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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강제동원의 실상, 판결과 해법 본문

6면/학술동향

강제동원의 실상, 판결과 해법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5. 23. 01:44

  지난달 13일,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안 폐기를 위한 역사단체 공공 학술회의가 고려대학교 CJ법학관 베리타스홀에서 개최되었다. 역사 관련 53개 학회와 단체들이 모여 탈식민의 과제를 고민하고 미래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한일 두 나라의 시민, 나아가 세계 시민의 이해와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 이번 학술대회의 목표였다. 이날 행사 1부에서는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을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낭독했고, 2부에서는 강제동원 관련 발표가 이어졌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날 진행된 발표 중 2개를 뽑아 소개하고자 한다.

 

‘모집’이라는 강제: 식민지 조선에서 전시동원

  그동안 일본 정부는 조선인 노무자에 관해서 1946년 귀환정책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소위 ‘모집 노동자’와 ‘관 알선’, ‘징용노동자’로 구분하여, 모집 노동자의 경우 자발적인 취업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귀환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특히 1990년대부터 한국에서 피해자들이 피해보상 재판을 제기하기 시작하자, 일본 정부는 ‘징용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피해자 범주에서 모집과 관알선 노동자를 제외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일본 정부가 책임이 있는 합법적 동원이었으며, 이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문제라는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모집’ 노동자에 대한 범죄성을 밝히고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에 한혜인은 전시기에 식민지민을 제도적 범주 내에서 ‘자발’을 강요당하며 연행되었던 모집 노동자의 상황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고자 시도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노동자를 동원할 때 관의 알선에 의한 ‘모집’의 방법이 가장 많이,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1944년 8월 전면적 징용령을 내린 후에도 일본 정부는 각 회사에 되도록 징용이 아닌 기존의 방법을 실시하도록 종용했는데, 이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기업들이 불법적인 동원에 직접 가담하지 않으며서 조선인 노동자를 최대한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인 노동자를 제도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의 제정으로 전시동원이 본격화되면서였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일본의 산업구조를 ‘생산력 확충산업’과 ‘평시 산업’으로 나누었는데, 전자에서는 총동원업무, 후자에서는 노무동원계획을 세워 노무자를 투입하였다. 특히 노동력이 부족하고 노동환경이 열악한 석탄산, 금속산, 토목건축 등 시국 산업에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일본 내지로 동원되는 조선인 노동자의 경우, 1934년 이후 일본의 전시 경제호황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내지로의 방만도항을 금지하는 정책이 유지되고 있었다. 조선인에게 전면적으로 도항을 허가할 경우 치안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도항금지정책은 그대로 유지하되 정부가 계획한 석탄산, 금속산, 토목건축, 그 외 공장에의 취업만을 허락하는 「조선인 노동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을 1939년 7월에 발표했다. 이에 따라 도항 조선인들에 대한 관리는 지방경찰이 담당했고, 작업장 이동방지, 전원 기숙사입소 등 숙소 제한, 2년 계약, 연장 불가 등 규정을 적용받으면서 기존의 재일조선인들보다도 차등 대우를 받는 노동자로 전락했다.

  한편, 1918년에 「노동자모집취체규칙」이 제정되면서 통해 조선 외 사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모집하려고 하는 자가 조선의 모집 대상 지역의 경무부장과 도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후 1928년에 조선 내에서의 노동자 모집에도 적용되도록 개정되었으며, 결국 조선에서의 모든 노무자 모집은 총독부 허가제로 실시되었다. 이는 조선인들을 취업시키는 합법적인 수단이기는 했으나, 실행에 있어서 업자와 관 사이의 유착, 유력자를 통한 알선, 취업조건 및 대우의 상이, 열악한 작업환경 등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도망을 택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늘었다.

  한편, 1940년 3월에 제정된 「모집에 의한 조선인노동자의 내지이주에 관한 건」은 조선인 노동자를 공출할 때 취급 기준이 되었다. 한 지역의 모집 기간은 최대 3개월이었고, 모집 완료에 이르기까지는 동일 읍면 내에 있어서 새로운 모집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단순하게 모집 신청자의 자유에 맡기지 않고 가능한 관의 협력을 얻도록 하는 등의 규정이 제시되었다. 이는 외형적으로는 조선인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일본으로의 노동자 동원이 시작되자 저임금과 강압적 노무관리로 인해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던 조선 내 기업은 “반도 노무자 부족으로 생산 확충 속행 상에 지장이 있으니 이들 반도노무자의 내지 이주를 억제하고, 선내의 노동자로 적극 양성하여 적정하게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조선 내 기업가들은 일본행 조선인 노동자 집단 이주의 결과로 조선 내의 노동시장이 경색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생산이 불가능하다며 국익의 이유를 들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 내의 값싼 노동력의 이점을 지키고자 했다.

