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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나를 도와줄래? 불가능한 욕망의 교환에 대하여 본문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사람들은 때로 타인이 듣고 싶은 말을 한다. 삶에서 대부분의 일이 타인의 도움만으로는 말끔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고 위로하는 방법뿐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늘 선의로 행해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총체적인 맥락을 누군가가 헤아려주기를 원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을 통해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거나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욕망은 발화자의 의도를 파악한 청자에 의해 간파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청자가 자신의 요구를 수락함으로써 어떤 욕망을 해소하고 싶은지를 역으로 겨눌 수도 있다.
“정말 날 도울 수 있어?”하고 말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때 청자는 낯선 이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다는 예언자이자 심리치료사라고 주장하는 자다. 그에게 “당신이 정말 나를 도와줄 수 있냐”고 묻는 상황에서 청자에 대한 묘한 경계심을 느낄 수 있다. 발화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쓸모가 없다는 적대감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지금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절박하게 필요함을 노출하는 것이다.
한편 그 말을 듣는 의심스러운 심리치료사는 그 불안을 본다. ‘저 사람은 나를 의심하는 것 같지만 누구나의 삶에 있을 법한 문제들을 던져서 그중 하나라도 맞으면 바로 나에게 문제를 의탁하겠지’ 생각한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발화자는 대체로 상류층의 화려하고 유약한 여성들이므로 그녀들이 익히 겪는 문제를 던진다. 이렇게 청자는 발화자가 ‘듣고 싶은 것’을 들려준다. 발화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이 모든 나쁜 상황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그것을 대신 해결해주면 더 좋을 사람이 필요하다. 이에 청자는 심리치료사를 자처하며 기꺼이 그 마음의 짐을 자신이 부담하고 대신 돈을 받는 거래를 제안한다.
예시로 든 이 상황은 길리언 플린의 『나는 언제나 옳다』의 일부 내용이다. 이 소설은 심리치료사라고 주장하는(사실은 남성들의 자위를 돕는 이른바 “손일”을 하다가 손목에 무리가 오면서 상류층 여성들에게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초자연적인(?) 치료를 하고 돈을 갈취하는) ‘나’의 시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는 자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이는 ‘수전 버크’를 만나 그녀에게 한밑천 뜯어낼 생각으로 저주 들렸다는 그녀의 저택에 ‘치료’를 간다. 막상 도착해보니 문제는 저택이 아니었다. 출장이 잦은 남편과 의붓아들 마일즈, 친아들 잭과 사는 수전은 마일즈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더해 의미심장한 말을 걸어오는 마일즈를 보자 ‘나’는 점차 이 일에서 발을 빼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여기에서 잠깐 줄거리 소개를 멈추고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가 수전의 불안 해소에 대한 욕망을 감지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경제적 이득을 누리고자 할 때, 교환되는 것은 수전의 욕망뿐일까? 그녀의 욕망을 알아차린 ‘나’는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고 스스로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전능감을 확인하려 한다. 이때 ‘나’의 전능감이란 실은 자신은 누려 보지 못한 상류층의 삶을 기만하는 것으로 둔갑된 열패감 해소에 대한 욕망이다. 이는 ‘나’가 수전 버크의 어린 시절을 그려보며 “아마 책벌레였겠지. 예쁘면서 수줍음이 많은 아이. 엄격한 부모님. 항상 반듯했겠지”와 같이 상류층의 안온한 삶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태도에서 확인된다. 화자가 어머니와 자신을 도와줄 것 같은 타겟을 노려 구걸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을 짐짓 명랑하게 말하는 것과 수전의 과거를 냉소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보살핌에 대한 자신의 결핍을 대리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같다. 평온한 가정 속의 부모와 탈 없이 자란 수전에 대한 상상은 ‘나’가 가지고 싶었던, 그러나 되지 못했던 삶에 대한 끝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아는 욕망의 표출이다. 즉 수전의 불안감 해소의 욕망은, 상류층 되기에 대한 열패감 해소로서 ‘나’의 욕망과 교환된다.
관련해서 ‘나’가 유독 책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도 주목하자. 수전과 같은 상류층 사람들의 무식함에 냉소적 시선을 내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똑똑한 사람들이 읽는 두껍고 감동적인 책. 그런 책이 1,000권이나 있는데 그 방을 어떻게 그냥 ‘골방 서재’라고 부를 수 있지?”―은 ‘나’가 독서를 통해 유일하게 상류층의 삶과 닿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함을 드러낸다(“아는 책을 발견할 때마다 기뻤다. 이런 멋진 사람들의 장서를 이렇게나 많이 읽었다니.”).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나’는 자신의 이러한 욕망이 마일즈에 의해 이용당했음을 알게 된다. 수전의 불안 해소에 대한 욕망 그리고 ‘나’의 열등감 해소에 대한 욕망을 들여다본 마일즈는 자신이 원하는 삶(‘나’를 이용한 수전으로부터의 해방)을 얻고자 그 둘의 욕망을 모두 이용한다. 이렇듯 소설은 각 인물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교환되며 이용되고 뒤섞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건의 진실을 자꾸만 뒤집는다. 명쾌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독자의 욕망은 번복되는 서사의 진실 속에서 끊임없이 배반되는데, 그만큼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이 주는 아이러니컬한 즐거움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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