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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역사전쟁과 민족주의를 넘어 동아시아 공동체는 가능할까? 본문
역사전쟁과 민족주의를 넘어 동아시아 공동체는 가능할까?
지난 10월 21일,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이 주최하는 제10회 동아시아공동체 포럼이 ‘역사전쟁과 민족주의를 넘어, 동아시아 공동체는 가능할까?’를 주제로 개최되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더욱 부각된 동아시아 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며, 특히 과거사와 민족주의의 문제를 넘어 진정한 협력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였다. 본 학술대회는 칭화대학 글로벌공동발전연구원과 와세다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과에서 공동주최하였으며, 당일 행사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제1세션은 ‘코로나 사태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 현안: 역사전쟁, 영토문제’, 제2세션은 ‘코로나 사태 이후의 동북아 민족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그리고 제3세션은 ‘코로나 사태 이후의 동북아 공동체의 향방: 역사공동체,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라는 주제로 각각 3명의 발표가 이어졌다. 이에 본지에서는 주목할 만한 연구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징용자 문제 해법과 한일 역사 화해
한·일 과거사 문제는 오랫동안 풀리지 못한 채 이어져 왔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일 관계를 풀어나갈 새로운 방침에 이목이 쏠렸다. 이에 박홍규는 오랜 한·일 과거사 갈등의 주요 문제를 살펴보며 그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시도한다.
그동안 한·일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화해의 모색은 ‘책임론적 화해’에 근거하여 이루어져 왔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 간의 화해를 위한 이론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죄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 용서, 그리고 죄인의 시정 노력이라는 기독교적 화해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어 일본의 세계관과 문화에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발표자는 화해를 위한 철학적 토대로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부각하는 책임론적 화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포용론적 화해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첫걸음은 일제 지배가 남긴 정신적 트라우마, 혹은 1945년 이전과 이후의 일본을 동일시하거나 친일과 애국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일본을 절대적으로 불신하고 적대시하는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특히 식민지배와는 별
개로, 한국이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글로벌 중추 국가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일본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처럼 사죄와 용서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을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 속에 있는 다양한 층위를 파악해야 한다. 예컨대 피해자 개념에는 피해 당사자, 피해자 지원단체, 피해 국민, 피해국 등 결을 달리하는 여러 층위가 존재하며, 이것이 상속과 결부될 때 또 다른 양상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을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피해자 쪽’과 ‘가해자 쪽’의 관계를 설정하여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포용론적 화해론이다.
박홍규는 특히 한·일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피해자 쪽의 분노, 즉 파생적 분노가 커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해자 쪽의 노력이 미진하다는 생각과 그 노력의 진정성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가해자 쪽을 더욱 추궁하게 되고(반일), 이는 다시 가해자 쪽의 반발을 불러일으켜(혐한) 또다시 피해자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악순환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파생적 분노는 민족주의, 국민 정서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면서 더욱 증폭되어왔다. 따라서 파생적 분노의 문제를 해결할 책임은 단순히 가해자에게만 전가될 수 없으며, 피해 당사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만으로 파생적 분노를 해소할 수도 없다. 결국 발표자는 파생적 분노는 책임론적 화해가 아니라, 포용론적 화해의 토대에서 일방적 책임 추궁에서 벗어나 상대를 포용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으로서 발표자는 대법원 판결과 이른바 ‘현금화의 덫’을 살펴본다. 지난 2018년, 대법원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근거하여 원고가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으로 징용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국제법 위반이라고 반발했고, 피고인 일본 기업은 판결 이행을 거부했다. 