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보건의료
- 고려대학교대학원신문사
- 죽음을넘어
- 김민조 #기록의 기술 #세월호 #0set Project
- BK21 #4차BK21
- 고려대학교언론학과 #언론학박사논문 #언론인의정체성변화
- 한상원
- 산업재해 #코로나시국
- 심아진 #도깨비 #미니픽션 #유지안
- 518광주민주화운동 #임을위한행진곡
- 쿰벵 #총선
- 5.18 #광주항쟁 #기억 #역사연구
- n번방
- 권여선 #선우은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
- 항구의사랑
- 수료연구생제도 #고려대학교대학원신문사 #n번방 #코로나19
- 미니픽션 #한 사람 #심아진 #유지안
- 공공보건의료 #코로나19
- 임계장 #노동법 #갑질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로나 콜른타이 #위대한 사랑 #콜른타이의 위대한 사랑
- 쿰벵
- 시대의어둠을넘어
- 선우은실
-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 애도의애도를위하여 #진태원
- 코로나19 #
-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염동규 #자본주의
- 국가란 무엇인가 #광주518 #세월호 #코로나19
- Today
- Total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일상 속 음식문화 본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일상 속 음식문화
한식(韓食)은 대한민국의 오래된 역사만큼 그 시간과 비례해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며 그 관심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식진흥법에 따르면 한식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어 온 식재료 또는 그와 유사한 식재료를 사용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조리방법 혹은 그와 유사한 조리방법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음식과 그 음식과 관련된 유형·무형의 자원·활동 및 음식문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음식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한 문화 역시 중요한 연구적 가치를 지니지만, 의식주 연구에 있어 음식문화는 그 형태가 온전하게 보존되기 어려워 과거 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사료(史料), 고조리서, 각 지역의 토속음식 및 집안의 내림음식 등을 통해 관련 연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에 지난 2월 26일 ‘조선 왕실의 의례와 음식’의 주제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하 장서각)과 궁중음식문화재단(이하 궁중단)의 공동 학술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이에 본지에서는 해당 세미나에서 발표된 2편의 내용을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의례 속 유밀과의 변화
장서각 김윤정 정연구원은 ‘조선시대 유밀과(油蜜果)의 의례적 상징’이라는 주제로 발표했으며 본 내용 중 ‘조선후기 속제의 증가와 유밀과 규정’ 부분을 중점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유밀과는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섞어 반죽한 것을 기름에 지친 과자로서 유과(油果)라고 하거나 밀가루로 과일 모양을 형상화해 만들었기에 조과(造果), 가과(假果)라고도 불렸다. 이러한 이유로 유밀과를 과일 사이에 진설(陳設, 제사나 잔치 때 음식을 법식에 따라 상 위에 차려 놓는 행위)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잔치 음식이었던 유밀과는 충선왕(忠宣王)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 가서 공주를 아내로 맞을 때 연회에 차려진 고려 음식이었다. 유밀과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 접대시에도 빠지지 않았고, 중국으로 사행을 떠날 때 조선 사신들이 지참하는 별미였다.
유밀과는 조선시대 의례 음식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사치스럽고 불교적인 음식이라는 점에서 유밀과에 비판적이었지만, 정성으로 부모를 섬기는 효의 원리에 따라 생전에 좋아하시던 유밀과를 조상의 신령께 올리는 것을 허용되었다. 그러나 유교 경전의 제례 음식이 아니었던 유밀과의 사용은 예학(禮學)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유밀과는 왕실 속제(俗祭. 조선시대 국가의 왕실 제사 중 유교 경전에 나오지 않거나 종법 질서에 맞지 않지만 조선의 관습이나 인정의 보편성에 따라 정립된 제사)에 진설되면서, 국가 사전(祀典, 제사를 지내는 예전)의 제사 음식으로 정례화되었다.조선후기에는 왕실 속제의 대상이 점차 늘어났다.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의 묘묘(廟墓)와 왕의 사친(私親)을 위한 궁원(宮園)의 확대는 속제가 증가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에 유밀과의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그에 따른 제도적 정비가 요구되었다. 