을 일단락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은 인물에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소설에서 전개되는 ‘현재’에 도달하기까지 인물이 거쳐온 시간과 역사를 포함한다. 다만 이 소설의 결말 이후에 인물의 삶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고 소설의 결말에 서술된 정서 상태가 인물에게 영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정용준이 말한 소설의 결말과 인물의 결말을 분리하며 소설을 생각하는 일은 작가의 일이지만 작가만의 몫은 아니다. 작품에 기대어 삶을 읽어내는 것이 평론인 이상 이는 평론의 고려사항이기도 하다. 단 작품을 엄격하고 정확하게 읽는 것에 몰두하는 대신 작품과는 다소 별개일 수 있는 인물의 삶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느슨한 가능성을 읽음’으로 말이다.
성해나의 「오즈」는 이런 고민을 붙여 읽기에 좋은 소설이다. 소설은 서로 전혀 연고가 없는 ‘나’와 이복례 할머니가 하우스 쉐어링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은 있지만 보호가 필요한 독거노인과 주거가 불안정한 청년 모두를 케어하려는 이 사업에서 만나게 된 ‘나’와 이복례 할머니는 사업 의도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최근 엄마가 자살하면서 가족을 모두 잃고 삶에 대한 의지도 돈도 집도 없는 ‘나’는 당장 살 곳을 찾아야 하고, 할머니는 구청에서 돈을 좀 준다고 했기에 이 사업에 참여했다. 심장에 기계장치를 단 무뚝뚝한 할머니와 숨죽이듯 겨우 생존하는 ‘나’의 기이한 동거를 다루는 이 소설에서 극적인 사건은 할머니의 사망뿐이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도 ‘나’에게는 가족/집/돈 중 그 어떤 것 하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인물의 삶과 소설을 곧장 등치시켜 이 소설 및 인물의 삶을 시시하다거나 비극적이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정용준의 말처럼 소설이 커다란 변화 없이 끝났다고 해서 인물의 삶 역시 그렇게 종식되는 것은 아니다. 인물이 딱히 큰 변화를 맞이하지 않고 소설이 끝날지라도 이 서사의 결말이 인물의 삶 전체로 유비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런 인물의 삶의 변화 가능성은 소설이 전개되는 동안 제시된 ‘소소한 변화’로서 이미 제출된 바 있는데, 이를 고려해 소설의 사건을 다시 헤아려보자. 조선인 여성에 대한 멸시를 상징하는 문구를 거칠게 몸에 낙인찍힌 할머니는 ‘나’의 타투를 보고 어느 날 커버업을 요청한다. ‘나’는 그 작업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을 가져보고 미술 학원에 등록하며, 그러는 사이 둘은 <오즈의 마법사>를 보러 극장에 가거나 압화를 하는 등 취미도 나눈다. 조금 욕심을 내 할머니에게 타투를 진행하던 어느 날 할머니의 인공 심장 박동기에 큰 무리가 생기고 머잖아 그녀는 사망한다. 이후 할머니의 친척이 집 처분 문제로 ‘나’를 찾아오고 ‘나’는 곧 집을 빼주마고 약속한다.
단순히 소설의 결말로만 이를 바라본다면 할머니의 문제도 ‘나’의 문제도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할머니의 집을 ‘나’가 유산으로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독자의 실낱같은 ‘소설적 기대’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서사의 결론으로 놓았을 때 비극일 수는 있어도 삶의 국면에서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삶에 산재하는 사건에 저마다의 ‘끝’이 있되 그 상태가 남은 삶 전체를 규정하지는 않듯, 한 서사의 결말 역시 이 자체로 하나의 사건의 종지부일지라도 ‘이다음’의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변동하는 삶의 가능 양태를 담지하기 때문이다.
서사의 결말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은 듯한 ‘소소한 사건’은 적어도 인물의 서사 ‘이후의’ 삶에는 영향을 미쳐 변화를 꾀한다. 새로 집을 구한 ‘나’가 자신의 몸에 타투를 새기며 “반듯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실선. 선이 어떤 문양으로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었다”라고 말하는 마지막 구절이 그렇다. 소설은 끝났지만 ‘나’의 삶은 ‘약간’ 다르게 계속될 것이다. 저 선이 어디론가 이어지며 다른 그림을 그려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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