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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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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사랑이 필요함을 인정하기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11. 5. 23:50

사랑이 필요함을 인정하기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백수린은 소설의 후기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너무 무서워”(238~239)라며 소설의 주인공 옥미가 말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마음’이며 그걸 ‘들여다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한 나름의 대답으로 최근 내게 있었던 일을 하나 이야기해볼까 한다. 종종 심리 상담을 받는 나는 상담 선생님과 은근한 기 싸움을 하다가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될 때가 있었다. 이 기 싸움은 사실 나 자신과 다투는 일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상담사가 의도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면 그 대답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랬다. 그런데 이것은 상담의 방향에 거부감이 든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인정하는 일의 문제였다. 어떤 종류의 감정 상태에 접근해야 한다는 걸 자신이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 나는 어떤 이유에서 내가 특정한 감정을 느꼈다는 걸 공인하고 싶지 않고 그 마음을 짐짓 모른 체했다는 것조차 알고 있었다.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건 그런 일 같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인정하는 일. 때문에 소설 속 옥미의 묘한 고집스러운 분위기는 그녀가 딸 인서와의 문제에서 이미 자각하고 있는 어떤 마음을 인정하고 다뤄내는 과정의 어려움으로 읽힌다. 그건 옥미의 유연하지 못한 성격 탓이 아니라 그녀가 딸을 떠올릴 때 찾아오는 복합적인 감정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의 문제였던 것이 아닐까.

노년 여성인 옥미는 혼자 살고 있다. 남편은 대장암으로 사망하고 딸 인서는 결혼해 출가했다. 주변에서는 나이 들어 혼자 사는 그녀를 안타까워하지만 정작 본인은 혼자서 “뭐든지 해결하며”(216) 사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다. 남편과의 사랑 없는 결혼 생활, 인서가 커가는 동안 하루도 과일 트럭 장사를 쉴 수 없었던 그간의 삶을 떠올리면 옥미의 말마따나 혼자 된 노년은 “마침내 찾아온 평화”(217)의 시간이다. 이제야 겨우 삶의 복작거림과 타인을 돌보는 일의 책무에서 벗어난 옥미에게 어느 날 사위는 앵무새를 한 마리 맡긴다. 앵무새를 키우기에 적당한 환경을 만드는 동안 한 달 정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옥미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이 과거에 인서에게 못 해준 것만 생각나 제안을 수락한다. 기계적으로 앵무새를 돌보던 어느 날 스트레스를 받은 앵무새가 이상 증세를 보인다. 옥미는 앵무새의 환경을 더 쾌적하게 만들어주고 놀아주기도 해야 한다는 수의사에 말에 따라 그녀의 시간을 앵무새에게 한껏 할애한다. 밥과 물을 좀 더 자주 챙겨주고 새장을 열어 산책을 시켜주기도 한다. 여기까지의 돌봄은 어디까지나 옥미의 인서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눈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나 즐거움 따위 없이, 그 너머에 있는 이를 향한 속죄로 행해지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옥미는 앵무새가 달라 보인다는 걸 알아챈다. 

 

그런데 며칠이 더 지나자 믿기 힘든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다. 그러니까 앵무새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 그러던 어느 날, 돗자리가 깔린 거실 바닥에 누운 채 책을 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보니 앵무새가 그녀의 배 위에 올라와 있었다. (…) 작은 털실 뭉치처럼 고개를 파묻고 몸을 웅크린 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그녀가 누군가를 해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는 것처럼. (226~227)

 

건조하고 반복적인 돌봄 노동일지라도 얼마간 그 대상에게 신경을 기울이면서 옥미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고, 그에 응답하듯 앵무새가 그녀를 믿고 자신을 내맡기기 시작했을 때 그녀 또한 자신의 사랑을 돌아보게 된다. 이 장면에 와 ‘돌봄’은 타인의 요구를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돌봄을 요청하는 이가 상대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듯, 그 요청에 응하는 것 또한 돌보는 대상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앵무새를 받아들이며 옥미는 자기도 앵무새에게 사랑받고 싶음을 이해한다. 이는 ‘옥미-인서’의 관계와 비교된다. 인서는 옥미에게 아이를 돌봐달라는 말은커녕 그 어떤 부탁도 한사코 하지 않았고 옥미는 자기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딸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다만 그 좌절에 이르러서야 인서가 그간 옥미에게 실망하고 보챘던 일 또한 옥미를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배반될 수 있었던 일임을, 자신에게 몸을 내맡긴 앵무새를 보며 옥미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 인서에 대한 부채감, 미안함, 서운함과 같은 복합적인 마음의 정체는 결국 옥미가 인서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 인서만이 아니었다는 것, 옥미도 인서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것. 그것이 옥미가 두려워하면서도 들여다보았던 자기 마음의 정체다.

처음에 이 소설이 인서가 옥미에게 갈망하는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인서에 대한 옥미의 사랑 고백이다. 다만 옥미‘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고백이다. 인서의 집으로 돌아간 앵무새를 그리워하면서 앵무새와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하는 마지막 장면은, 강인해 보이고 의연하게 자기 삶의 잘잘못을 감당해온 것처럼 보이는 옥미에게도 간절히 다정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 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에게 사랑을 주는 자신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소설이 헤아리는 마음의 일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