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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블랙 코미디 모녀 서사 본문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한지혜, 「토마토를 끓이는 밤」, 문장웹진, 2014년 1월
시선을 달리 취해 뭔가를 읽어내는 것이란 언제나 예측한 것보다 더 지난하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읽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라 그 ‘무엇’이 어떻게 발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자주 놓치는 것만 같다. 이것은 최근 부쩍 자주 목격되는 ‘모녀 서사’와 관련된 고민이다.
여기서 ‘모녀 서사’란 모녀 관계에 초점을 맞춘 서사를 의미하는데, 이 관계 양상 자체가 특별히 새로운 서사적 주제인 것은 아니다. 딸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소설은 지속적으로 있었지만 최근에 부쩍 그 구현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데 시선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는 최근 문학장에서 사유하는 젠더 정체성과 관련돼 있는데, 서사들은 어떻게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의 시선으로부터 탈피하여 여성의 삶을 구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최근 모녀 서사의 특이점은 ‘모녀’가 서사에 등장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말하고자 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데 있다.
오늘날 모녀 서사는 이른바 고전적 관점에서의 어머니의 희생과 자식된 도리로서 딸의 감화 등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 하에서 모녀의 관계란 단지 ‘부양자-피부양자’ 또는 ‘부모-자식’ 관계처럼 젠더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엄마와 딸이 서로를 마주함에 있어 적극적으로 경유하고 검토하게 되는 하나의 ‘프레임’이면서 그 프레임을 벗어나도록 만드는 자기 인식이다. 이렇듯 서로를 자기 정체화의 일부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포착되는 ‘모녀’의 양상은 자기와 타인을 성찰하는 한 방법을 보여준다. 이는 나아가 여성 서사와 모녀 관계를 연결시킬 때 과연 모녀 양상을 일정한 서사적 틀에 놓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다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에 한지혜의 「토마토를 끓이는 밤」에 주목해본다. 이 소설은 남편의 실직으로 가난해진 ‘나’가 남편과 함께 친정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사는 이야기다. 남편의 실직 상황, 그리고 그나마 일한 만큼의 급여도 받지 못한 ‘나’의 잠깐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돌아보면 이들의 경제난은 심각한 수준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설은 이것을 어둡고 절망적으로 그리는 대신 조금은 대책 없이 낙관적인 모습으로 그린다. 이는 실제로 이들의 삶이 고되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들이 그런 상황에 대한 현실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들이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시점에도 삶의 위기는 이렇듯 뭔가를 잘못하지 않아도 찾아오고 그럴 때 마지막 보루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군인가 하는 점과 연관해 이 장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시점에서 임대 아파트에 살며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엄마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들은 엄마의 집에서 방 한 칸씩 차지하고 엄마의 부업을 도와가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이처럼 엄마는 일차적으로 다 큰 딸 내외의 보호자로서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소설이 엄마를 이런 방식으로 현시화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말해 이 소설에서 엄마는 ‘믿을 수밖에 없지만 어딘가 완전히 믿음직스럽지는 않은 책임자’다. 반찬 가게의 재료를 손질해주는 것만 하는 줄 알았던 엄마의 진짜 부업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노인들의 거취를 확인하고 그들의 숨겨진 보호자인 자식들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부모가 나이가 들면 자식과 부모 사이의 부양자의 역할이 뒤바뀐다. 그런데 어떤 자식들에게 부모란 “같이 살면서 부양의 의무를 지는 건 못해도 부모가 세상을 떠난 사실도 뒤늦게 알게 돼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피하고 싶은, 그 정도 체면치레는 지켜야 하는” 일로 여겨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이유로 남의 부모를 돌보는 일을 하는 것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부모인 ‘나’의 엄마라는 사실이다. 이런 방식으로 소설은 어딘가 짓궂고 불편한 사실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나’가 어딘가 찜찜한 엄마의 노동을 마침내 금전을 주고 받는 경제 활동으로 인정하게 되면서 엄마의 뒷바라지로써 그 ‘거래 행위’에 가담하는 모습이 그러하고, 이로써 부모 부양의 의무란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금전과 교환되는 가치일 뿐임을 폭로한다는 점이 그렇다.
소설의 말미에 이보다 더 큰 반전(?)이 한 번 더 있다. 반전은 요컨대 엄마가 돌보던 501호 요주의 할머니가 치매증세를 보일 무렵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발생한다. 할머니의 부잣집 아들 즉 엄마의 고용주는 대리인을 시켜 그의 엄마를 모셔가고자 하는데, 대리인은 ‘나’의 엄마를 고용주의 엄마로 오해하면서 ‘나’에게 입원비 잔금을 치르고 “봉투”를 건넨다. ‘나’는 잠시 죄책감을 느끼지만 이윽고 나중에 해명하리라 생각하며 엄마를 팔아넘긴다.
소설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모녀 서사 자체가 아니라, 모녀의 관계 양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소설은 모녀 서사를 비튼다. 엄마와 딸이 서로의 입장을 노력하는 서사 역시 귀하지만, 그러한 책임으로서의 관계를 전복시켜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 안에서 모녀가 서로에게 지는 부양의 의무를 어떤 방식으로 해소하는지를 블랙 코미디로 다룬 서사는 드물기에 한지혜의 모녀 서사 양상이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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