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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다시 쓰기와 감정의 실물화 본문
사건 다시 쓰기와 감정의 실물화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정희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8.
선우은실(문학평론가)
종종 사람들에게 무엇을 읽고 있는지 묻는다. 단순히 책의 목록을 늘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을 파악하고자 묻는 것도 아닌데, 왜냐하면 한 권의 책을 추천받아서 그 사람의 전부를 알게 되는 것도 아니기에 그렇다. 제 취향껏 채워 온 책의 목록을 파고들어 확장하는 것도 즐겁지만 타인이 뭘 읽는지 늘 궁금한 이유는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감각을 고양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추천받아 읽는 행위가 일종의 취향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독이나 잡독으로써 얻는 지식의 방대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단 어떤 감각을 활성화하겠느냐는 새로운 신호 체계의 구조화 같은 것이 아닐까.
최근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다. 뒤라스의 책이 이전에도 출간되지 않은 바 아니지만 유독 올해 여름부터 쏟아져 나온다는 인상을 받았던 터라 궁금하기도 했다. 이 책은 근간 발행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 점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소설의 분량은 중편이라 하기에는 좀 짧고 이른바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소설에서 유일한 사건은 한 여성의 죽음을 토대로 연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실성한 듯 웃다울다를 반복하며 그녀의 곁에 있었던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는 것이다. 아이가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에 늘 동행해온 데바레드 부인은 어느 날 레슨 중 우연히 창밖을 통해 이 사건을 간접 경험하고 매번의 레슨 길에 근처 카페에 들러 정체 모를 한 남성과 이 사건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이야기의 재구성은 이 소설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흐름이다. 카페에서 조우한 노동자 남성 쇼뱅과 데바레드 부인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엮여 있는 사이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가 목격한 ‘연인 살해사건’ 장면을 반복적으로 회고하며 각각 연인의 역할에 자신을 집어넣는다. 즉 이 서사는 인물을 배우로 삼은 일종의 역할극이다. 그들은 사건의 당자들이 어떤 사이였을지 상상하고 그들이 어떻게 감정을 키워나가고 또 절망했으며, 어떤 이유로 남자가 여자를 죽이게 되는지까지를 집요하게 구성해나간다.
이 서사의 핵심은 그들이 얼마나 사건을 ‘실제와 동일하게 재현했는가’가 아니라 ‘그들의 재현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이입이 가능한가’다. 단적으로 말해 서사의 구조에 기반한 긴장감의 형성 및 해소가 아닌, 시공간이 고정되어있는 상황에서 인물이 재구성하는 감정의 고저가 중심 줄기가 된다는 의미다. 이 서사를 통해 독자는 인물들이 연인 관계의 심리와 감정을 구현하는 행위에 동참한다. 그런데 감정이나 심리란 분위기나 뉘앙스 등으로 파악하는 것에 가깝기에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이 지점을 누군가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즉 이 소설의 인물이 하나의 역할극을 진행함으로써 구체적인 감정선의 흐름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 때 추상적 감정은 점점 가시화된다. 즉 추상적인 것의 실물화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건과 플롯 중심의 서사와는 달리 한 장면과 감정에 포인트를 맞춰 반복적으로 고쳐쓰기한다는 점에서 이미지즘적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인물의 해석이 곧 재현의 양상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드라마투르기적 참여극이다.
여기서 이 소설이 ‘누보로망(nouveau roman)’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간단히 말해 사실에 대한 재현과 사건 중심의 플롯을 ‘리얼리즘’이라 할 때 그러한 문법을 거부하는 시도가 누보로망이다. 리얼리즘의 문법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서사는 어느 정도 현실 세계를 토대로 하되 자신의 관점을 투영시켜 일정한 문제적 지점을 재구성한 결괏값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 역시 죽음이란 사실(사건)에 대한 재구조화를 시도했다. 단 소설 내부적으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이중의 재구조화를 시도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소설은 좀체 앞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이미 결정되어있는 결말로 향해간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서사적 흐름이 존재함에도) 결정론적이고 폐쇄적으로 느껴진다. 인물들이 같은 사건으로 반복적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같은 정물을 매번 다른 조건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어제와 같은 정물을 본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결정되어있지만, 그 반복적인 행위는 결코 어제의 그것과 동일하다 할 수 없기에 사실상 변화가 끼어든다. 이러한 견고한 골격과 미묘한 흐름 속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순간’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으로, 감정과 심리가 그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독자는 ‘미세한 변화이나 분명히 이전과 같지 않음’을 감지함으로써 감정과 심리란 추상적 대상을 다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룰(handling) 수 있게 된다. 서사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재생과 정지에 직접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읽음으로써 얻는 쾌감이란 분명한 것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감정의 재구조화를 직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변화하는 감각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것에도 있다. 추상적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곤 하는 ‘문학적’이란 표현을 떠올려보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이 구체성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역동성이며 이는 우리가 문학을 읽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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