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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文學城市圖: 한국의 도시공간과 고전문학·한문학 본문

6면/학술동향

文學城市圖: 한국의 도시공간과 고전문학·한문학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9. 4. 14:20

 지난달 23, 본교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가 주관한 2023년 하계 기획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 한문학 작품과 특징, 그리고 한국에의 영향을 살펴보며 문인들의 주거환경과 도시 한양의 배경으로 그려지는 시대상을 논의하는 것이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였다. 이날 1부에서는 3개의 자유주제로 발표가 먼저 이루어졌고, 2부에서는 총 5개의 기획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날 진행되었던 발표 중 2편을 뽑아 소개하고자 한다.

 

19세기 한양과 하위주체: 포의교집을 중심으로

 『포의교집(布衣交集)1864년부터 1866년까지 한양을 배경으로 몰락 양반 이생과 하층 여성 초옥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는 작품이다. 이는 특히 남촌과 북촌 등 한양의 풍경을 묘사하고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 등 역사적 사건들을 자세하게 기술한다는 점에서 19세기 말 한양의 세태를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발표자 유해인은 조선 후기에 주변부적 존재들이 지닌 열망을 대변하는 하위주체로서 주인공 이생과 초옥에 주목하며, 남촌과 북촌을 중심으로 드러난 19세기 한양의 공간적 표상을 통해 포의교집의 시대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시도한다.

 먼저 이생과 초옥이 처음 만나는 장소인 남촌 대전골 장진사네 저택은 19세기를 대표하는 두 하위주체가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설정된다. 양반의 수적 증가, 잦은 당쟁, 과거제의 문란과 그에 따른 몰락 양반의 등장은 19세기 조선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생 역시 이러한 시대적 문제를 반영한 인물로,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마흔 살이 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마을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몰락 양반이다. 이생은 몰락 양반들이 행하던 대표적인 기생 방식으로 장진사에게 기대어 벼슬자리를 얻고자 노력하며 삶을 도모해 나간다. 한편 초옥은 17세의 아름다운 외양의 소유자로, 남녕위(南寧尉)의 시비(侍婢)였다가 양씨 집의 며느리가 되어 장진사네 행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인물이다. 장진사의 저택은 현재 중구 을지로 2·3가와 수표동·장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목멱산 아래 청계천 이남의 남촌에 속하는 지역이다. 조선 후기 세도가인 노론이 주로 거주하던 북촌과는 달리, 당시 남촌에는 소론, 남인 등 당쟁에서 탈락한 몰락 양반이나 상인, 부호 등 양반과 중인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장진사의 저택에는 신분적 상하의 질서가 다소 뒤섞인 공간으로 표상되는데, 마을 사내들이 스스럼없이 장진사 집을 왕래하기도 하며, 집안에서 전통적인 내외의 구분마저 무너져 있다. 일반적으로 내외법에 따라 여성의 노동은 폐쇄된 안채에서 행해졌는데, 장진사 저택에서는 안사랑과 가까운 중문안 대청에서 여자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날마다 와서 이생을 마주 대하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처럼 장진사의 저택은 상하남녀가 뒤섞여 있어 한양의 주변부적 존재들 즉 몰락 양반과 하층 여성과 같은 하위주체들이 모여들기에 매우 적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초옥을 보고 한눈에 반한 이생은 이후 은밀한 관계를 이어간다. 시비 시절 모시던 별가(別駕)에게 교육을 받았던 초옥은 글을 배운 후부터 문장가와 담론하는 일생을 꿈꿔왔다. 젊고 매혹적인외양을 지닌 하층 여성으로서 늘 주변 남성들이 탐하는 대상이 되었기에, 초옥은 글을 통한 진정한 소통에 갈증을 느끼며 신분적 처지를 초월한 인격적 만남, 즉 포의지교(布衣之交)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하위주체들 간의 연대로 인식한 초옥과는 달리 이생은 그저 간통 그 이상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처럼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된 관계였기에 장진사의 조카 장중약이 등장하여 초옥에게 구애를 하자 이생은 초옥의 굳건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끝내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결국 남촌에서 이루어진 두 하위주체의 관계는 파탄으로 끝을 맺었지만, 이는 연대의 실패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초옥이 여전히 장진사의 저택에 남으며 자신을 한낱 노리개로 취급하는 장중약 무리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언제라도 새로운 연대의 대상이 등장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약 1년 후에 이생과 초옥은 재회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이전과는 정반대의 공간과 구도로 이어진다. 둘의 재회 장소는 북촌의 안동 민궁으로, 이는 조선 전기부터 권문세가가 선호하는 주거지이자 한양이 상업적 도시로 변해가던 조선 후기에도 주거지의 분위기를 굳건히 유지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북촌 안동 민궁은 세력 있는 사대부로 주거민의 신분이 고정된 특징을 보여주며, 상하 질서가 명확하고 유교적 질서가 강하게 작동하는 공간으로서 남촌과 구별된다. 초옥과 이별한 이후 재상가에 줄을 대 벼슬자리를 얻는 데 성공한 이생은 자신의 앞날을 이끌어줄 안동의 민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반면 그 사이 초옥은 국가적 행사에 가무와 풍류를 제공하기 위해 차출된 여령(女伶)의 신세로 전락하였다. 결국 초옥은 민궁의 힘을 업은 이생의 도움으로 여령에서 제외될 수 있었지만, 이전 남촌에서의 당당한 모습은 사라진 채 국가적 횡포 앞에 힘없이 성을 착취당하는 영락없는 하층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변화된 지위에 따라 둘의 관계 역시 변화되었다. 초옥은 이생 덕분에 민궁 전체를 구경하거나 남이 차리는 아침밥을 먹는 등 하층 여성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데, 이로써 둘은 더 이상 남촌에서와 같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 둘의 정열, 그리고 초옥이 남촌에서 꿈꾸었던 하위주체와의 연대를 북촌 안동 민궁에서 모두 상실해버렸다. 이처럼 북촌 안동 민궁은 남촌 대전골 장진사네 저택과 달리 상하의 구분이 명확하고 유교적 질서가 엄격하게 작동하는 공간으로, 초옥이 꿈꾸었던 신분을 초월한 인격적 만남과 연대, 포의지교가 불가능한 공간이자 그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이분화된 공간이다.