예컨대 유밀과의 종류와 기수의 차이를 통해 속제의 위계를 구분하는 방식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영조대 계미이정(癸未釐正)을 통해, 유밀과의 제도가 체계화되었다. 1763년(영조39)에 영조는 속제를 포함한 국가 사전을 재정비하면서, 계미이정이라 명명했다. 영조는 제사의 제도가 가지런하지 않거나, 분수에 지나쳐 정밀하지 않거나, 예법에 어긋난다면, 공경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에 맞게 국가 사전을 정비했다고 강조했다. 계미이정에서 유밀과 제도의 정비는 2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로 속제의 위상에 따라 유밀과를 담는 제기인 우리(于里)의 높이를 차등화했다. 우리는 유밀과를 쌓아 올릴 수 있게, 구리 재질의 6개 기둥과 2개 고리로 구성되었다. 앞서 1717년(숙종 43)에 민진원은 인경왕후와 인현왕후의 혼전인 영소전과 경령전의 유밀과 우리가 왕의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의 것보다 높은 것은 이치와 체면상 온당치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영희전을 기준으로 우리 규정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숙종도 이에 동의하였기에, 민진원의 주장에 따라 유밀과의 종류인 중박계, 산자, 다식, 소박계, 소산자, 소다식, 약과 총 7종의 크기와 우리의 높이가 규정되었다. 1763년(영조 39)에 홍봉한은 1717년 우리의 제도가 정비되었음에도, 근래 우리 위로 유밀과를 더 올리는 폐단이 있음을 지적했다. 영조는 우리 위에 유밀과를 한 조각도 더 올리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영조는 유밀과 제도의 폐단이 제사의 공경함에 해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결국 우리의 규격을 차등화하는 제도를 마련하게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규정으로 인해 이전의 규정보다 유밀과 낱개의 크기가 더 커졌고 우리의 높이가 높아졌으며 안쪽 지름의 치수가 추가되었다. 제향 공간에 따라 유밀과 우리의 규격을 달리하여 제사의 차등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두 번째로는 제사의 위계에 따라 사용하는 유밀과의 종류와 기수에 차이를 두었다. 영조대 사친을 위한 궁원제가 확립되고, 세자·세자빈의 묘묘제가 추가되었다.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사친과 세자·세자빈의 신주는 궁과 묘(廟)에 봉안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왕릉과 구분되는 원과 묘(墓)에 안장되었다. 궁·묘는 종묘 제례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속제의 대상이 되었고, 능·원·묘는 속제 내에서 차등의 원칙이 강조되었다. 궁·묘의 경우는 영희전보다 위계를 낮추기 위해 유밀과 기수를 조절하였다. 영희전 속절의 유밀과 기수는 중박계4, 산자5, 다식5, 총 14기였고, 고유제에서는 중박계를 소박계로 변경했다. 반면, 숙빈(淑嬪)의 육상궁(毓祥宮)과 인빈(仁嬪)의 저경궁(儲慶宮)은 중박계3, 산자4, 다식4, 총11기로 낮췄다. 그 외 휘령전과 묘에서는 중박계 대신 소박계를 사용했다. 휘령전에서는 소박계4, 산자4, 다식3, 총11기, 소현세자와 민회빈, 효장세자와 효순현빈, 사도세자, 의소세손 묘에서는 소박계3, 산자3, 총 6기를 사용했다. 영조는 영희전에서 소박계를 사용함을 강조하면서, 휘령전과 묘묘의 중박계를 소박계로 대체하게 했다. 계미이정 이전에 육상궁과 저경궁의 사시제 등에는 약과 4기, 산자 4기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중박계가 중(重)하고, 약과는 경(輕)하다”는 인식에 따라 중박계보다 낮추는 의미에서 약과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약과는 유밀과 중에서 꿀과 기름을 가장 많이 소비했으므로, 재료의 절약 차원에서 효장묘와 의소묘의 약과 4기를 중박계 4기로 변경했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면 절감 차원에서 궁과 묘의 약과가 중박계로 변경되었고, 계미이정에서 묘의 중박계를 소박계로 낮춤으로써 궁과의 차등을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대에는 확대되는 궁원제의 차등화를 위해 유밀과 제도가 개정되었다. 정조는 계미이정이 너무 간략하여 재료가 남아돈다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규정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궁원과 묘묘의 위상을 정리하고 차등의 원칙에 따라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계미이정을 일부 수정했다. 이러한 유밀과 제도의 변화는 속제의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제사의 위계를 나누고 유밀과를 통해 차등을 구현한 것으로, 조선 후기 속제에서 유밀과가 갖는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영조는 계미이정을 통해 속제의 위계를 제도적으로 정비했고, 정조는 세분화된 궁원제를 유밀과의 차등으로 구현했다. 이후 고종은 묘묘제의 위상을 높여 궁원제와 절충적 제도를 마련했는데, 이러한 의례적 위상의 변화 역시 유밀과의 종류와 기수를 통해 구체화하였다.
의궤(儀軌)를 통해 본 일상식의 기록
궁중단 이소영 학예연구실장은 ‘정조 시기 일상식 기록과 정례: 한글본 『뎡니의궤』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했다.
