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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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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모두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11. 6. 15:28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내일의 연인들』, 문학동네, 2020.

 

 

 생각해보면 나쁜 일은 언제나 있었다. 어린 시절 선생님의 심부름을 까먹고 집에 그냥 와버렸을 때 패닉에 빠지고 자책했던 것만도 내게는 나쁜 일로 기억되는 걸 보면, 나쁜 일이란 지금 내가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상황을 의미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른(?)의 스킬이란 것이 생겼다면 가끔은 당장 코앞의 저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을 시전한다는 것과 이 이상으로 내가 손 쓸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다. 때문에 나쁜 일을 마주치면 여전히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것이 내가 노력을 다하거나 또는 하지 않아도 찾아올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어쩌지 못하는 일 앞에서 우리는 종종 절망을 느낀다. 이때 이란 일과 관련된 성과와 사람 문제를 모두 포함한다. 통제권을 가지려는 일과 한끝 차이처럼 보이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왜 노력하려고 할까?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고 싶고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 싶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결정적으로 할 거 다 했고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더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큰 무기력이 찾아온다. 그것은 아마도 그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좌절 때문만은 아니고 곤욕과 곤혹을 수반하는 노력을 했다는 상황에서 어딘가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곳이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데서 오는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그것(사람/직업적인 것/물건 등)과 독점적이고도 특별한 애착을 주고받는 관계/상황 속에 놓여있을 때는 애정을 부여할 수 있는 그것이 있고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게 특권적인 거라고 미처 생각한다는 것에 비극이 있다. 더 이상 노력이 불가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순간에 가서야 우리는 그 특권이 소멸됐음을 안다.

 

 내가 그것에게 임의로 부여함으로써 나 역시 가지게 된 특별한 지위로 특권을 이해할 때, ‘그 특권의 주고받음이 그 시점에 왜 필요한가(했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정영수의 소설 내일의 연인들은 이 질문에 골몰한다. 소설은 와 오래 알고 지낸, 엄마 친구 딸 선애 누나가 느닷없이 이혼 소식을 전하며 전남편과 살던 남현동 집이 팔릴 때까지 관리차 그곳에 머물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하면서 시작된다. 누나가 이혼한 때마침 는 지원과 연애를 시작한 참인데, 이 두 사건이 겹친다는 사실로 인해 주목하게 되는 것은 관계 혹은 상황의 끝과 시작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점이다.

 

 위의 질문과 좀 얽혀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장면(선애 누나가 예전에 큰 사고를 당했을 때 정작 그녀를 살뜰히 보살폈던 전남친 정훈과 헤어지고 퇴원 후 (현재 전남편이 된) 새 남자와 느닷없이 결혼했다는 것, ‘의 아버지는 엄마를 향해 비아냥대고 어머니는 종종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매일 같이 싸우지만 그들이 매번 화해를 해낸다는 점에서 정작 자식인 는 미쳐버릴 것 같다는 것, ‘가 대학원을 가게 된 것은 전 직장 선배의 말에 의해서였다는 점 등)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것은 다음의 구절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할까? (...) 실은 지원과 내가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어떤 식으로든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는 증거였을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들이었던 게 아니라 마침 구원이 필요했던 두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p. 64)

 

 앞서 나는 관계에 기대를 가져볼 수 있고 노력을 해볼 수 있었던 어떤 시점, 그러니까 그러한 노력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암묵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그 시간에 서로는 서로에 대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가 지적하듯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하지만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상황을 그렇게 특별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자기 해석을 토대로 한다. 때문에 그렇게 시작된 관계나 초래된 상황이 과연 좋으냐 나쁘냐,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조금은 유용하고 대개 무용하다. 그때 그 어떤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때는 그런 행운을 받아들이고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며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걸 미리 알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5) 요컨대 다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다만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것은 서로에게 필요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선애 누나의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는 이혼 소식은 (‘의 말마따나) 구원은 몰라도 구조를 가능케했던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의미고, 누나가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기력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누나에겐 그것이 어느 정도는 절망이고 포기겠지만한 가닥 그녀를 구원하기 위한 여지를 남겨놓는다면 역시 누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듯이, 나중에 괜찮아질 줄도 지금은 알지 못한다는 것일 테다. 이런 희망적 결론은 아무래도 좀 뻔한가. 그러나 적어도 삶의 문제에서 희망적 결론을 가지는 게 스스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는 아니까 어쩔 수 없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