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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이번 주는 쉬어갑니다 본문
이번 주는 쉬어갑니다
-박솔뫼, 「건널목의 말」, 『우리의 사람들』, 창비, 2021.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이번 주는 쉬어갑니다. 따뜻해져가는 날에 적응하기 위함입니다. 저 멀리 있는 것 같은 종강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쯤에서 잠깐 쉬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릴 시점인 것도 같습니다. 코로나가 한시바삐 종식되어 생명의 위협 없이 어딘가로 떠나 푹 쉴 수 있다면 좋겠군요. 모두들 건강히 다음 계절에 뵙겠습니다….’
중간고사 무렵이 되면 내심 떠올려보는 인사말이다. 개강하고 고작 두어달 쯤 지났지만 날이 따뜻해지면서 긴장도 풀린다. 새 학기에 적응하느라 처음 한 달은 바짝 긴장하고 두 번째 달은 적응한 것을 토대로 뭔가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며 남은 에너지를 다 소진했으니 지칠 만도 하다. 실상 두 달 내내 유지했던 조금 높은 수준의 긴장 상태를 풀어갈 때도 됐다.
이번 달에는 마음의 부담 없이 긴장을 풀어보면 좋을 것 같아 그런 소설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박솔뫼의 「건널목의 말」이다. 박솔뫼의 소설에는 부산의 호텔로 떠난/떠났던 언젠가를 떠올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으로 그녀는 일상의 말에 치일 때면 고향인 부산에 숨어버리듯 내려가 쉬곤 한다. 쉬러 간 이야기인 만큼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호텔에서 며칠 묵는 동안 본 풍경, 사 먹은 음식, 그 사이에 떠올린 몇 가지 생각이 내용의 전부다.
여기서 잠깐 “호텔로 떠난/떠났던”이란 표현을 나란히 둔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소설은 엄밀하게 말해 현재 서울에 있는 ‘나’가 이전에 부산의 호텔에 머물며 생각했던 것을 “일기” 형태로 적어내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부산에 대한 회고는 마치 지금 그 장면이 눈에 펼쳐진 것과 같이 이어지고 있어 현재와 과거의 구분을 무용케 한다. 게다가 궁극적으로 ‘부산의 호텔’이란 그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나’의 안식처이자 ‘나’가 긴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궁리를 가능케 하는 장소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부산을 떠올리는 이 소설은 ‘부산의 호텔’로 상정되는 자기 이완과 성찰의 장소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부산에 있고/있었던 이야기가 된다.
주변의 어떤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 인물의 서사는 그의 관념을 따라 읽는 독자 역시 비슷한 상태에 동화되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마침 화자 역시 ‘생활의 말’에 지쳐있는 상태에서 부산행을 한 것이기에 현실에 지친 독자라면 자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투영해볼 수도 있겠다.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올해 내내 말이 잘되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되는 소설의 구절은 ‘생활의 말’이란 것이 대체로는 ‘잘 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괴감을 수반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화자는 그러한 피로감에서 벗어나고자 부산에 찾아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호텔에 머무는 동안 (즉 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뭔가를 열심히, 잘 말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녀는 홀로 머물며 거의 대화하지 않는다. 해운대의 라운지 바에서 자신에게 “술을 휙휙 급하게 마신다”고 의아해하며 말을 거는 바텐더에게 “맛있어서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대꾸해버린다. 해운대 근처에서 백인 남자가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는 ‘부담을 느끼지 않는 외국어 말하기’에 대해 잠시 생각하기는 해도 그들의 심심한 대화가 “해운대를 굴러다니는 모래처럼 가볍다고 느껴버리는” 자신과 같은 가벼움을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긴장하지 않는 인물의 하루종일 쉬는 이야기를 읽고 그의 (결코 진지하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과열되지 않은 사유를 따라감으로써 그것을 읽는 우리도 사유의 이완을 시도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쉽게 말하기’라든지 ‘편안하게 생각하기’란 곧잘 첨예해지는 생활의 감각 속에서 때때로 되새겨야 할 미덕이다. 문제는 긴장 상태에 가까운 날들이 더 많은 삶은 곧잘 ‘이완의 감각’을 생소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간단하고 명료하고 부담 없이 결정하거나 생각하는 방법 또는 골몰하지 않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방법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5월의 우리는 어쨌거나 그 ‘이완의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을 필요가 있으니 ‘나’의 기록을 안내서 삼아 우리 자신의 질문으로 가져가 보기로 하자.
소설의 한 구절에서 ‘나’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볍게 해줄 것이라고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들을 몇 가지 더 생각해보고 쓰기로 한다”고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래의 내용을 참고해 주말에는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느긋하게 생각해봐도 좋겠다.)
1. 산으로 가 말들을 묻고 돌아와 숙면을 취한다.
2. 같은 말을 반복한다.
3. 원하는 미래를 쓴다.
4. 원하는 모든 것과 원한다고 쓴 모든 것을 믿는다. (52쪽)
이후 ‘나’는 자신을 가볍게 하는 방법으로 ‘동면’을 떠올린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동면은 수면과 달리 단지 잠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사실 이 소설은 다른 ‘동면’ 연작과 주제 의식의 측면에서 연결되어 있다. 이 소설은 동면 연작의 도입부로 읽힌다.) 그런데 왜 동면일까. 어쩌면 우리가 견뎌내는 ‘지금’이란 잠깐 잠들었다가 현실로 복귀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만큼 ‘존재하기’에 너무 밀착된 시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박솔뫼의 소설을 천천히 따라 읽으며 이번 주는 한숨 돌려 가는 하루가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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