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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냉전시기 내부안보와 대반란전 본문
지난달 4일, 한국 냉전학회와 강원대학교 통일강원연구원에서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냉전시기 내부안보와 대반란전”이 개최되었다. 이날 제1부는 냉전시기 한국, 그리스,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전개되었던 내부 안보와 대반란전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고, 2부에서는 신간 『냉전과 새마을』에 대한 저작토론회가 진행되었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날 진행되었던 발표 중 2편을 뽑아 소개하고자 한다.
1960~70년대 한국의 시위 진압과 미 대내안보 대반란전 정책의 연쇄
미국 케네디 정부 시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반란전이란 “반란을 무찌르고 봉쇄하며, 동시에 그 근본 원인을 처리하기 위한 민·군의 포괄적 노력”을 의미하며, 냉전 시기에 대내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었다. 미국은 주로 인도차이나반도와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현지 군과 경찰에 대반란전 수행을 위한 각종 물질적·기술적 지원을 제공하였는데, 여기에는 대게릴라전에 국한되지 않는 군중 통제와 시위 진압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한국 역시 이러한 미국의 대반란전 인식과 정책과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예컨대 제3국 군 장교들을 초청하여 교육하던 미 특수전센터에서 대반란전 교육과정을 이수한 1959년 제1기 유학생 중에는 당시 한국의 제1공수단 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이영진이 포함되는 등 한국은 미 대반란전 정책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발표자 권혁은은 미국의 대반란전 정책과 박정희 정권기 시위 진압 간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시도한다.
미국의 공식적인 제3세계 대내안보원조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른바 ‘제3세계’와 비동맹운동의 등장, 소련의 평화공존 노선과 저개발국에 대한 경제·군사원조 제공 등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증대시켜, 공산주의에 취약한 국가에서는 전복과 반란의 위협을 높일 수도 있다고 인식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내 안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예방하고 통제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간첩과 그의 동료, 전위 조직 및 공산주의적 성향의 인물과 단체를 탐지하고 그에 대한 사법적 절차를 실행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경찰기구의 역할이 대두되었다. 이에 1956년 하반기부터 미국은 대외경찰원조를 공식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베트남, 그리스, 과테말라 등 이러한 미국의 경찰원조가 최초로 공여(供與)된 8개국 중 하나였다. 사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사회는 ‘전복 위협이 봉쇄되었으나 감시가 필요한’ 그룹으로서 전복 및 반란에 대한 위험도는 가장 하위 등급으로 분류되었지만, 한국전쟁기부터 주한미군사고문단(KMAG), 그리고 휴전 이후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에 의해 경찰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기존 원조기구를 대체하는 차원의 원조계획이 권고되었다. 이에 따라 소규모 공안고문단과 경찰원조 물자 도입, 연간 5명 내외의 경찰관 도미 유학 등이 추진되었다. 이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한국경찰현대화 계획’이었는데, 여기에는 경찰의 통신, 차량, 병원 등 물자와 권총, 소총, 최루탄 등 다양한 무기가 포함되었다. 이때 한국에 최루탄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눈에 박힌 최루탄이 바로 이러한 원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써 촉발된 4월 혁명에서 시위대에 대한 유혈 진압은 이승만 정부의 붕괴로 이어졌고, 이후 발포 책임자와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리와 인적 숙청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실탄을 사용한 시위 진압은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특히 4월 혁명 이후 대중운동이 고양되면서 장면 정권은 반공 공세와 한국군 및 경찰의 시위 진압을 강화했는데, 이를 지지했던 미국 역시 군과 경찰에 대한 시위 진압 훈련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에서 파견되었던 공안고문들은 경찰로 하여 실탄을 사용하는 ‘야만적인’ 방법이 아니라 최루탄과 곤봉을 사용한 ‘근대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미국식 시위 진압 방식을 도모하고자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때 가장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던 부대들은 이내 5·16쿠데타의 주도세력으로 참여했는데, 이들은 쿠데타 이후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에서 벗어난 수도방위사령부를 구성하면서 박정희 정권기 군의 시위 진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케네디 행정부의 등장은 대반란전의 본격화와 경찰원조의 강화로 이어졌지만, 오히려 미국의 대한경찰원조는 5·16쿠데타 이후 단계적 축소 절차를 밟아 1962년 이후에는 무기 정지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쿠데타 직후 계엄령이 선포된 데다 각급 경찰기구를 군이 장악했기 때문에 민정 경찰 지원이 주를 이루었던 원조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박정희 정권 내 경찰의 대내 안보 활동, 특히 시위 진압 활동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국과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의 대내 안정과 한일협정 체결, 베트남전 수행이라는 특정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루탄을 공급하는 등 계속해서 박정희 정권의 시위 진압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한편으로는 경찰이나 군의 유혈진압으로 인한 박정희 정부의 붕괴나 미국의 책임이 불거질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대내 안보 차원에서 한국 정부의 시위 진압에 대한 지원을 이어갔다.
