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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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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견뎌내는 일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29. 12:02

- 선우은실(문학평론가)

 

 

견뎌내는 일에 대하여

 


-권여선, 「하늘 높이 아름답게」, 『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9.

  지겹다. 코로나 시대에 선뜻 적응하지 못한 채 일상을 이어나가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지겹다는 것이었다. 작년과 같지 않은 오늘을 맞이하면서 오는 당혹스러움과 낭패감은 지겹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한몫했다. 좋으나 싫으나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시기에 좀처럼 외출을 하지도 누구를 만나지도 않으니까 새 학기를 맞이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프리랜서의 생활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일도 공부도 제대로는커녕 하나를 겨우 해내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물론 그저 기분 탓이거나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둘러대는 핑계일 수도 있다. 그저 핑계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지겹다는 감각 어딘가에 조금은 섞여들어 있긴 할 것이다. 인간은 모두 일을 하고 나도 원고 노동자인 이상 매일매일 뭐든 써내야 하니까 뭔가 읽고 쓰고 반복하던 일과를 반복하던 어느 날에는 도저히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겹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지겨운가, 뭘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그러한가. 읽고 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란 언제나 즐거움만으로 할 수는 없어서 강제력이나 책임감 같은 것들이 동반된다. 그런 것에서 오는 부담을 감내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유독 이번에는 그걸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읽고 쓰는지, 도대체 뭘 쓰는 건지. 나는 읽는 게 정말 즐거운지 쓰는 게 보람이 있는지, 내가 쓰는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지 그런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정말로 모두들 어떻게 읽고 쓰는 삶을 지치지 않고 잘 이어나가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사는 일이 이렇게 비천하다, 비천해.” 오만 것에 다 허망한 마음이 들 때면 나는 권여선의 소설 「이모」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아주 느린 속도로 『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의 단편들을 읽는 중에 접한 권여선의 「하늘 높이 아름답게」를 읽으면서 「이모」의 이런 문장을 겹쳐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나에게 이렇게 기억된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하는 베르타의 말, 그리고 이어지는 작가의 말에서 “윗세대 여성들에 대한 미묘한 원한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작가가 소설 쓰는 행위에 대해 “원한은 풀 길이 없는데, 잘못되었다는 것만 알 뿐 지금도 올바른 과녁은 알지 못한다”고 쓴 것으로. 읽고 쓰는 삶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막연한 원한 같은 마음(?)도 오늘의 이런 쓰기 행위로 해소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쓰기로 한다.

 

  소설은 일흔 두 살 ‘마리아’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마리아는 오남매 중 막내로, 성장기 내내 그저 “시집가기 전까지 착취”해야 하는 노동력을 지닌 딸로 간주된다. 마리아는 성장하여 파독 간호사로 일한다. 타지에서 만난 ‘카디르’와 마리아 사이에 아이 한 명이 생기는데, 카디르는 마리아가 출산 후 퇴원하던 길에 과업으로 인해 돌연사한다. 때마침 마리아는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면서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입양보낸 뒤 귀국한다. 그 이후 마리아는 보육원에서 한 아이를 장기 위탁 보호한다. 정신 병력이 있는 아이를 병원에 맡긴 마리아는 종종 그 병원에 들러 아이를 돌보고 병원을 위해 봉사를 한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병원에서 마약성 진통제와 주사를 빼돌린다. 신장암 때문이었다.

 

  마리아와 관련된 정보는 성당 관계자 여럿에 의해 구성되는데 그중 소설에서 특히 초점화되어 있는 서술자는 ‘베르타’다. 그녀는 태극기를 팔러 다니는 마리아의 여정에 딱 한 번 동행한 적이 있다. 태극기는 하나도 팔리지 않은 그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베르타는 지나가던 행인의 양산에 눈 언저리를 찔린다. “저 사모님은 해도 다 졌는데 웬 양산을 쓰고 다녀서 이렇게 사모님 놀라게”하느냐며 황급히 달려온 마리아를 보면서, 저런 사람을 “사모님”이라 칭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살피며 내뱉던 마리아의 지독한 냄새의 숨결 모두 베르타는 그저 거슬리고 역겹게 느낀다.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그 잠깐 동안뿐이었다고. 눈을 찌른 여자의 양산이 싸구려가 아니었다면, 마리아의 구취가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인한 오심과 구토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베르타는 비웃듯이 입가를 비틀었다. 조금 전 성당 안뜰에서 그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빅토르[마리아가 입양한 아이-인용자]의 병원에 달려가 봉사할 듯이, 앞다투어 소피아[마리아의 손녀로 알려진 또다른 입양아-인용자]의 입양을 주선할 듯이 떠들어댔지만 내일이 되면 그들 중 누구도 마리아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67)

  마리아에 대한 퍼즐을 가지고 있는 성당 사람 중 몇몇은 마리아의 어떤 행위의 이면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장례식에 아들 빅토르를 꼭 참석시키고 싶어 병원에 전화를 건 안셀모 신부는 미적지근한 병원의 반응에 “마리아님이 그동안 병원에서 봉사하신 걸 생각해보”라고 화를 내지만, 그 병원에서 각종 약을 빼돌렸다고 고해한 마리아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죽음만으로 완전히 덮어지지 않는 행적이 마리아에게 있고 안셀모는 그것을 안다. 약을 훔친 것이 신장암 때문이었음을 안셀모가 언제 알았든 베르타가 냉소하는 것처럼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은 인간을 위해 뭔가를 하는데 그 이면을 알고 보면 참 아름답지가 않고, 아름답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만으로 느껴기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참 고귀하지를 않다.

 

  이 소설을 통해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은 고귀하지 않으므로 그 어떤 것에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냉소만은 아니다. 모두 남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그런 제스처마저 단지 자기를 위한 것에 불과했음을 베르타가 거듭 확인하는 중에도, 인간이 타인을 위할 수 있다는 다소간의 믿음이 있지 않았다면 이 모든 냉소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마음먹더라도 ‘혹시나’하는 기대를 아주 없애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타를 불문하고 어떤 존재의 행위로부터 인간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신뢰가 좌절된다고 할 때, ‘인간이란 도대체’ 싶으면서 그것이 나쁘다, 고귀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면 더욱더. 정말로 괴로운 것은 여전히 그런 상황을 보면서도 마음이 식는다는 그 사실, 그런 식으로 아직 인간을 신뢰하려는 마음 남아 있음을 매번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베르타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인간 자신이듯 사람은 누구나 하나쯤 견뎌내는 것이 있다. 소설을 보며 어딘가 불편한 마음 한구석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이런 쓰기를 통해서 뭔가를 견뎌냈다는 뜻이 되는 것도 같다. 내가 견딘 것은 아마도 지겨운 상태의 자기 자신이었으리란 말을 뒤늦게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