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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사설

사람이 상징이 될 때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6. 3. 23:20

() 노회찬 의원의 1주기 즈음이었다. 최근에도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강연을 듣는 청중도 시민운동가와 노조 활동가가 꽤 많았다. 자연스럽게 현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되었는데, 강연자는 노회찬 씨의 죽음은 그 사람의 죽음 자체로 슬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대리해주던 한 상징적 존재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괴롭다는 말을 건넸다. ()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제도권 정치에 들어선 이후의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했든 지지하지 않았든 진보 정치의 거대한 상징이 사라진 것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소회를 전했다. 그곳에 모인 이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던 나로서는, 강연자의 발언과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며 그들의 심정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 대선 국면에서도 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 페미니스트 세대 중 가장 대표적인 정치인인 신지예 씨가 국민의힘에 영입되었다는 소식을 전격적으로 발표했을 때였다. 당 대표와 대선 후보가 공공연하게 구조적 성차별의 존재를 부정하고 대선 공약이 여성가족부 폐지인 정당에 들어간 후 신지예 씨가 보인 () 페미니즘적행보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신지예 씨가 가진 상징성과 정치적 힘은 그녀 혼자서 일군 것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며 함께 여성 운동을 꾸려온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에도 그 영향력을 신지예 씨는 사적인 것으로 전유해버렸다는 지적이었다. 신지예 씨의 국힘 합류 결정에서 느낀 황망함과 배반감의 이유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한 글이었기에 두고두고 되씹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지적이 매우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어디에 쓸지에 대한 선택은 결국 신지예 씨 개인의 몫이 아닐까. 우리는 그녀에게 제공했던 지지를 거둬들일 수는 있지만, 그녀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신지예 씨가 국힘에 들어갔을 땐 놀랐고, 진보적 학생운동 단체를 자임하던 모 단체가 윤석열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을 땐 화가 났다. 사설에서 공개적으로 애도를 표하기도 했던 고() 김기홍 씨가 성폭력 가해자였음을 알린 녹색당의 입장문을 보았을 때는 괴로웠다. 이번 대선에서 드디어 20·30 여성의 표심이 정치권에서 주목받을 수 있어 기뻐했더니, 그들이 돌연 개딸(개혁의 딸)’을 자임하며 거대 정당의 가부장적 서사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을 때는 상심했다. 개딸들이 박지현 비대위원장을 가장 앞장서 비판하는 지경에 와서는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누군가 상징이 될 때,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신념마저 내맡길 때 우리는 어디까지 맹목적이게 되는가. 타인의 삶이 자신의 기대를 저버릴 때 우리는 있는 힘껏 그 모든 사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매섭게 그 사람을 비난하며 나의 자아로부터 분리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힘겹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끝내 가닿을 수 없을 타인과의 간격을 인정하고 자신의 길은 직접 걸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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