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 518광주민주화운동 #임을위한행진곡
- 수료연구생제도 #고려대학교대학원신문사 #n번방 #코로나19
- 항구의사랑
- 고려대학교언론학과 #언론학박사논문 #언론인의정체성변화
- 미니픽션 #한 사람 #심아진 #유지안
- 한상원
- 시대의어둠을넘어
- 권여선 #선우은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
- 김민조 #기록의 기술 #세월호 #0set Project
- 쿰벵
- 5.18 #광주항쟁 #기억 #역사연구
- 국가란 무엇인가 #광주518 #세월호 #코로나19
- 심아진 #도깨비 #미니픽션 #유지안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로나 콜른타이 #위대한 사랑 #콜른타이의 위대한 사랑
- 애도의애도를위하여 #진태원
- 고려대학교대학원신문사
- 쿰벵 #총선
- 공공보건의료 #코로나19
- BK21 #4차BK21
- 임계장 #노동법 #갑질
- 보건의료
- 죽음을넘어
- 코로나19 #
- 선우은실
- n번방
-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염동규 #자본주의
- 산업재해 #코로나시국
- Today
- Total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거제도 이야기 본문
거제도 이야기
나의 고향 거제는 지금은 관광지로 꽤 유명해졌지만,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거제가 어디인지 모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라 ‘부산 옆에 있는 바닷가 도시’라는 말을 으레 덧붙이곤 했다. 그러고 나면 친구들은 섬에는 배를 타고 들어가느냐, 거제에 CGV는 있느냐는 바보같은 농담을 건네곤 했다. 사실 친구들의 물음이 썩 틀린 것은 아닌 게, 1970년대 대우조선이 거제에 들어오기 전까지 거제도는 인구 9만가량의 거제군(郡)이었고, 주변에는 논과 밭, 바다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 거제고등학교에 부임한 젊은 선생님들이 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야반도주하는 경우가 많아서 매일 밤 교장 선생님이 항구를 지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1971년 거제도와 내륙을 잇는 거제대교가 처음 세워졌고 이전까지는 배 타고 들어가는 곳이 맞았다).
그런데 1970년대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이 연달아 거제에 설립되면서 몇 년 새에 엄청난 수의 인구가 유입되었고, 1990년대에는 거제군보다 더 규모가 컸던 장승포시와 통합하면서 시(市)로 승격했을 뿐 아니라 이름까지 ‘거제’로 가져가게 된 것이다. 그 후 우리는 바다에 떠있는 몇 개의 건물을 합친 것보다 큰 배를 보며 등교하였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조선소에서 누군가 골리앗 크레인에 깔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곤 했다.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 조사를 할 때 선생님이 처음 하시는 말씀은 항상 “부모님이 대우조선, 삼성조선 다니는 친구들 빼고 손들어”였다. 그러면 40명가량 되는 반에서 손을 드는 친구들이 10명도 채 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고3 입시 기간에 힘들 때면 “야, 대학 못 가면 그냥 대우나 삼성 가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농반진반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조선소에 입사하는 것도 하나의 현실적인 선택지로 고려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최후의 보루가 대기업 입사라고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실제로 조선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마이스터고(거제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조선업에 종사하는 친구가 몇이나 있을까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전혀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계속 조선소에 다니시는 친구들은 아직 많지만, 자식 세대는 대부분 서울이나 부산으로 대학을 가서 그곳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은 데다가 거제에 남은, 혹은 거제로 돌아온 친구들도 하나같이 조선업과는 전혀 무관한 직업을 갖는다.
2016년 즈음 거제의 양대 조선소가 대대적인 불황을 겪으면서 인력 감축과 임금 삭감이 이뤄졌고 경기 침체로 시내 분위기가 살풍경으로 변하기도 했지만 2020년대 들어 조선업은 다시 호황기에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한번 내려간 임금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고, 하청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각하다. 힘들고 위험한 데다가 전문 기술이 필요한 조선소 용접사의 시급은 최저임금인 9160원에서 전혀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려 15년 차 반장의 시급이 10600원이라고 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정직원으로 입사한 아버지들은 다행히 대부분 조선소에 남아 계시지만(조선소에 어머니들이 일할 자리는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자식 세대는 구태여 조선소에 입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동네 강아지도 만 원짜리 한 장씩은 다 물고 다닌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진심으로 일하고 싶었던 노동자들의 꿈이 짓밟혔던 시간>, 월간조선 뉴스룸, 2022년 9월호) 화려한 시절을 보낸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 오월의봄, 2019) 거제가 이제는 ‘용접 노예’의 도시로 불리는 지금, 대우조선 하청노조 파업이 과연 조선소에 거액의 손해를 입혔는지 혹은 새바람을 불러온 것인지는 곰곰이 따져봐야 할 일이다.
'7면 > 사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0) | 2022.11.05 |
---|---|
그럼에도 모든 것은 변한다. (0) | 2022.10.08 |
사람이 상징이 될 때 (0) | 2022.06.03 |
‘낙태죄 헌법 불합치’ 3년에 부쳐 (0) | 2022.05.04 |
다시 한번, 버스를 타자! (0) | 2022.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