한편,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특수부를 침투시킨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미국의 대한군사·경찰원조정책에서는 대반란전의 성격이 강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미 베트남전에서 대반란전을 경험한 바 있던 한국 정부는 일련의 상황을 통해 대간첩작전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1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와 ‘대침투/대간첩 필요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3,230만 달러의 물자를 받게 되었다. 비록 기타 군사원조와 비교했을 때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이를 통해 특전사와 전투경찰대 등의 대간첩작전 부대들이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정부의 시위 진압 역량 자연스럽게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후 북한의 대남 침투가 감소하면서 간첩 침투에 대응하기 위해 확대되었던 부대들은 1970년대에 들어 시위 진압 부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는 유신체제라는 초유의 정세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에서 애초부터 대반란전의 범위가 모호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미국의 대반란전 정책과 한국의 대반란전이 처음부터 민주화운동 억압을 목표하거나 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은 해방 이후부터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고, 전쟁 이후 미 대한정책의 목표는 언제나 한국의 정치·사회·경제적 안정이었던 만큼 4월 혁명 이래 미국은 언제나 한국의 ‘대내안보’를 위해 정부의 시위 진압을 지원해갔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영향력은 단순히 특수전 부대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경찰·군 등 억압적 국가기구 전반에 이르렀다. 이처럼 미국으로부터 제공된 군과 경찰에 대한 각종 원조로 인해 외부의 침투에 대응하는 한국 군·경찰의 능력이 높아졌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을 향한 물리력 역시 증대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콘도르 체제: 남아메리카 8개국의 합동 대반란전
1960년대 초, 아메리카 전역의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 요소는 외부의 공격자에서 내부의 반란자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1960~70년대 사이에 아르헨티나, 칠레, 과테말라, 페루, 브라질 등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는 군의 새로운 역할을 표방하는 군부 독재가 등장했고, 이들은 ‘내부의 적’을 겨냥한 전략으로서 큰 저항을 초래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반대파를 억제하려는 ‘저강도 분쟁’으로서 대반란전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1975년 11월부터 남아메리카 군부 독재 정권들이 공동으로 추진되었던 것이 바로 ‘콘도르 작전(Operación Condor)’이었다. 좌파의 위협에 맞서 ‘그리스도교적 문명’을 방어하고 냉전에서 승리하겠다는 명분 아래 라틴아메리카의 군부 통치자들은 소련과 쿠바 등 적대국의 사주를 받아 체제 전복을 노리는 ‘불순분자’와 정치적 반대파를 조직적으로 탄압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상호 간에 정보 공유와 감시·고문·살해를 이행할 수 있는 체계로서 콘도르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이에 발표자 박구병은 콘도르 작전의 내용과 목표를 통해 이러한 콘도르 체제가 여타 국가 폭력과 구별되는 점을 구명하고자 시도한다.
