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회의: 독립운동의 국가 구상 본문

6면/학술동향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회의: 독립운동의 국가 구상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0. 4. 23:18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회의:

독립운동의 국가 구상

 

 

▲지난 8월, 본교에서는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주간을 통해 각종 학술대회와 문화제를 개최했다.

 

지난 829,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본교 아세아문제연구원에서 주최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828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되었던 김준엽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주간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일본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하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신생국가 건설에 기여한 김준엽을 기리는 동시에, 독립운동가들 구상했던 국가의 모습을 사상사적으로 접근해보는 것이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였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날 진행되었던 발표 중 일부를 뽑아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대전 활용론과 조선 독립 국가의 위상

조형열은 일제 말기 통일전선적 국가 구상의 역사적 형성 과정과 의미를 세계사와의 관계와 인민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자 시도한다. 발표자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사적 변동을 활용하여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진영적·지정학적 국제정세 인식, 그리고 국가와 인민의 역할 설정이라는 두 차원에서 국가 구상의 성격을 살펴본다.

광복 직전 중경, 연안, 미주, 소련을 비롯하여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민족해방운동세력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치닫고 있던 제2차 대전의 국면을 결정적 시기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가 도래하면 해외의 무장부대와 후방교란을 하던 국내의 대중투쟁 역량이 결합하여 동시에 폭동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하려는 전술을 세우게 되었다. 이로써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 수립될 조선의 정치체로는 선거에 의해 대표자를 선출하는 공화국이 구상되었다. 먼저, 1919년부터 임시정부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기존 공화국의 구성을 바탕으로 한 건국 방안을 모색했다. 한편, 송진우, 김병로, 이인 등 동아일보 주도층을 비롯한 국내 언론·지식인들 중 국가구상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이

들도 세계대전의 흐름에 당면하면서 점차 해방 이후 공화국 지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경우, 1930년대 후반까지도 소비에트 노선 또는 인민 정부의 수립과 소비에트 설치를 목표로 하는 단체들도 있었다.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의 국가 건설론이 8월테제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수렴되었다고 할 때, 이러한 변화는 코민테른 7차 대회의 인민전선운동과 중일전쟁 이후 일제 패망의 가능성을 목격하면서 얻은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처럼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체로서 공화국이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3·1운동과 반파시즘 전선의 영향뿐 아니라, 다수의 국내 민족주의자들이 독립 이후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상황에서 제2차대전의 전황과 194311월 카이로 선언으로 민족해방의 목적 아래

독립이 유일한 길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민족해방운동세력은 제2차 대전을 기본적으로 민주 세력 대파시즘 세력의 대결로 인식했는데, 이에 따라 연합국과 추축국이라는 구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듯, 연합국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조선은 연합국 진영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갖게 되었고, 따라서 반추축국의 승리를 예상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 외교와 같이 독립 이후를 대비하는 활동이 함께 고려되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국가 건설을 이끌고 있던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민주 진영 내에서 이념적 대결의식을 강하게 견지하게 되면서,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 진영으로 이중의 진영 구도 안에 놓이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은 제국주의 세력과 소련 등 혁명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는 인식을 유지했으며, 소련에 대한 기대와 의존이 매우 강했다. 반면 이승만과 여러 국내외 민족해방운동세력 인사들은 미국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철저한 반소 봉쇄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처럼 내부적으로 이념 대립이 잠재된 민주 진영이라는 공통성은 해방 직후 실효성을 잃어갔지만, 민주 진영이라는 공유된 정체성은 초기에 독립과 공화국이라는 운영 원리를 수용하도록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한편, 민족해방운동세력 내에서는 진영적 사고뿐 아니라 지정학적 인식도 함께 존재했다. 이러한 인식은 장차 만들어질 독립 국가를 국제연대로 방향을 설정하고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되었다. 특히 중국과 동아시아 차원에서 조선이 중국, 일본, 러시아 세 나라 가운데 위치한 조선이었기에, 독립만이 지역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며 조선의 독립은 동아시아 평화의 방법으로 이해되었다. 그에 비해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이념 대결의 형태로 조망하고 있었으며, 반소를 골자로 하는 지정학적 인식을 이끌었다. 이처럼 진영적·지정학적 사고가 작동하며 독립국가의 국제적 위상을 모색했지만, 기본적으로 강대국의 인식이 민족해방운동세력의 국제정세 인식에도 그대로 투영되거나, 독립 국가가 특정 진영이나 지정학 구도 내의 일원으로 상정되었다. , 독자적인 행위 주체로서 독립 국가가 상상되지 못한 채, 이러한 이견은 해방 이후에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해방 이후 수립될 국가와 인민의 관계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차 대전으로 정부 수립계획도 구체화되기 시작했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독립동맹, 조선건국동맹 등은 각자 건국강령을 발표하며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독립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이 독립 국가의 전망을 제시하면서 인민을 위한 정책을 필수적으로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만들어질 국가에서 인민을 위한 참여의 공간이 설정되지 않았다. 2차 대전기에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독립 국가의 수립을 염두에 두면서 공화국을 개혁·혁명의 실행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주로 국외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국가 건설 운동을 주도했고, 국내에서는 전시통제로 인해 비밀결사 주체들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인민의 역할과 자리를 만들면서 인민이 처한 사회적 의제들을 국가 건설론 안으로 흡수하려는 노력, 또는 인민이 참여하는 대중운동과 정치 활동에 대한 고민이 충분히 성숙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는 급변하는 정세를 활용하여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이 국가 건설을 긴급하게 주도하면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제2차 대전의 발발로 일어난 세계적 변동은 민족해방운동세력에게 독립을 이상이 아닌 현실로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이들은 독립 이후 정치체로서 공화국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세계사적 구도의 영향, 특히 진영적·지정학적 이해가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인민의 권리가 강조되었지만, 세계대전과 맞물려 국가 건설 과정이 민족해방운동 세력에 의해 주도되면서 실질적인 인민의 참여는 크게 위축되었다.

