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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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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고통받을 줄 아는 인간성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3. 24. 13:22

 

고통받을 줄 아는 인간성에 대하여

-엔도 슈사쿠, 『바다와 독약』(박유미 역, 창비, 2014)

선우은실(문학평론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바다와 독약은 이 오랜 물음을 탐구한다.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무렵 실제 있었던 규슈대학 미군 포로 생체실험 사건이 사건은 1945 5~6월 일본의 패전을 앞두고 규슈대 의사들이 미군 포로 8명을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일을 말한다. 당시의 목격자 도노 도시오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들은 크게 세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고 한다. 혈액을 얼마나 최대치로 빼낼 수 있는지, 혈액에 바닷물을 얼마나 투여해야 인간이 살아있을 수 있는지, 폐를 얼마나 제거해야 인간이 죽는지가 그 내용이다. 종전 후 대학 및 군 관계자 30여 명이 기소됐고 5명에게 사형, 18명에게 9~25년형이 선고됐으며 집도의는 수감 중 자살했다고 알려졌다. (<1945 日 규슈대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 옹 인터뷰>, 동아일보, 2015. 8. 20. https://bit.ly/3unV3nW)을 다룬다. 소설에서 F의대 의료진은 출세와 명예를 위해 누구나 죽어가는 시대를 구실로 어차피 죽을 결핵 환자나 미군 포로를 실험의 도구로 삼아 의학 발전에 기여토록 하겠다는 궤변을 토해내며 서로를 공범으로 만들어간다.

 

소설의 첫 장면부터 생체실험 사건이 서술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전쟁이 끝난 시기 니시마쯔바라로 이사를 온 가 동네에 있는 허름한 병원의 의원 스구로에게 기흉 치료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했다가, 과거 생체실험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스구로의 F의대 연구원 시절 이야기로 흘러간다.

 

여기서 소설 초반의 는 핵심적 사건에 가담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요하다곤 할 수 없지만 종전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는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들이 전쟁 당시 곳곳에서 사람을 죽인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개중 누군가는 잔혹했던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책의 역자가 짚어주고 있듯 이 장면은 를 포함해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어딘가 비틀려 있긴 해도 아무렇지 않게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는 어떻게든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처절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끝내 기이한 불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이들이 과거의 살육을 무감하게 또는 한때의 쾌락으로 여기며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단지 전쟁의 비극이라 수긍하는 대신 진정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전쟁을 거치며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를 건너 펼쳐지는 전쟁 때 생체실험 서사는 당시 의료 연구원이었던 스구로, 동료 토다 등을 중심으로 그들이 잃은 것이 고통받는 인간성임을 보여준다. 스구로는 불의에 저항할 만큼의 용기는 없지만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자신의 첫 환자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타인에게 연민을 가질 줄 아는 의사였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그 환자가 폐 수술 실험 대상이 되고, 수술 전에 자연사하고 마는 것을 목도하면서 자기 안의 인간적인 마음을 상실하고 만다. 그 환자의 죽음은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나마 살려보고자 했던 스구로의 마지막 의지력이었다. 스구로는 전쟁도 일본도 자신도 모두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생체실험에 참여하기로 한다.

 

스구로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인간의 목숨이 하찮게 사라져가는 전쟁을 겪으면서 가망 없는 환자를 살리는 일에 회의하기보다는 이런 상황에서나마 생존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한 명의 살아있음을 지향코자 했다. 그러나 그는 강압에 불응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조금의 저항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에 그가 잃어버린 것은 의사의 생명 윤리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인간에 대한 신념이 무너져버림으로써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을 잃는다.

 

한편 스구로와 달리 전쟁의 참혹함을 받아들이는 듯한 현실주의자 토다 역시 내면의 뭔가를 잃은 사람이다. 토다는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시선과 요구를 간파하고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등생을 흉내 내며 자라왔다. 그는 어렸을 적 그러한 비밀을 들킨 듯한 굴욕감과 수치스러움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의사가 되고 사람의 목숨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전쟁을 거치며 자신이 그 감정에조차 무감해지고 있음에 두려움을 느낀다. 과거에는 타인의 시선 및 세상의 처벌이나마 두려워했으나 그는 점점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생체실험 제안에 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최악의 일을 했을 때 여전히 두려움/공포/수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지,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실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다는 실험 이후 자신이 최악의 공포에도 적응하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성을 보증하는 것은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고통스러움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괴로운 일일지언정, 고통이야말로 인간됨을 증거한다.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타인을 연민할 수 있고 과거를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전쟁이란 극단의 상황을 배경으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꼭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을 때만 인간됨을 잃어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 됨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감각에 익숙해지는 정도에 비례해 소실된다. 인간적인 것을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끝도 없이 우스워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