  또 1941년 「노무동원계획실시에 따른 소위 연고에 의한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 취급에 관한 건」 역시 주목된다. ‘연고도항’이란, 이미 일본지역에 취직된 조선인 노동자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소개하여 취직시키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자발성을 최대한 유도하는 장치였다. 이로써 정착률도 높이고 노동자의 감시와 통제에도 용이했기 때문에, 일본 기업 측은 모집 비용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법이 제정됨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들은 총동원체제 속에서 조선 서북선 또는 일본 내지의 열악한 탄광, 토목공사 장으로 관에 의해 강제 동원되었다. 결국, 조선인 노동자들이 ‘연고도항’에 응하는 것은 그나마 친지에 의해 노동 사정을 알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총동원체제라는 국가적인 폭력 속에서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자기표현일 뿐이었다.

  이렇게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노무관리는 탄광회사 입장에서 중요한 과제였다. 미숙련 노동자 수가 급증한 것과 더불어, 조선인 1인당 숙련 조선인 노동자 평균 월급이 2배 이상인 70~120엔 수준의 모집비용을 전부 사업주가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사업장은 조선인 노동자의 특성을 균질화하여 취급방법을 학습하도록 했는데, 그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완전한 독립국가나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하지 않은 민족으로서 항상 피복종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노무관리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위생지도, 식사 지도, 단체생활지도 등 교육이 실시되었다. 다만, 생활 훈련에서 ‘반도어’에 대한 교습은 제외되었는데, 이는 조선인과의 소통을 애초부터 거세할 뿐 아니라, 오히려 조선어를 알아 소통을 하게 될 시 생기는 문제조차 기피하려고 한 것이었다. 또, 조선인들의 식습관을 ‘대식가’로서 대부분 위장병에 걸려 과식을 반드시 고쳐야 할 폐습이라고 지적하면서, 식사의 분량이 줄고 3끼 모두 장아찌밖에 먹지 않았기 때문에, 영양실조 상태를 우려해야 할 수준이었다. 식사예절의 경우 식전과 식후에 반드시 일본어로 인사를 합창 합장하게 만들고, 식당 입구에 신단(神棚)을 만들어 출입할 때 반드시 절을 하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인 노무 동원과 관련된 행정조치는 전쟁 수행이라는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을 용인해주는 과정이었다. 그중 ‘강제연행’이라고 일컬어지는 조선에서 일본 내지로의 동원은 조선총독부의 계획과는 달리, 일본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식민지 조선에서의 동원은 점령지인 중국과는 달리 식민지 권력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징용과 같이 국가적 책임을 져야 하는 방법은 최소화하며 되도록 ‘자발성’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성’ 이면에는 실제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었고 시국산업에만 취업이 가능했다는 점, 또 강제로 연행된 노동자들은 기존 도항노동자인 재일조선인과도 법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은 ‘예외적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강제연행 및 노예노동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탈식민’의 세계사적 흐름과 한국 대법원판결의 의의

  유엔총회에서 1965년에 채택된 ‘인종차별 철폐협약’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엔에서는 2001년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인종주의 반대 세계회의’를 개최하였다. 준비회의에서는 특히 식민지배와 노예제 자체가 인종차별행위이며 오늘날 인종차별의 원천이 되고 있고 현재 빈곤과 경제적 격차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며, 책임 국가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네더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구 제국은 배상과 사죄 요구에 반발했다. 따라서 최종 선언문은 노예제와 식민지배가 인종차별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확인하고 노예제를 ‘인도에 반하는 죄’라고 명시했으나, 이에 대한 배상이나 명확한 사죄, 그리고 식민지배를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문장 없이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더반회의는 유엔 주최의 세계회의로 식민지배와 노예제 책임이 국가의 틀을 넘어 국제적으로 추궁되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부터 식민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가 부상한 흐름에 조응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에 염운옥은 더반회의 전후로 식민지배에 책임을 묻고 배상을 요구하는 유의미한 사례로서 영국-케냐 마우마우(Mau Mau) 재판을 살펴보며, 국제적 탈식민 움직임의 맥락에서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에 주목한다.

