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경험과 기억 본문

6면/학술동향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경험과 기억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3. 15. 19:51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경험과 기억

  지난달 3일, 국립순천대학교 인물학술원이 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경험과 기억’이 개최되었다. 이날 발표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경험과 기억’과 ‘한국전쟁의 경험과 기억’의 2부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다. 한·중·일·미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을 동아시아 역사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이 이번 학술대회의 목표였다. 이에 본지에서는 주목할 만한 발표 2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키나와 전쟁의 기억과 일본 복귀 운동의 변용

  1972년, 미국은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점령해왔던 오키나와를 일본에 복귀·반환하였다. 그러나 1944년부터 시작되었던 미국의 오키나와 침공과 이후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과정은 오키나와 지역 주민들에게 전쟁의 아픈 기억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에 발표자 나리타 치히로는 오키나와 전쟁 이후 ‘일본 복귀론’이 등장하면서 미·일 정부와 논의가 진행된 과정을 추적하며 그 속에서 나타난 반전과 평화를 향한 목소리에 주목한다.

  오키나와 전쟁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10월, 미군의 오키나와 침공작전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군사령부가 있던 슈리(首里)보다 북쪽에 위치한 본섬 중부에서 미국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지만, 이내 미국의 군사력에 압도당하면서 1945년 5월에 남부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때 당국은 주민들을 비전투지역으로 철수시키는 데에 주력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섬 남부에서는 군인과 민간인이 혼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주민들은 식량 강탈, 간첩 혐의로 인한 학살 등 잔존한 일본부대의 가해를 감내해야만 했다. 이처럼 ‘버림돌’이 되어버린 오키나와에서 전사자 20여만 명 중 주민은 무려 9만 명에 달했고, 잔혹한 전쟁의 경험과 폐허의 현실은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종전 이후 미국은 본격적으로 오키나와 군도에 대한 군정을 시작하였다. 미 군정이 수립되면서 이내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 오키나와 민정부와 각지의 청년단이 결성되기는 했지만, 전쟁 직후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도 있어 섬을 일본에 복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내 국공내전이 재발하면서 국민당 측이 열세에 몰리자 미국은 1950년 봄부터 오키나와에서 기지 개발을 시작했고, 이에 오키나와 내에서는 일본 복귀론이 떠오르게 되었다. 이어서 11월에는 미국이 “대일강화 7원칙”을 통해 오키나와 신탁통치안을 공표했고, 이에 오키나와 복귀 문제는 지역사회뿐 아니라 오키나와 정치에서도 주요한 의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일례로 1950년 5월에는 시민사회로 구성된 ‘일본복귀촉진기성회’가 일본 반환에 대해 본섬 전체 유권자의 72.1%에 달하는 19만 9천여 명의 서명을 모아 탄원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임하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미국의 다레스 특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 초,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정책 결정자들은 오키나와 기지에 대한 무기한 보유를 선언하였고, 특히 1952년 4월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3조에 따라 오키나와에 대한 미국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이에 1953년 1월에는 정당을 제외한 각종 시민단체로 구성된 ‘오키나와 제도 조국복귀기성회’가 결성되어, 오키나와의 즉각 완전 복귀 실현을 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류큐의 민족·역사·경제·문화 및 지리적 유사성으로 인해 신속하게 일본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1956년에는 섬 전체의 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어서 1960년에는 오키나와 교직원회, 청년협회, 그리고 관공청 노동조합 협의회가 주축이 된 ‘오키나와현 조국복귀협의회(이하 복귀협)’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평화조약 제3조의 철폐, 잠정적인 일본 헌법의 적용, 국정 참여, 사상·언론 출판 등의 완전한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 12월 유엔에서 ‘식민지해방선언’이 채택되면서 복귀협도 외국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오키나와가 계속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은 식민지 해방전선 속에서 외국에 의한 민족의 정복에 해당한다며 하루라도 빨리 미국 시정으로부터의 해방과 일본 복귀를 요구했다. 