 

학병세대 국가구상에서 세대론의 문제

세대란 특정 출생연대 특유의 체험 층위에 기반을 두며 거대한 사건과 변화들에 깊이 각인되어 자기 이해를 형성하면서 하나의 동질적 전체로 연결되는 집단이다. 그중 세대 특유의 체험이라는 면에서 학병세대는 학병 경험의 유무 그 자체보다도 국가의 전쟁 동원이라는 환경적 조건이 반영된 세대로서 그 사회역사적 상황이 주목된다. 이에 발표자 김건우는 학병세대의 범위에 학병 기피자와 징용자를 포함시키며 식민지 학력 엘리트 집단인 학병세대를 통해 집단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트라우마가 한편으로 억압되고 다른 한편 1950년대 이후 자신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양상을 추적한다.

먼저 김준엽과 장준하는 모두 학병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 세대론이 국가와 결부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김준엽의 경우 20대에 학병과 그 탈출 경험이 인생을 지배하는 길잡이로 되었으며, ‘조국과 자기 사명을 결부하여 나는 해방된 조국에서 무슨 일을 해야만 될 것인가를 숙고한 끝에 학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장준하 역시 자기 수기의 핵심 메시지가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못난 조상에 대한 한스러움과 다시는 후손에게 욕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단호한 결의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세대가 국가를 사유하는 관점에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청춘과 전쟁이 결부되었다는 것, 그리고 학병세대를 규정할 때 고등교육이 갖는 중요성이다. 식민지인임에도 청년 엘리트로서 고등교육을 받는 것은 기본적으로 계급으로서의 함의도 지니면서도, 국가의 부재는 조선인 학병세대의 세대의식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보여준다. 한편, 학병세대는 대부분 전쟁과 함께 성장했으며, 제국의 군대에 속하든 광복군이나 조선의용군에 속하든, 해방 당시 학병들은 군인이었다.

이러한 군인과 국가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광복군 시절 이범석의 휘하에 있었던 김준엽과 장준하을 비롯한 이들에게 군인이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 해방 직후 중국에 남아 학문의 길을 택했던 김준엽과 달리, 장준하는 건군을 통한 건국 참여의 의지를 밝혔다. 제국 고등교육의 세례를 받은 조선 최고의 학력 엘리트들로서 학도병 세대를 고려한다면, ‘의 시각은 지식인 특유의 관념적이고 자유주의적 성향과 함께 전투적이고 강박적인 성향이 내부에 공존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파시즘은 당시 우익 학병세대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국에서는 파시즘이 구국의 방법으로 주목되었으며, 이범석 역시 그 영향을 받아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구호를 만들기도 했다. 이범석은 민족의식이 개인의식에 앞서야 하며, 개인의식은 철저히 소탕되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는 점에서, 넓은 차원에서 본다면 김준엽과 장준하 역시 해방 전후에는 간접적으로나마 파시즘사상의 자장권 안에 있었다. 두 인물이 파시즘을 깊이 수용하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

