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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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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문학의 향기

저 시대의 소설을 이 시대에 읽는 것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4. 17:04

- 문학의 향기

-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저 시대의 소설을 이 시대에 읽는 것에 대하여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정호영 역, 위대한 사랑, 콜론타이의 위대한 사랑, 노사과연, 2013.

 

여성의 해방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무엇이 오래도록 이어져 온 이 질문을 가능케 했는가. 여성 해방의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억압받고 있다는 자각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우리는 과거부터 이어져 온 문제의식을 현재 어떻게 전유할 수 있는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이전과 지금이 유사하면서도 다른데도, 이후의 시기에 어떻게 억압 및 해방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는가.

 

콜론타이는 러시아 사회주의의 역사 속에서 여성과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하여 주된 역할을 했다. 그녀의 작품과 글은 식민지 조선에 소개되었을 때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전유기도 했다. 예컨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에게 콜론타이의 존재 및 그녀의 소설은 1920~1940년 사이에 조선 내 신여성 담론에 관여됐으며 노동자 여성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제 그녀의 소설은 어떻게 읽히는가? 위대한 사랑“1905년 러시아 혁명 실패 후, 해외로 망명했던 혁명가들 사이에 있던 일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주석을 참고하면 현재와의 연관성을 따지는 일은 요원해 보이지만 소설의 문제 의식은 현재에도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92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거의 100년 뒤에도 흥미진진하게 읽힌다는 사실은 어쩌면 조금 비관적이다. 당시와 지금의 문제가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 삶이 어떠한지 진단하고 무엇을 고민하여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 고려하여 소설을 읽어 보자.

 

소설은 나따샤와, 나따샤의 당원 동지이자 그녀가 존경하는 인물인 세냐의 관계를 다룬다. ‘연애관계라 일축할 수도 있을 둘의 관계를 그리 단언하지 않은 까닭은 연애또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 세냐가 나따샤를 상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은 세냐로 드러나는 당의 남성 영웅이 객체화하는 여성 동지의 위치를 상기시키며, 남성 젠더화 된 혁명적 구호가 이성애적 사랑이라는 기치 아래에 허황된 것임을 폭로한다.

 

나따샤는 세냐를 당의 위대한 동지로서 존경하고 흠모한다. 유부남인 세냐는 처음에는 나따샤와 당원 동지로 인사를 나누지만 나따샤에게 사랑을 느끼고는 그녀와 밀회를 지속한다. 나따샤의 관점을 따르는 이 소설은 비혼주의의 이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정신을 여기저기 흩어 놓거나, 거치적거리는 것에 구애되지 않고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어서 다시 독신녀가 된 것이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했다”(22)든가, (나따샤와, 자신의 남편 세냐의 관계를 모르는) 아뉴따가 자신의 결혼생활과 비교하여 나따샤의 독신 생활을 조롱하는 듯한”(23) 습관을 짜증스럽게 그리는 식이다. 물론 인물 간 기혼/비혼의 기준에서 윤리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 아뉴따에 대한 나따샤의 염증은 기혼 여성에 대하여 애인의 기만적인 시선으로 읽힐 여지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설의 핵심은 이 둘의 대결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초래하는 세냐와 그의 젠더적 인식 구조에 있다. 비혼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인 나따샤는 세냐가 자신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가며 실망하고 분노한다. 그녀에게 연애의 기준은 상대의 혁명적인 삶을 건설하기 위해 머리를 맞댈 수 있는가 하는 동지 의식에 있다. 그런데 세냐는 나따샤를 섹슈얼리티의 기호로 국한시킨다. 세냐에게 나따샤는 공적 영역에서 가지는 자신의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로 여겨진다. 이는 리타 펠스키가 지적하는 것처럼 분열적 근대 주체가 신화화되고 합일된 존재로서 여성을 도피처로 삼으며 발생시키는 젠더의 타자화와 관련되어 있다. 이에 기반하고 있는, 가정이라는 공간에 귀속되어 회귀적이고 안정감을 부여하는 존재의 성질로서 여성성에 대한 이해는 이 소설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나따샤가 가정 속의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냐가 자신의 가정에 그저 연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뿐임을 생각하면 나따샤는 기호화된 안식처-가정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세냐는 이런 인식에 근거하여 나따샤를 혁명을 논하는 동료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이 모든 것이 그녀에 대한 애정과 사랑 때문이라 말하면서 그녀를 자신의 사랑에 복무할 뿐인 부수적인 존재로 격하시킨다.

 

이 과정에서 나따샤가 느끼는 소외감, 사랑하는 이에게 타자화됨으로써 느끼는 절망감, 그리고 그의 가스라이팅을 겪으면서도 쉬이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모든 모습은 사랑을 기준으로 하는 이성애적 관계에서 각 젠더에게 요구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떠오르게 한다.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가스라이팅, 여성성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섹슈얼리티와 결부된 성정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여성-동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포함한다. 이는 사회 담론에 참여하는 여성 존재의 자리가 어떤 방식으로 제한되고 있는지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0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기치가 다름에도, 현재 시점의 데이트 폭력 양상, 여성의 사회 진출과 관련한 유리 천장의 문제, 가스라이팅 등의 젠더 문제를 저 시대의 소설에 겹쳐놓는 것은 가능하다. 이전 시대의 작품을 지금 읽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삶과 연속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콜론타이의 소설을 보며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