  한편, 1960년대 베트남의 상황은 전쟁의 기억을 안고 있던 오키나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에 점차 깊숙이 개입하면서 지상군 파견을 위해 오키나와 기지를 활발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B52 전략폭격기가 오키나와에 주둔되고 직접 출격하기 시작하자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불안감은 증폭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미군의 새로운 토지 접수, 미군 범죄 증가, 기지 주변 소음 악화 등은 복귀 운동을 더욱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더해 당시 일본에서는 자주방위론이 고조되면서 그 일환으로 오키나와에 자위대가 배치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시 일본군의 포악성을 경험했던 섬 주민들에게 악몽을 또 한 번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는 운동은 자위대 배치에 대한 반대 운동과 결합되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전시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조사하고 자위대 배치에 대한 반대운동도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미일 정부 간에도 오키나와 반환에 대한 협상이 진전되기 시작했다. 1967년, 복귀협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의 방미를 앞두고 “전쟁의 비참함을 몸소 체험한 우리로서 다시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반전 평화의 사고방식이 배경이며 민주적 평화헌법을 쟁취하고 지켜내는 것이 복귀운동의 근간”이라는 행동요강을 발표했다. 이후 사토 총리의 방미로 공표된 1969년 공동성명에서는 오키나와 기지 유지를 전제로 하면서도 미일 양국이 2~3년 안에 반환 시기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이와 같은 공동성명은 복귀 운동을 추진했던 주민들의 목소리를 매우 제한된 수준에서 반영한 것이었다. 1969년 공동성명에 기초한 오키나와 반환협정이 1971년 6월에 조인되었는데, 복귀협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미국 상원에서 반환협정이 표결되기 직전에 10만 명 규모의 사상 최대 총파업을 벌이며 오키나와 반환협정의 재시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 협정은 중의원 ‘오키나와 반환협정 특별위원회’에서 불시에 강행 체결되었고, 오키나와 관련 법안 역시 전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자민당 단독체결이라는 비정상적인 형태로 가결되었다. 특히 협정에는 주민들이 요구했던 오키나와의 ‘즉시·무조건·전면 반환’, 핵무기·B52·독가스 무기 등의 완전한 철거 등은 제대로 다루지 않고 형식적인 수준의 합의문에 그쳤다. 또한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민의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반환 준비를 진행한 가운데 오키나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행위도 묻히게 되었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이 고조되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베트남의 살육에 기여하고 있다는 가해자 의식이 촉발되었고, 이는 ‘즉시·무조건·전면 반환’을 구호로 한 복귀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자위대 배치 계획을 발표하자 자위대를 일본군과 동일시하며 이에 대한 반대 운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반환운동의 전개 과정에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의 암울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반환 결정에서 민의가 충분히 적용되지 않으면서 이후 현재까지도 반전과 평화를 위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9년에도 오키나와에 영구적으로 주둔된 미군 기지에 대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REUTERS. 

 

냉전 속의 열전–여순사건 직후 군경의 토벌작전을 중심으로

  1948년 10월에 발발한 ‘여순사건’은 이내 군의 진압작전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군의 작전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들어간 빨치산을 토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단순히 빨치산을 섬멸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토벌작전을 빌미로 해당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 권한을 강화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정규전에 버금가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노영기는 여순사건 이후 전개된 군의 토벌작전을 검토하면서 열전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여순사건 이후 군의 토벌작전을 살펴본다.