그러자 원고 측은 판결의 강제 집행을 위해 피고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현금화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에 윤석열 정부는 2022년 5월에 출범한 이후로 한·일 관계 개선을 주요 목표로 삼아, 징용자 문제에 대한 해법을 공개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지난 7월에 민관협의회를 가동했다. 협의회에서 주로 불거졌던 것은 제3자가 피고 기업을 대신해 채무를 변제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였다. 그러나 총 4차에 걸쳐 협의회가 열렸음에도 이에 대한 한국 외교부, 원고, 피고 기업, 그리고 일본 정부 간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 채 가동한 지 두 달 만에 민관협의회는 막을 내렸다. 이후 윤석열 정부는 결국 피해자 쪽을 설득하기보다는 일본을 설득하여 양보를 얻어내기로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현재 일본 앞에 놓인 두 선택지는 기존의 이익과 입장을 접고 피해자 쪽의 고통을 진심으로 들어주며 징용자 문제를 수습하거나, 계속해서 이를 묵인하고 거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거사 문제와 ‘현금화의 덫’에 대한 해법으로서 발표자는 2005년 노무현 정부의 ‘한·일회담 문서 공개 후속 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개최’ 방침에 주목한다. 이에 따르면 위안부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지만, 반면에 정치 협상을 통해 총액 결정 방식으로 수령한 무상 3억 달러에는 강제동원 피해 보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성격의 자금이 포함되어 있다. 즉, 정부는 무상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을 선례로 삼아, 발표자는 현금화를 시행하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내려진다면 경매로 나온 피고 기업의 자산을 정부 예산으로 매수하고, 현금화된 금액이 판결 금액보다 적을 경우 정부 예산으로 보충하여 원고에게 지불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이로써 도의적·원호적 차원에서 국민 통합을 위한 피해자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청구권 협정을 인정하고 국제법을 준수하라는 일본의 요청에도 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역사 화해의 차원에서 여야합의로 추진하여 특별법을 제정하고 재단을 신설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이처럼 발표자는 포용론적 화해론이라는 새로운 철학적 토대 위에 ‘현금화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통해 한·일 양국이 과거사의 갈등을 딛고 평화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빛의 역사와 어둠의 기억 : 세계문화유산 미이케 탄광의 ‘부(負)의 유산’을 둘러싸고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은 총 8개 현, 그리고 23개에 이르는 자산으로 구성되어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논의와 논란이 일었지만, 대개 강제동원이 본격화되는 1940년대의 제국주의와 이민족 차별 등의 문제만 부각하며 ‘산업혁명 유산’ 내러티브 자체의 문제점들과 이를 바라보는 일본 사회 내부의 다양한 시각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제약되었다. 따라서 이영진은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을 둘러싼 시·공간적 이해를 확장할 수 있는 사례로서 미쓰이(三井) 미이케 탄광(三池炭鉱)에 주목한다.
먼저 ‘유산화(heritagization)’란, 어떤 대상이나 장소가 사회·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유지해 가는 사회적 과정이다. 따라서 특정 사물이나 장소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이를 바라보는 관계자나 지역 주민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발표자는 특히 미이케 탄광에서 발견되는 근대화 초기 탄광의 비참한 노동의 역사로부터 전후 석탄산업의 쇠퇴와 맞물려 발생했던 여러 갈등까지 포괄하여 그 전체적인 상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메이지 시기에 한정해서 초기 산업화의 빛나는 역사를 그려내는 기획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강조하는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음을 지적한다. 즉, 미이케 탄광을 통해 다양한 역사적 기억들을 근대 국가의 영광이라는 단일한 기억으로 고정하고자 하는 권력의 의도, 그리고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후쿠오카 현 오무타(大牟田)시와 구마모토 현 아라오(荒尾)시에 걸쳐 있는 미이케 탄광은 일본의 근대화를 견인했던 주요 에너지원인 석탄 산지로서 메이지 시기부터 석탄 채굴이 시작되었지만, 지금은폐허로 남아있다. 이 탄광을 문화유산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생겨난 것은, 일본에서 시도하고자 했던 일련의 테마파크 사업의 쓰라린 실패와 1990년대 문화청 주도로 이루어진 근대유산 조사사업 덕분이었다. 