  마우마우란 1950년대에 일어난 케냐의 무장독립운동으로, 1895년부터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케냐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아프리카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에 1950년대에 들어서 백인 우선 정책이 심화되면서 최대다수 부족이자 최대 피해자인 키쿠유(Kikuyu) 족을 중심으로 무장독립운동 단체 마우마우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영국인과 영국에 협력하는 케냐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1952년 10월, 케냐 총독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마우마우 가담자들에 대한 대규모 소탕 작전에 돌입했다. 비상사태 기간 동안 사상자 숫자가 적게는 11,000명에서 많게는 90,000명으로 추정된다. 또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전국에 강제수용소를 운영했고, 약 100,000~150,000명의 키쿠유 민간인들이 재판 절차 없이 수용소에 감금되어 육체노동, 극심한 모욕과 폭행, 그리고 학살에 시달렸다.

  1963년에 독립한 케냐에서는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식민지 피해 배상을 향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2002년 야당연합이 집권하면서 케냐 정부가 마우마우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고, 2009년에 마우마우 피해자 5명이 개인 자격으로 영국을 상대로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우선 마우마우를 불법단체로 규정한 영국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불법단체에서 독립운동 단체로 범죄화하고 재규정하면서 공개 증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청구인들이 영국 외무·영연방부를 상대로 제기한 재판의 성립 여부를 다투는 심리가 2011년 4월부터 고등법원에서 두 차례 열렸다. 여기서 핵심 논란이 되었던 것은 영국 국립공문서관과 케냐 나이로비 국립공문서관 자료 이외에 300상자 분량의 민감한 제3의 자료가 존재하며, 해당 자료가 영국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어 케냐에서 영국으로 밀반출된 것이라는 증언이었다. 이후 재판이 진행되기 전에 영국 정부는 협상을 시작했고 2013년에 영국 식민정부가 케냐인을 상대로 저지른 고문과 가혹행위를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합의 내용은 ▲현금 배상으로 청구인과 5,228명에게 각 2,600파운드 지급 ▲마우마우 기념비 건립, 나이로비 우후루 공원에 마우마우 기념 동상 제작 ▲하원에서 외무장관의 공식 사죄 ▲나이로비에서 전 마우마우 앞에서 영국 고등판무관이 사과문 요약문 낭독이었다. 

  협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과 고문과 폭행을 포함한 잔인한 학대와 고문이 보안부대와 향토방위대의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계산된 식민지 국가의 대응이었다는 점을 입증하고 이를 국가폭력 문제로 제기했다는 점이었다. 또한, 영국군과 보안부대뿐 아니라 케냐인 향토방위대를 지휘체계 휘하에 포함시키고 식민당국이 폭력을 지시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제시되었고, 탈식민화 과정에서 영국에 불리한 증거가 될 민감한 관련 문서를 조직적으로 런던으로 빼돌려 옮겼다는 사실이 발각되기도 했다. 이러한 증거에 더해 마우마우 운동에 대한 전문 역사가들의 연구 성과와 이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 등 다양한 공론화 노력이 이어지면서 여론 역시 재판에 주목하게 되었다. 재판 결과, 불법행위에 대한 대리책임을 영국 정부와 식민정부 사이에서 인정한 것으로, 식민지와 제국의 피해에 일반법의 불법행위에 대한 대리책임을 확대 적용해, 식민지 피해를 일반법 체계 안으로 포함시킨 판결이 나왔고, 식민지 피해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하나의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식민지 범죄에 대한 전향적 해석을 구성할 수 있는 법적 전환을 계기로 만들었다. 그러나 판결문이 식민지 시기 고문 피해를 영제국을 구성하는 구조적 악으로 규정하고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삼은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지닌다. 즉, 영국 정부와 식민정부 사이에 대리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일탈과 과실의 불법행위에 대해 식민지배 본국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에 불과했다. 다만, 영국 정부가 합의에 나섬으로써 식민통치 시기에 고문 피해에 대한 개인 배상에 합의한 첫 사례로서 그 의의가 주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천명하고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법적으로 확인한 유의미한 판결이었다. 대법원 판결은 국가와 개인은 별개의 법적 주체라는 것은 근대법의 기본 원칙임을 지적하고, 식민지배 등 불법적 지배하에 이뤄진 강제노동에 관해서 피해자 개인이 적극적 포기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면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1965년 청구권 협정 제2조에서 포기된 것은 국가의 외교보호권이며, 개인 청구권은 포기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세계사적 흐름의 일부로서 그 의미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리: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