도 민족국가에 대한 강력한 갈망이 있었던 점은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장준하는 국가 건설과 관련된 세대론을 제시했다. 장준하가 관여한 194610월 족청 발기인대회에서 낭독된 창립선언문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근대적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봉건사회에서 직접 제국주의 식민 사회로 이행한 우리 역사는 세계사의 조류와 격리된 채 36년간 암흑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였다이 지중한 시기에 처하여 현재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민족의 동량은 탁고기명의 청년이요 학생이요 새로운 세대라고 밝혔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근대화란 곧 국가 건설과 동일한 의미라는 역사 인식, 그리고 민족의 현 단계 과제를 수행할 주체가 청년, 학생, 새로운 세대임을 선언함으로써 근대화의 선두에 자신의 세대가 있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국가주의와 사상계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의 차이보다 세대가 앞세워졌다. 발표자는 이것을 장준하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이 세대의 특성으로 해석하는데, 김준엽 등 사상계를 주도하던 학병세대 지식인들은 1960년대 초까지도 국가 건설론으로 치환되는 국가와 민족의 근대화를 지향했으며, 그 근저에는 이념을 압도하는 세대론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해방 후 김준엽은 국가와 관련하여 학문의 근대화 국가 건설을 연계하여 조국에 기여하고자 했다. 당시 학술이 건국 중심 영역 중 하나로 강조되고 있었는데, 특히 국어국문학 분야는 탈식민의 핵심 과제로서 새로운 세대가 주도하는 새로운 국문학 연구 논리가 대두되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 태어난 국가와 함께 자신의 인생도 새로 태어난 것으로 간주하며, ‘국어국문학이라는 국가 표상을 획득한 첫 세대라는 자의식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발표자는 학병세대의 세대론을 살펴보면서 박정희의 사례를 함께 제시한다. 물론, 박정희는 일반 학병세대와 달리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 자원했기 때문에 세대의식 형성 면에서 일반 학병세대와 차이가 크다. 그러나 20대를 전후하여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등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박정희가 학병세대와 동일한 세대위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군 장교라는 조건은 군과 국가를 연결하는 세대의식의 면에서 박정희를 학병세대와 함께 거론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에 따라 박정희와 장준하는 일본군(관동군)과 광복군이라는 대극점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가 가진 군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에서 공통되는 면이 있다. 5·16쿠데타를 일으켰던 세력은 스스로를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출하고 민족대로에 광명을 회복하고자 하는 뜻 있는 젊은 장교들로 지칭했는데, 이러한 자기 사명의식은 김준엽과 장준하의 일제 말기 행적에 비교해볼 수 있다. 일제 말 충칭 임시정부가 파벌 난립으로 혼란의 와중에 있을 때, 광복군 장교였던 김준엽과 장준하는 자신들이 임정의 분열을 정리하겠다는 다소 과잉된 자기 사명의식을 드러내며 임정 청사에 난입, 폭력 행사를 기도하기도 했다. 박정희 역시 5·16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초에 발간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통해 단순히 쿠데타의 합리화를 넘어, 국가적 민족적 과제와 연결하여 과거의 유산을 부정하고 자기 사명을 과잉 인식하는 상태로서 이 세대의 의식이 노출했다. 글에서 핵심 의제로 등장하는 근대화는 언제나 국가(조국)’재건과 연관되어 있는데, 식민지 종주국에 의해 추동되었던 한국의 근대적 변혁은 기형적 근대화였으므로 이를 허물고 재건(새로운 근대화)하는 것이 민족의 사명으로 제시된다.

더 나아가 박정희는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과 다를 바 없는 반동보수 세력이며, 따라서 한국의 근대화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신생독립국가인 한국에서도 2차 대전 후 여타 신생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탈식민의 과제가 제시되는데, 4·19혁명은 근대화 주체를 등장시키지 못하고 과거 기득권 집단과 지주계급을 대변하는 민주당 정권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이제 진정한혁명을 통해 근대화 과제를 완수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가 요청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장준하 계열 인사들 역시 기존 이승만 정권과 민주당 정권을 통틀어 기존 정치권 전체의 주도 세력이 해방 이전 세대라는 점을 비판했다. 따라서 우익 학병세대와 박정희 그룹은 새 국가건설을 위해 세대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혁명의 완수는 국가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였는데, 혁명의 주체는 뜻있는 젊은 장교들로 이루어진 후속 세대와 함께 혁명을 완수했다고 표방함으로써 혁명의 당위성을 세대론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했다. 결국, 국가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연결하는 과잉된 자의식은 박정희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 이 세대의 의식 특성을 보여준다.

전쟁과 함께 20대 전후 시기를 보낸 식민지 남성 청년엘리트들 사이에서는 과잉된 세대의식이 대두되었고, 학병세대는 억압된 남성성의 귀환 서사로 남게 되었다. 자신에게 각인된 식민지 경험을 망각하기란 불가능했으며, 그들이 학병으로 들었던 은 국가 부재의 상태에서는 오욕의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억압된 남성성의 형태로 존재하던 욕망이 해방 후 다시 살아나 총을 들고귀국하여 군인이 되거나, 혹은 자신의 운명을 국가라는 더 큰 욕망과 동일시하며 억압된 남성성을 회복해 갔다. 결국, 태평양전쟁기 청년이었던 이 세대에게 국가는 억압된 남성성이 회복되고 증명되는 자리였다.

 

 

정리 :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