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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부평지역 일본 육군 조병창, 그 역사적 의미 본문
부평지역 일본 육군 조병창, 그 역사적 의미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김은진
1938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서 한반도를 주목하고, 대규모 도시계획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이때 ‘부평’은 서울과 경기, 인천을 잇는 ‘대권역(大圈域’)을 형성하기 위한 필수 도시로 언급되었다. 1940년 1월 19일에는 ‘경인시가지계획’이 발표되어 부평지구에 공업 용지가 설정되었다. 사람들은 공장들이 진출하는 광경을 보면서 부평평야를 ‘공업왕국’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부평 공업지대는 일제의 의도를 따라 ‘군수 공업’ 지대가 되었다.
조병창은 일본 육군이 직접 운영한 무기제조소로, 부평 군수 공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본군 제20사단이 관리했던 부평연습장(富平練習帳) 자리를 중심으로 약 33만평의 토지를 매수하여 설립한 것이었다. 1941년 5월 5일에는 총검공장과 ‘견습공 연습공장’을 우선 완공하여 조병창 개창식을 열고, 본격적으로 전쟁 무기를 생산하고자 했다. 조병창에서는 매달 소총 4천정, 총검 2만개, 소총탄환 70만발, 군도 2만개 등 상당수의 무기를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잠수정을 제작하기 위한 부품까지도 제작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병창에서 만들어졌던 총검의 수량은 당시 일본에서 생산된 30년 식 총검 수량의 5%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병창을 건설하고 군수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많은 희생을 겪어야만 했다. 1940년 6월에는 김포와 강화 등 주변지역에서 근로보국대를 징발하여 건설 공사에 동원했다. 특히 김포에서는 1940년 6월부터 1941년 10월까지 약 15개월의 기간 동안 매달 100명의 청장년들이 노무에 시달려야 했다. 무기 제조 동원자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그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고 태업, 사칙 위반 등으로 감봉되거나 경찰에 넘겨졌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안전교육을 받지 못해 기계에 팔이 절단 되는 등 부상을 입어 조병창 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부평 조병창은 해방이후에도 미군의 캠프마켓으로 이용되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조병창 병원으로 알려진 주요 건물이 철거될 위기 속에 있다. 또한 조병창에 동원된 노무자들을 수용했던 조병창 노무자주택 역시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되어 2022년이면 철거될 예정이다.
개발의 관점에서 보면 조병창은 ‘그저 낡고 위험한 건물군’에 불과하겠지만 역사적 의미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일제의 폭력이 가장 극심했던 전시체제기 동원의 증거라는 점이다. 부평 조병창의 동원 대상자에 대해서는 일본 측 기록이 거의 없다. 구술 자료를 통해 동원 대상의 수를 파악해 보면 3천 명에서 2만 명까지 다양하다. 다만 『유수명부(留守名簿)』, 『임시군인군속계(臨時軍人軍屬屆)』 등의 자료를 종합하고 기록을 누락한 수치를 고려하면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신고된 동원자는 2012년 기준 140명에 이른다.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따라서 조병창은 아직까지도 식민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게 전시체제기 동원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조병창 병원은 동원으로 인해 노무자들이 겪었던 신체적 피해를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평을 제외한 일제강점기 조병창은 대부분 철거되었기에 부평 조병창의 역사적 중요성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국내를 제외한 해외 식민지에 조병창을 설립한 경우는 단 2곳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부평 조병창은 미군기지로 활용되면서 당시 조병창의 원형을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사가미 조병창의 경우에도 미군기지로 쓰여 현재까지 남아있긴 하지만 미군이 여전히 주둔하고 있어 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부평 조병창의 경우 기지를 환수 받아 조사를 진행할 수 있다.
세 번째, 부평 조병창과 부평에 남아있는 식민지 유적들은 일본이 부평을 병참 기지로 만들고자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 시 상황보고, 육군 조병창’이라는 일본군 극비문서에는 부평 조병창을 지화화 하는 계획이 기재되어 있다. 이 문서가 발견되면서 부평의 함봉산 제6호 지하호 토굴과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병창은 식민지 동원의 공간이면서도 독립운동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1942년에는 오순환, 김군희 등이 비밀 결사조직인 창천체육회와 조기회를 결성하고 조선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조병창의 무기제조법을 빼내고자 했다. 1943년에는 고려재건당이 조병창 내에 조직되어 그 일원인 황장연이 조병창의 무기를 임시정부에 제공하고자 했다. 이들은 모두 일제에게 체포된 후 징역을 살았다.
해방 직후 일본군은 조병창의 무기, 재료, 자료를 파괴 혹은 소각하였기에 부평 조병창 연구는 오히려 동원된 사람들의 구술을 많이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부평 조병창 건축물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연구자에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조병창이지만, 이곳은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놓여 있다. 지역사회와 국가 차원에서도 부평 조병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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