 이후 이생은 낙향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데, 병인양요가 발발하고 초옥을 비롯한 한양의 여러 주거민들이 시골로 피난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처럼 한양은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한 변화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공간으로 묘사되는데, 이와 달리 하위주체 이생과 초옥의 한양은 그러한 변화를 추동해 내지 못하는 정체된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특히 보잘 것 없는 처지의 몰락 양반 이생에게 이들의 간통 관계는 주변 선비들을 제치고 뛰어난 외모의 하층 여성 초옥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양반으로서의 권위 의식을 회복하게 해주는 계기였다. 따라서 이생에게 하위주체 간의 연대 경험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그는 초옥을 어여삐 여겼던 낭자정도로 취급하는 등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지 않았으며, 하위주체에 대한 이해 또는 인식의 변화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이처럼 몰락 양반 이생의 결말은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고적이고 상층지향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답보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이생과의 간통은 초옥에게 처절한 실패의 경험이었다. 실패한 후 좌절한 초옥은 반성을 통한 새로운 자기 갱신과 성장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생과의 후일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지 않으며 이생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와의 관계를 끊어낸다. 한편, 초옥 역시 상하를 초월한 진정한 사귐 그 자체보다는, 몰락했음에도 신분은 상층이었던 양반으로서의 체통을 지니며 문장을 교류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자 했으며, 이색을 통해 포의지교라는 교류를 형식적으로만 추구했던 것이다. 이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재회하는 공간인 한양, 특히 남촌과 북촌은 이처럼 19세기의 정체된 한양과 정체된 하위주체들을 진단하는 공간이었다.

▲1830년대 제작된 <조선성시도>. 청계천을 중심으로 위로는 북촌, 아래로는 남촌으로 구분되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도시화에 따른 마을과 마을공동체의 변화와 구심점:

 신내동 경주 임씨 집성촌의 변화양상과 마을 제사를 중심으로 마을신앙은 마을공동체가 믿는 마을 신에 대한 의례를 행사하며 모두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함으로써, 마을공동체나 정서적 유대관계의 구심이자 마을의 전통유산이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과거에는 마을을 구성하는 이주민과 토박이가 마을공동체이자 전승공동체로 존재했지만, 도시화 이후에는 두 기능이 분리되어 마을 제사의 전승에 어려움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에 발표자 권선경은 경주 임씨의 집성촌인 서울 신내동 능말의 사례에 주목하여 도시화 이후 마을 공동체와 마을 제사의 변화를 살펴본다.

 현재 서울특별시 중랑구에 속한 신내동 능말은 임진왜란 이후 오랜 기간 경주 임씨가 세거해 온 집성촌의 자연마을 이름으로,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입되었다. 2010년에 마을개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능말 사람들은 농사를 생업으로 삼으며 상부상조했고, 전통가옥과 경주임씨 문중묘가 마을 안에 함께 존재했으며, 능말 도당제를 지내는 등 전통사회의 모습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마을이 개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능말 주민들의 생활환경은 크게 변화하였으며, 오랫동안 전승되던 능말 도당제가 중단되기도 했다.