  여순사건이 발생하면서 한국 정부와 미군은 재빠르게 대응하며 여수와 순천을 신속하게 탈환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열었고, 이내 광주에는 ‘반군토벌전투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에 정부는 ‘투항 아니면 총살’, 그리고 신속한 진압방침을 정한 채 막대한 병력을 동원한 압박 섬멸전의 공격을 시도했다. 군경은 먼저 여수-순천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켜 제14연대의 봉기를 빠르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광주에 전투사령부가 설치된 다음 날인 10월 21일, 38선 경비와 제주도에 주둔한 4개 연대와 반란을 일으켰던 제14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10개 육군 연대 중 7개가 여순사건 직후 진압부대로 출동했다. 또한 대전 제2연대 제1대대를 제외한 대전 이남의 모든 부대가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는데, 이는 인근 모든 부대를 이동시켜 신속하고 강경하게 진압하겠다는 정부의 지침을 따른 것이었다. 다만, 초기 진압 작전은 부대 간에 합동 작전의 경험 전무, 병참과 연락 등의 문제로 인해 초반에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은 채 봉기군의 기습을 당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나 이내 대열을 정비한 진압군은 병력을 집중시켜 10월 23일에 순천을 탈환한 뒤 여수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이처럼 군이 강력한 작전을 전개하자 제14연대원들이 주축을 이룬 반군은 백운산과 지리산 등지로 들어갔다. 이 무렵 군은 여수의 동서남북 각지로 나누어 투입되었고, 반군의 매복과 후퇴 등을 반복하다 결국 10월 26일, 진압군은 여수에 진입했고 다음 날 여수 시내에 완전 입성함으로써 진압작전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군 초반기 작전이 초점을 두었던 것은 입산을 막는 것이 아니라 여수와 순천 등 반군이 점거한 지역을 탈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입산을 막기는 어려웠다. 또한, 빨치산의 주력인 제14연대 군인들과 지방 좌익세력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에서 나고 자란 지역 출신들이었기에, 외지 출신이었던 토벌군인들보다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에 군은 여수와 순천 등에 진주한 이후 지리산의 반군과 교전하고 산악지대의 반군을 고립시키는 한편, 해당 지역 출신의 군인들로 토벌부대로 충원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군은 빨치산을 추격하여 전남과 경남 지방에서 빨치산을 소탕한 뒤에 원대 복귀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1948년 11월 12일 기준으로 파악된 빨치산의 숫자는 백운산 350명, 벌교 200명, 고흥 150명, 보성 300명으로, 여기에는 반군과 무장한 민간인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군의 토벌작전은 지형과 계절의 영향 때문에 겨울을 지나 1949년 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처음에는 호남 지역으로 통치되던 토벌작전 지역은 점차 지리산에 한정되어 보고되었고, 작전이 본격화된 1949년 4월 초중순은 이전보다 약 2~4배 수준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빨치산 토벌을 빙자하여 주민들을 학살한 사례 역시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군의 토벌이 계속되면서, 작전은 빨치산 토벌과 민간인 학살이 혼재된 형태로 전개되었다. 11월 1일, 원용덕 대령은 호남방면 사령관 명의로 계엄지구에 자신의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포고했는데, 여기에는 ‘관공리의 직무 충실, 통행금지 시간, 국기를 제대로 게양, 군사행동 방해 금지, 폭도나 무기 등을 은닉하거나 허위 보고 금지’ 등을 제시하며 이를 어길 때는 군율에 의하여 총살에 즉결하겠다고 포고했다. 이어서 11월 5일 기자회견에서 원용덕 대령은 “만약 반도를 은닉하거나 식량을 공급하거나 하여 반도에게 가담한 사실이 발견될 때에는 반역자로 규정하여 극형에 처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특히 1949년 봄부터 지리산에서 본격적으로 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빨치산이 재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간 부락에 의용단이 조직되었는데, 이는 14세부터 40세까지의 전 주민을 가입시킨 강력한 신고망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여순사건의 진압작전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계엄령이 유지되었는데, 군은 토벌작전을 목적으로 통행금지 구역 및 통행금지시간을 선포한 뒤 헌법에 보장된 주민들의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 통제했다. 주민들은 군이 통제하는 구역과 시간에 따라 생활하며, 1949년 초까지 군이 발급한 각종 신분 증명원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증명해야만 했다. 또한, 군의 작전에 필요한 경우 주민들의 집과 마을이 소개(疏開)되었는데, 1949년 1월 기준 곡성군 내의 가옥 피해는 전소가 100호, 반도의 온상지라고 해서 소개한 것이 600호에 이른다고 보고되기도 했다. 한편 산간 마을의 주민들은 토벌작전을 전개하는 군의 접대를 위해 각종 잡세를 부담하고, 경찰은 이를 뒷받침하려고 본래의 임무와는 상관없는 행위, 혹은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처럼 마을 소개와 함께 선무공작대, 신고망의 구축, 압도적인 물리력 등을 동원한 토벌작전이 계속되면서 빨치산이 출몰하고 군의 토벌작전이 계속되는 지역의 주민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결국 1948년부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지리산과 백운산을 비롯한 산악지대는 전쟁터였다. 그곳에서는 날마다 생사를 가르는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산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반란’과 ‘항쟁’의 갈림길에서 선택과 생존을 강요당해야 했다. 주민들은 때로는 국가폭력의 피해를 입기도, 때로는 그 반대의 경험 속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이에 노영기는 이러한 전쟁터를 단순하게 냉전 속에서 치러진 ‘비정규전’이나 ‘유격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인 설명이라는 지적과 함께, 이러한 열전의 사례를 통해 이 시기 한반도의 상황을 냉전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제시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에 불복종해 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과 그 진압 과정은 한반도가 경험한 냉전의 양상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이었다.
ⓒ서울신문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