궁중음식은 ‘의례식’과 ‘일상식’으로 나뉜다. ‘의례식’은 절서를 확립하기 위한 의식과 예법을 위해 수반되는 음식이나 통과의례 음식, 손님 접대를 위한 빈례음식을 통틀어 말한다. 이와 반대로 ‘일상식’은 아침, 점심, 저녁 식사부터 식간의 간단한 식사까지 평범한 식사를 의미한다. 의례식의 경우 이를 기록한 사료를 통해 그 종류와 사용된 재료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만, 일상식은 일상생활 속에서 당연시되었기에 이로 인한 기록이 많지 않아 세부적인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궁중 일상식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기록 중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1795, 정조 19년)』와 『이조궁정요리통고(李朝宮中料理通攷, 1957)』를 볼 수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1795년(정조 19년) 한양에서 화성으로 행차했던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축제 과정을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 왕실 의궤 중 하나이다. 긴 여정 중 매 끼니를 위해 노량참(鷺梁站), 시흥참(始興站), 사근참(肆覲站), 화성참(華城站), 원소참(園所站) 등 다섯 곳에서 음식을 준비해 제공했으며, 혜경궁 홍씨, 정조, 수행한 신하 등이 8일간 먹은 음식을 비롯해 사용한 재료의 종류 및 구매량, 기물의 종류 등이 기록되어 있어 왕실의 일상식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그러나 제공된 음식의 조리법은 따로 설명되어있지 않아 어떠한 방식으로 조리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조궁정요리통고(1957)』는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이씨 왕족이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던 시절, 이를 이조(李朝)라고 불린 데에서 기원했으며 ‘요리통고’는 그 당시 흔히 쓰이던 책 제목이다. 이 책은 마지막 왕족의 음식을 담당했던 한희순 상궁과 제자인 황혜성 교수가 함께 저술한 궁중 요리책이다. 조선 왕실의 궁중 음식 조리법은 대부분 상궁의 기억을 통해서만 전수되었는데, 이 책은 그 실체를 최초로 체계화하고 기록으로 남긴 중요한 문헌이다. 특히 이러한 노력은 ‘조선왕조궁중음식’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도 이바지했다. 책에는 궁중요리의 종류별 식단, 상·기명의 종류를 시작으로 구이, 산적, 전유어, 찜, 탕, 돈육 및 노루고기, 닭, 생치(꿩), 어패류 등의 음식 구성과 배선법(配膳法, 음식을 그릇에 담아서 상에 배열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며 궁중 음식을 계량화하여 근대적 조리법으로 기술해 그 조리법과 풍속을 기록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궁중 음식을 정의하는 데는 일부 어려움이 있다. 기록에 서술된 수라상의 내용을 조선 왕실의 일상식으로 보편화하기엔 정보의 양이 제한적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변화된 수라상의 구성을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해석하고, 다양한 사례를 수집해 수라 간 음식 구성 방식의 차이 혹은 유사성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글본 『뎡니의궤(정리의궤)』(1796, 정조 20년)는 조선 정조대(正祖代) ‘현륭원(顯隆園) 행행(行幸)’과 ‘화성성역(華城城役)’에 관한 내용이 방대하게 수록된 한글본 자료로서 총 13권이 남아 있다. 현재 프랑스 대학언어문명도서관(BULAC)과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소장된 자료로 해외로 흩어진 국가전적자료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던 중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2018년 국내 최초로 복제본 제작을 시작해 현재 수원화성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뎡니의궤』는 정조 20년 1월 20일부터 24일까지 총 5일간, 정조가 화성으로 원행 다녀온 기록을 담고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음식과 관련하여 화성참, 원소참, 시흥참에서 준비된 조(朝)수라, 오(午)수라, 석(夕)수라, 죽수라, 야다담(夜茶啖), 소반과(小盤果) 등 총 6가지의 상차림이 정조에게 제공되었다. 특히 시흥참에서 준비한 수라상에는 협반(挾盤)이 제공되지 않았으나 화성참, 원소참에서 차린 수라상에는 협반이 함께 올랐으며 야다담에는 전골을 끓이는 난로를 곁상으로 함께 올렸다. 소반과는 조수라와 오수라 사이에 차려졌으며 협반이 따로 없었다.
이에 정조 19년과 정조 20년의 원행 간 수라상의 음식 구성을 비교해보면, 정조 19년 원행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떠난 여정이었기에 어머니를 잘 차려드리되 본인의 찬품은 10개를 넘기지 말라고 명해 수라상의 음식 개수가 적었다. 반면에 정조 홀로 떠난 정조 20년 1월 20일 원행에서는 석수라상의 찬품 수는 총 20개로 이전 혜경궁 홍씨와 떠난 19년 원행의 수라상 찬품 수보다 많았다. 또한, 정조 20년 원행의 수라상에는 흰쌀밥인 백반(白飯)과 팥으로 만든 홍반(紅飯)이 함께 올랐는데 한희순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수라상에 두 가지 밥을 동시에 돌린 후 그날 왕이 원하는 밥을 골라서 식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사례로 왕·왕비·대비가 세상을 떠나 국장을 치를 때 시 살아계실 때와 같이 상을 차려 올렸는데 이때 역시 백반과 홍반, 두 종류의 밥이 수라에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조 19년 원행의 경우 화성 건축을 축하하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현륭원 방문 및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기 위한 목적이었기에 해당 의궤에 기록된 음식들이 완전한 일상식에 가깝다기보다 오히려 정조 20년 원행에 기록된 정조의 수라상이 좀 더 일상식에 가까울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리 : 김연광 기자 dusrhkd99@korea.ac.kr
'6면 > 학술동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역음식, 가장 한국적인 음식문화의 시작점 (0) | 2023.06.27 |
---|---|
강제동원의 실상, 판결과 해법 (0) | 2023.05.23 |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경험과 기억 (0) | 2023.03.15 |
냉전시기 내부안보와 대반란전 (0) | 2022.12.15 |
역사전쟁과 민족주의를 넘어 동아시아 공동체는 가능할까? (0) | 2022.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