 개발 전 능말에서는 명절이나 상을 치를 때도 성씨를 가리지 않고 마을 어른들 모두에게 세배를 하거나 마을 단체로 상장례를 치르는 등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하였다. 특히 농사를 기반으로 한 마을에서 마을 제사는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2000년대 후반까지도 밭농사와 논농사를 생업으로 삼던 능말 주민들에게 도당제는 매우 중요한 행사로서 이어졌다. 한편, 도당제는 집성촌 마을에 새롭게 이주한 이주민들이 기존 공동체에 편입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타 지역과 타 성씨가 일부 유입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주 임씨가 능말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때 도당제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정성을 드리는 마을 제사로 진행되었는데, 경주 임씨가 아닌 이주민들은 마을 공동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경주 임씨 집성촌의 지연공동체에 편입되어 정착할 수 있었다. ,이 전승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은 마을이라는 자연공동체에의 소속을 의미했다.

 개발 전 능말은 크게 주거공간인 가옥, 생업공간인 농토, 그리고 문중 공간인 문중묘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도시개발이 이루어짐에 따라 기존 마을이 해체되면서 전통가옥을 포함한 마을 전체가 철거되었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능말이 아닌 인근 경기도 지역에서 논밭을 가꾸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거주공간과 생업공간이었던 능말은 거주공간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또한, 경주 임씨를 비롯한 다수의 마을 사람들이 도시개발 후에 다시 능말에 정착하면서 종친공간이 변모했다. 대개의 경우 집성촌의 해체는 마을 공동체의 해체인 동시에 종친공간의 와해를 의미하는데, 능말의 경우 오히려 집성촌이 해체된 이후 종친공간이 재구성되고 강화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도시개발로 토지, , 그리고 경주 임씨 문중산이 수용되면서 경주임씨 종친들은 자신들의 거처뿐 아니라 조상들의 선영(先塋)을 새로운 지역에 다시 마련해야만 했다. 이에 종친들이 흩어질 것을 우려한 능말 경주 임씨 종친회에서는 마을을 비우기 전 종친들을 조사하여 명부를 만들어 종친회를 재정비했다. 이는 혈족공동체이자 지연공동체로 존재하던 경주 임씨 공동체가 지연공동체로서 해체의 위기를 느끼며 추진된 작업이었는데, 결국 혈족공동체의 결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발 이후 능말에는 경주 임씨파 시조의 이름을 현판으로 단 경모각을 설립하여 보전을 마련했다. 또한, 마을개발 이후 인근 지역으로 이주한 경주 임씨 종친들까지 함께 모여 중종의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종친회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후 종친회관이라는 공동 공간은 매년 정기 총회와 임시총회, 단합대회 및 복놀이 행사 등 종친회의 지속적인 모임의 동력이 되었고, 신내동은 서울의 여타 집성촌과 달리 도시개발 이후에도 여전히 집성촌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내동 능말 경주 임씨 종친회 경모각은 현재도 남아있다. ⓒ중랑방송

 한편, 이처럼 혈족공동체이자 지연공동체이기도 했던 능말은 마을개발 이후 경주 임씨 혈족공동체로서의 면모가 강화되면서 마을공동체로서의 면모는 약화되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마을제사들은 대부분 마을 안의 소공동체들이 함께 전승하는데, 능말 도당제에서 마을개발 이전 도당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모두 마을에 재정착했음에도 마을 제사였던 능말 도당제는 재개되지 않고 있다. 경주 임씨 종친회는 지연이 강조되는 마을의 소공동체라기보다 마을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혈족공동체로서, 별다른 능말 향우회를 결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종친회가 그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마을제사를 주도적으로 전승했던 전승주체는 대부분 경주 임씨 종친들이었는데, 능말에 재정착한 이후 강화된 종친회에서의 역할과 마을 공동체에서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종친회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처럼 과거 능말의 두 구심체는 마을 공동체 전체와 경주 임씨 종친이었지만, 도시개발 이후 지연공동체가 와해되고 혈족공동체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또한, 도시개발로 마을 안의 생업공간이 사라지면서 혈족공동체이면서 지연공동체이기도 했던 신내동 능말의 경주 임씨 공동체는 거주지로서의 기능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도당제는 농사의 풍요 등 신앙적 측면이 약화되고 중단된 반면, 종친회의 조상제사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도시화에 따라 변화된 마을에서 마을 제사는 옛 전통의 계승, 구심점 및 정서적 유대관계로 의미가 축소되기도 한다.

▲능말 경주 임씨 종친회 경모각 내 보전의 모습 ⓒ중랑방송

 

정리 :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