그 일환으로 ‘오무타·아라오 탄광의 마을 팬클럽’이 발족하였는데, 이를 통해 주민들의 일상적 기억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건축물이나 경관을 지역사회에 있어 가치 있는 것으로 유산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또한, 오무타 시에서 추진했던 ‘소리의 박물관’ 사업을 통해 미이케 탄광에 얽힌 여러 주요 사건들에 대해 지역 주민들이나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여 <미이케, 끝나지 않은 탄광의 이야기>(2005)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로써 미이케 탄광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과정에서 지역사회가 애초에 의도했던 정체성의 문제보다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이라는 국가 주도 근대화를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로 변화해 갔다. 이를 통해 미이케 탄광은 현재에 대한 불안이나 불만, 그리고 공포를 강하게 느끼는 일본 사회에서 쇼와(昭和)로 상징되는 전후의 풍요,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메이지 일본의 신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노스탤지어는 상기되는 과거의 다양한 기억들, 특히 고통과 아픔, 혹은 죄의식의 기억을 소거해버린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에 발표자는 빛나는 근대화의 유산의 그늘에 소거된 미이케 탄광의 두 가지 기억을 추적한다. 첫 사건은 미이케 쟁의로, 1959년 12월, 경영합리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미쓰이 회사 측이 제시한 대규모 인원 삭감안(1492명 퇴직 권고안)에 대해 노동조합(미쓰이 노조) 측이 반발하며 시작되었다. 이는 1년에 걸쳐 전개된 전후 일본 최대의 노동 쟁의로서, 전후 일본의 중요한 기억의 장소이자 미이케 탄광 지역 주민들의 집합적 기억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쟁의는 결국 미이케 노조가 구 노조와 신 노조로 분열되면서 노조의 패배와 공장 폐쇄 해제로써 일단락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지역사회 공동체 기반을 붕괴시켰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또한, 이때 생겨난 감정의 골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미이케 탄광의 문화유산화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당시 마지막까지 회사에 저항했던 탓에 쟁의가 종결된 이후 복직하면서 유무형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구 노조 측은 관 주도로 진행되는 세계유산화의 방식이 탄광의 어두운 이면에는 주목하지 않는다며 유산화 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신 노조 및 직원조합원들은 평생 자신이 일했던 곳으로서 미이케 탄광을 인식하고 있어, 직접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했던 바로 그 시설, 그리고 그것과 이어져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구체적인 형태로 후세에 남기고자 전반적으로 유산화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두 번째 사건은 전후 일본에서 발생했던 최대 산업 재해였던 1963년 탄진 폭발사고이다. 사고 후에도 수많은 노동자가 일산화탄소 중독과 여러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사후 대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회사 측과 유족들 사이에서는 수십 년에 걸친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기도 했다. 또한, 소송의 여파로 회사 측이 탄광 규모를 점차 축소해가야만 했고, 결국 1997년에는 미이케 탄광을 완전히 폐산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이 사고는 현재 미이케라는 기억의 장을 형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건의 원인을 둘러싸고 연결기 고장으로 인해 발생했던 예견 불가능한 우연의 사고였다는 신 노조와 직원조합의 입장, 그리고 단순 우연이 아닌 전형적인 인재(人災)로 간주하는 구 노조 사이의 입장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구 노조 측은 미이케 쟁의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노조의 철저한 관리와 광산보안법으로 인해 작업장의 안전을 잘 지켜왔으나, 쟁의 이후 더 이상 노조의 압력을 받지 않게 된 회사 측의 무책임한 경영 방침과 안전 보장을 무시하고 효율만을 중시한 무리한 증산 체제의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주장해왔다. 이는 이후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기억 실천에서의 차이로도 이어졌다. 사고 직후 신 노조와 구 노조는 별도 장소에 각각 위령비를 건립해 매년 추도식을 거행하는데, 전자는 통상적인 추모제를, 후자는 추도식과 항의 집회를 지내왔다. 이와 더불어 사고 생존자 중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었던 이들은 피해보상 소송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하게 되었지만, 결국 회사 책임을 묻지도, 기대에 부응하는 피해 보상액을 받지도 못했다. 또 피해 등급에 따른 보상의 원칙이 적용되면서 같은 피해자들끼리도 분열되었고, 이는 결국 공동체 자체를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문화유산은 개별 사자(死者)를 기억하는 장치를 전제하지 않으며, 사고의 책임이나 보상을 둘러싼 싸움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은 한층 어려워졌다.
결국, 미이케는 근대 일본, 그리고 전후 재건 및 부흥에 이르기까지 피와 땀을 흘려야만 했던 수많은 민중이 경험했던 일본 근대화 역사의 산증인이다. 하지만 그 역사는 이렇듯 화려하고 빛나는 역사가 아니라, 개발 초기부터 시작된 일본·조선·중국인들에 대한 강제 노동과 차별의 역사, 그리고 전후에는 무수히 많은 피해자를 낳았던 미이케 쟁의와 탄진 폭발사고의 역사, 그리고 이어지는 후유증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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