먼저, 정치적 반대파 탄압을 위한 국제적 공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칠레였다. 이러한 공조은 1973년 9월, 세계 최초로 민주적 선거로 수립되었던 사회주의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권을 무너뜨렸던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권력을 장악한 시점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수립된 새 정부가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을 우려했던 칠레는 비슷한 상황에 당면했던 아르헨티나에게 ‘국제 마르크스주의 캠페인’에 맞서는 정보 공유, 감시 공조 등의 협력을 제안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옌데 정부 아래 3년간 칠레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프라츠(Carlos Prats)가 주목된다. 칠레 군사평의회는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고 있던 프라츠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한 준군사단체, 연방경찰 대외협력부 그리고 미국인 요원 등과 함께 공조하여 프라츠를 감시하고 이내 집에 잠입해 자동차 차체에 폭탄을 설치하여 프라츠 부부를 끔찍하게 살해했다. 이후 1974년 봄, 피노체트는 브라질, 볼리비아, 파라과이를 순방하며 남아메리카 군부 정권들과 ‘반공의 축’을 확립하고자 했다. 곧이어 1975년 11월, 칠레 국가정보국을 주축으로 남아메리카 국가 정보기관과 비밀경찰 책임자들이 산티아고에서 모였는데, 그 주된 의제는 각국 비밀경찰 간의 상호 협력과 정보 수집·교환을 확대하여 파괴·전복 활동에 대한 대응을 전담하는 새로운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주최국인 칠레의 국조(國鳥)인 독수리(Condor)의 이름을 따 ‘콘도르 작전’으로 명명된 이 공조체계는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 망명을 떠났던 다수의 ‘불순분자’까지도 비밀리에 통제하고자 했고, 이내 에콰도르, 페루 등이 가입하며 1978년에는 회원국이 8개국으로 늘었다. 결국, 콘도르 체제는 새로운 조직의 창설이었다기보다, 그 이전부터 수행되고 있었던 공작들의 공식화, 즉 원형 조직이 제도화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미국의 역할이다. 각종 정보 보고에 따르면 미국이 칠레의 국제적 암살 시도에 직접 연루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CIA를 비롯한 정보 공동체는 남아메리카 지역의 정보기관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추적·감시하고 일부의 경우 그들을 살해하고자 상호 협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2000년 9월, CIA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칠레 전 국가정보국장 콘트레라스(Manuel Contreras)가 1974년부터 1977년까지 “CIA의 협력자이자 정보 제공자”로서 그 대가로 불특정 금액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CIA와 미군 정보기관이 콘도르 작전의 비밀스러운 후원자였다는 의혹에 무게가 더욱 실리게 되었다. 또한, 미국은 오래전부터 아메리카 학교(School of the Americas, 이하 SOA)나 워싱턴 DC의 미주국방대학에 여러 국가의 영관급 장교들을 입교시켜 과정을 이수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이 과정을 수료했던 이들은 이후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 각지에서 용공(容共) 혐의를 받거나 공산주의의 침투에 취약하다고 인식된 입헌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힘을 보탰다. 이러한 시도는 1960년대, CIA가 베트콩의 민간인 동조자들을 대상으로 암살, 테러, 심리전을 펼치는 대반란전 프로그램이었던 피닉스 작전(Operation Phoenix)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결국 SOA의 훈련생들을 미국식 민주주의적 가치와 윤리에 노출시킨다는 목표와 달리 실제로는 대반란전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콘도르 작전의 피해자 규모와 콘도르 체계의 해체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지만, 현재까지 파악된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자들은 콘도르 작전의 희생자 수를 최소 수천 명에서 피살 5만 명, 실종 3만 명, 투옥 40만 명까지로 추정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콘도르 작전으로 인해 회원국들의 무장 저항 단체 조직원을 넘어 군 장교, 의원, 전직 장관, 예술가, 대중 활동가, 노조 지도자, 학생 등 다양한 피해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분자’로 지목되었던 이들은 대체로 정치적 좌파 또는 급진적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 그리고 인권 활동가와 진보적 성향의 교회 단체, 제3세계 연대 단체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남아메리카 군부 독재 체제의 ‘국가안보론’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의 급진 세력까지 박멸해야 한다는 의식이 군의 직접적 전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 역시 냉전 시기에 각국의 민족주의적·포퓰리스트 정치 세력들이 미국과 이해관계와 충돌할 경우, 이들을 소련의 대리인으로 치부하며 적대시했다. 즉,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 쿠바, 브라질, 칠레, 니카라과의 맥락에서 그런 움직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한결같이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공작이나 소련에 의해 조종당한 결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렇게 출현한 콘도르 작전에 대해 박구병은 ‘내부의 적’을 겨냥한 고도의 조직적 탄압이자, 미리 계획되고 체계적이며 오래 지속된 군사 작전으로서, 또 “국경 없는 폭력과 면책의 영역”을 형성한 초법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여타 국가 폭력과는 다른 성격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될 여지가 있다고 해석한다.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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