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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유쾌 상쾌 통쾌한 여성 서사가 선사하는 것 본문
-샬롯 퍼킨스 길먼, 『엄마 실격』, 이은숙 역, 민음사, 2020.
선우은실(문학평론가)
‘여성 서사’가 여성이 쓴 것,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 것, 여성과 관련한 젠더 문제를 다루는 것을 폭넓게 끌어안는 용어라 할 때, 여성 서사는 무엇을 의도하며 독자는 그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현실에 대한 고발 및 비판, 여성으로서 주체성 강조, 여성이 억압받지 않는 유토피아적 세계 묘사, 여성 연대의 가능성 등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크게 ‘현실에 대한 핍진한 재현’과 ‘현실 너머의 미래/전망 타진’으로 구분되는 이러한 태도는 종종 재현과 전망이란 기준 사이에서 오래도록 쟁점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논쟁의 주된 목적은 우위의 창작방법론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러한 서사가 필요한가’를 묻는 것에 있다.
관련하여 『엄마 실격』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 책에는 현실의 문제를 왜곡 없이 보여주려는 여성 서사의 책무를 잊지 않되 젠더 억압의 부조리함을 속 시원히 엎어버리거나 이상적 세계를 꿈꾸는 서사들이 수록돼있다. 특징적인 것은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여성과 그러한 여성을 돕는 여성이 여러 편에 걸쳐 등장한다는 것이다. 재산도 능력도 있는 여성이 고압적이거나 간계를 부리는 남성에 의해 위기에 빠졌다가 다른 똑똑한 여성 혹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 가부장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이는 이야기들(「비즐리 부인의 증서」, 「영문학과 학과장」)이 대표적이며, 유능한 여성들이 합심하여 이상적 도시 공동체를 이룩하는 서사(「벌들처럼bee-wise」)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물론 이러한 여성 형상과 조금 다른 결의 작품도 있다. ‘미친 여자’의 이미지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차용하여 가부장제 안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여성이 얼마나 ‘비현실적 존재’처럼 형상화되는지를 보여주는 「누런 벽지」나,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매독을 숨기고 결혼한 남성이 다음 세대까지 걸쳐 삶을 벌 받는다는 내용의 「오래된 이야기」가 그렇다.
다소 예외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단편을 감안하더라도 다수의 단편에서 똑똑하고 현명한 여성이 등장하거나, 그들에 의해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이야기의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다. 대개의 이야기는 단순히 ‘구원’되는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고 여성은 처음부터 존경받을 만한 재력/능력/재능이 있는 존재였다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아내가 전문가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남편의 천박한 상상력으로 인해 불륜으로 오해받은 여성이 사실은 남편이 존경하고 숭배해 마지않은 미술계의 대가임이 드러나는 「예상치 못한 일」과 같은 소설이 단적인 예다.
이렇듯 능력 있는 여성을 통해 억압적 시선을 반전시키는 서사는 일종의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선사한다. 이는 여성이 이미 충분히 주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 숨겨진 적 없는 ‘진실’이었음에도 누군가에게는 단지 그것을 보고자 하지 않았기에 ‘예상치 못한 일’일 뿐이라는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세련된 방법이다. 이로써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여성을 타자화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돌아간다. 즉 샬롯 퍼킨스 서사의 ‘통쾌함’은 여성을 억압하는 한 남성을 난처하게 만들어서가 아닌, 가부장제 안에서 구축된 여성의 타자화를 목도하면서도 그러한 삶의 지난함에 과도한 이해심을 발휘하는 대신 문제를 발생시킨 이들에게 그 ‘지난한’ 숙제를 돌려줌으로써 발생한다.
‘사이다’ 서사의 또 다른 특징은 여성이 어떤 폭력과 억압적 현실로부터 벗어나려 할 때 여성 정체성을 두고 폄훼하거나 적대하는 과정을 과감하게 축약하거나 생략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재하는 현실적 억압으로부터 발생하는 내면의 고통을 괄호 친다는 점에서 비판될 수 있지만 적어도 겨냥해야 하는 문제의 근원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성과라 할 만하다.
고부 관계를 신선하게 조명한 「발상의 전환」은 이런 성과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줄리아의 육아 방식에 간섭하는 시모와의 신경전으로 시작된다. 이 사이에서 남편 고든스는 둘이 무슨 합의라도 봐서 아이를 잘 돌보라고 다그친다. 줄리아는 결국 아이를 시모에게 맡기는데 이는 줄리아의 패배가 아니다. 줄리아는 아이를 맡기고 “예전처럼 음악 레슨”을 다시 시작해 가내 경제에 기여하며 시모는 그들이 사는 건물에 세를 놓고 다른 입주자의 아이를 봐주면서 여윳돈을 마련한다. 남편이 이 모든 “상황을 알기 전까지는” 그 역시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여기던 일이었다. 요컨대 이 소설의 핵심은 줄리아가 시모와 대립하지 않고 서로 합의점을 찾아내 자신들의 능동성을 드러냄으로써 가부장제의 억압을 꼬집어낸다는 데 있다.
서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줄리아와 시모는 서로의 ‘여성-됨’을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적여’를 택하는 대신 ‘남편이 원하는 대로’ 관계를 회복시키며 각각의 주체성도 훼손하지 않는다. 이는 고부 갈등이 표면적으로는 여성 간 갈등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부장제 중심 공동체 안에서 남성 구성원이 여성을 ‘가정의 존재’로 규정하려는 맥락에서 발생하는 젠더 억압적 갈등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러니 이 소설은 끝내 가부장제에 헌신하는 여성을 그린 것이 아니라 고든스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의 우매함을 폭로함으로써 ‘속 시원함’을 선사한다.
현실의 억압을 마주보려는 인간은 그 억압을 뛰어넘기 위함에도 불구하고 현실 직시의 과정에서 황폐해지거나 훼손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현실’로서 유쾌한 서사가 소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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