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승인되는 임신, 승인되지 않은 출산 본문

5면/문학의 향기

승인되는 임신, 승인되지 않은 출산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2. 4. 00:23

승인되는 임신, 승인되지 않은 출산

 

 

-박민정, 「약혼」(『Axt』 2021 9/10)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약혼에는 가부장제가 포용하는(요구하는) 여성의 요건과 불일치하는 경험을 하는 인물인 연수가 등장한다. 가령 연수는 애들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기에 흡연에 모종의 죄책감을 느낀다. 지인의 말처럼 네가 만약 예술가였다면, 연예인이었다면, 적어도 애들 가르치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괜찮았을 흡연이 연수에게는 도덕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피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연수가 보육 시설에서 일하기 때문에 흡연을 용서받을 수 없는 걸까? 그것이 단지 아이들에게 신체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얼마간 그렇지 않다임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이를 곁에 두는 이의 흡연 사례는 그리 희귀하지 않다. 자녀를 둔 아버지들이 그 예다. 자녀의 여부나 육아 참여의 여부와 상관없이 흡연하는 아버지들의 수는 적지 않다. 실질적으로 양육에 참여하면서 흡연하는 경우라면 연수와 같은 이유로 문제일 것이고, 양육에 참여하지 않으면서(않기 때문에) 흡연하는 것이라면 그것대로 문제가 될 텐데 양육자와 흡연의 문제가 그런 식으로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즉 돌봄 노동과 관련된 도덕적 판정의 사례에서의 기준은 돌봄 주체와 그 대상이 직간접적으로 주고받는 신체 접촉에만 있지 않다. 그 한가운데에는 가부장제가 승인하는 젠더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남성 중심 가부장제 하에서 어떤 역할이나 행위에 대해 젠더화가 공고히 진행된 바 있다는 가정 위에서 문제의 요점은 특정 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가부장제의 승인 기준선 안에 있느냐다. 이와 관련해 연수의 두 차례의 임신 경험을 살펴보자. 연수는 과거 폭력적인 남성과 위험한 연애를 하다가 임신한 적이 있다. 남자의 폭언 속에서 연수는 임신 굳건한 마음으로 중단을 선택했지만 홀가분하지만은 않았는데 이제 나는 어떤 여자들과는 영영 달라져버렸다는 상실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뒤 현재, 결혼을 앞둔 연수는 예비 남편과 신혼집에 입주해 살고 있다. 결혼 직후 임신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예비 남편의 결혼 다음의 목표가 아빠임에 답답함을 느끼던 연수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수가 자인하듯 과거 임신 상황에서 출산은 애초에 고려할 선택지조차 아니었다. 임신을 계기로 폭언을 일삼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일은 한 사람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의 인격에 결격 사유가 있음을 인정하는 선에서 연수의 임신 중단은 과연 합리적인 사유로 판정될 수 있었을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당시 연수의 임신 중단은 가부장제의 승인의 범주에 들어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혼을 원치 않는 20대 여성의 임신 중단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낙태죄가 폐지된 현재, 임신 중단에 대한 엄숙주의적 태도를 바꾸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와 비교할 때 현재 연수의 임신은 어떠한가. 만약 연수의 혼전 임신이 가부장제의 승인을 통과했다면 과거의 폭력적 남성과 비교할 때 인격적으로 더 나은 남성을 만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임신과 예정된 출산이 곧 결혼을 예비하는 관계에서 그리 흠 잡힐 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가부장제가 승인하는 임신이다. 혼전임신은 눈총을 좀 받게 되는 일일지라도 남성과의 결혼이라는 제도의 입장이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온하다고 판정되지 않는다. 즉 여성의 임신 사실에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를 규율을 따를 것임이 약속되어있는 한 그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혼이 전제되어있는 상황에서의 임신 중단은 어떠할까? 가부장제가 승인하는 것은 남성 가부장 중심의 직계존속의 재생산임을 염두에 두며 연수와 엄마의 관계를 살펴보자. 연수의 엄마는 약혼 후 시댁살이를 하던 시절 시댁에서 업둥이 취급을 받는 아이가 한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연수였는데 아이는 부모뿐만 아니라 여러 보호자로부터도 방치되어 있었다. 예비 며느리였던 엄마는 고된 시집살이에 도망가려다가도 연수가 너무 예뻐서 그녀를 키우겠다고 마음먹고 결혼을 선택한다. 그런데 엄마는 시댁에서 딸이라고 천대받는 연수(와 연수의 어머니)의 처지를 목도하면서 연수를 입양하기로 마음먹기 직전에 아이를 뗐었다고 연수에게 말한다. 남편은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자신은 딸을 낳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에, 시댁에서 여아를 낳은 가부장제 관리 하의 여성의 삶이 어떠한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엄마의 임신 중단을 알고 아빠가 그녀를 짐승 취급했다는 구절은 가부장제가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임신 중단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여아 살해를 유도하고 용인하는 가부장제를 둘러싼 공동체는 그것의 수행에서만큼은 여성 개인에게 그 책임을 외주화하겠다는 것, 그러한 한에서 임신 중단이 승인된다.

 소설이 보여주듯 제도 규율을 암묵적으로 재생산하는 삶의 현장에서 임신(중단) 및 출산과 관련하여 여성의 신체적 자율성을 말하는 일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현상의 옳고 그름을 넘어 가부장제가 승인하(지 않)는 것을 장면화함으로써 그 기저의 욕망을 헤쳐 보이는 이 소설의 질문을 함께 곱씹어보아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