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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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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면/학술동향

김윤식 교수 5주기… 그의 연구와 비평을 재조명하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1. 7. 21:16

김윤식 교수 5주기… 그의 연구와 비평을 재조명하다

▲ 김윤식 서울대 명예 교수 ⓒ 한겨레신문

 

지난 2018년 작고한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2001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저명한 학자들을 길러냈다. 학위논문을 기반으로 낸 첫 책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를 시작으로, 이상 연구(1987), 임화 연구(1989), 한국문학사(1996), 이광수와 그의 시대(1999), 염상섭 연구(1999), ·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신론(2001), 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2002), 일제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2004), 내가 읽고 만난 일본(2012) 200권이 넘는 저서를 집필한 그의 연구 범위는 국문학의 전 분야를 아우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김윤식 교수의 연구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1021일 서울대학교에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번 학술대회는 국립한국문학관과 한국현대문학회·춘원연구학회·이상문학회·서울대학교 국어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신진·중진 등 세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연구자들이 모여 김윤식의 연구와 비평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마련했다. 학술대회 발표가 끝난 이후에는 제2회 김윤식 학술상 시상식도 함께 개최되었다. 김윤식 학술상은 한국 현대 문학 연구자 중 우수한 업적을 남긴 이에게 주는 상이며, 수상자로는 한국 근대시와 말·문자·노래의 프랙탈(2022)를 집필한 조영복(광운대 교수·문학평론가)가 선정되었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날 진행되었던 발표 중 일부를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문학사가(文學史家)’로서의 김윤식

김윤식은 평생에 걸쳐 한국 근대문학사를 기술했고, 스스로도 문학사가라는 정체성을 강력하게 견지한 바 있다. 신진 연구자 세션의 첫 발표를 맡은 이영서는 김윤식의 문학사가로서의 정체화(identification) 과정에 주목하여, 그 안에 내포된 김윤식의 원형적 욕망을 탐색한다. 그가 방법론으로 삼은 이 정체화란, 고정된 주의(主義)나 사상을 통해 파악되는 정체성이 아닌,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동적(動的)인 특징을 갖는 개념이다. 모든 주체는 시대의 작용에 따라 나름의 반작용을 일으키며 어떤 주체이고 싶은가에 대한 욕망을 구성해 나가기 때문에, 가혹한 위기의식과 치열한 응전의식을 가진 김윤식의 정체화 과정은 더더욱 변곡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발표자는 문학사가김윤식의 의도와 계기를 해명하는 작업을 펼쳐 나간다.

김윤식·김현의 문학사 기획인 한국문학사문학과지성에서 계간으로 8번에 걸쳐 연재되었던 것을 모아 엮은 것으로, 처음 연재될 당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당대 문학잡지를 양분하고 있었던 창작과비평의 필진들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문학과지성의 논자들 역시 실시간으로 이들의 기획을 논평하거나 비판했다. 김윤식과 김현은 한국문학사를 통해 한국 문학은 그 나름의 신성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후 한국 문학의 나아갈 길을 선언했다. 한국문학사에 담긴 이들의 선언이식문학론(혹은 전통단절론)’을 극복하여 한국 문학의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안으로부터의 필요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학계에서 제출한 내재적 발전론에 호응해야 한다는 밖으로부터의 요구로 인해 한층 더 거창해졌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선언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이자 새로운 고향이 되었다.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부분 1장 방법론 비판을 보면, 이들 선언의 핵심을 파악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문학사는 실체가 아니라 형태이다(김현)”라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문학은 개별 문학이다(김윤식)”라는 선언이다. 먼저 문학사가 실체가 아니라 형태여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는 문학사의 특수성을 강하게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학사의 기술 대상이 되는 문학적 집적물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체를 매거하는 방식으로 기술된 것이 아니라, 여러 문학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의미망속에서 문학사가에 의해 관계 가치를 가진 형태를 부여받는 것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한국 문학이 개별 문학이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는 한국 문학의 특수한 굴레인 주변성을 극복하기 위해 도출된 것이며, 이때 이 주변성은 한국 문학이 주된 발전적 흐름에서 뒤쳐져 있다는 후진성과 역사의 중심적 사상이나 사조로부터 밀려나 있다는 지방성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이러한 주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 문학의 독립성을 확보하여 주류/중심 기준에서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담보해야만 한다. 그래야 여전히 세계 문학의 자장에서 여타 문학들과 동등한 상태로 함께 남아있을 수 있으며, 이 양자를 모두 충족시키는 개념이 개별 문학인 것이다. 그리하여 개별 문학으로서의 문학사는 결국 주류/중심의 좌표에서 자유로워져서 스스로의 기준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이것이 곧 김윤식과 김현의 선언, 더 나아가 한국문학사를 기획하고 기술한 그들의 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한국문학사의 기획은 견고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오히려 실패가 내재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한국문학사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기술 단계에서 최초의 기획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사에서 이들은 역사적 시기구분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780~1880년에 이르는 영·정조시대로 근대문학의 기점을 끌어올릴 필요를 역설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철저히 실체만을 근거로 들고, ‘주류/중심만을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한중록은 근대문학을 위한 근대의식의 핵심을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이다. ‘한민족의 언어의식을 내면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게끔 자국어인 한글로 쓰인 작품이며, 특정된 개인에 의해 쓰인 내간체 기록 문학으로서 조선 후기의 다른 소설과는 다르게 개인의 창의성에 의해 새로운 장르로 개척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소개를 통해 아주 잠시 언급되었을 뿐, 역사로서 기술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이내 저자에 의해 한중록의 강점은 조선 후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으로 국한되어버리고, 그 중요성은 사회구조나 역사 쪽에 갇혀버린다. 그렇기에 작품 자체의 구조나 내용을 검토한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문체에 담긴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야만 자국어를 통해 녹아나온 개인의 근대(언어)의식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고, 작품의 구조를 분석해야만 새로운 장르로서의 체계와 의의를 확립할 수 있을 텐데도, 선언적으로 그것을 미리 포기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문학사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대로서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두 가지 욕망, 문학 연구자·비평가 주체로서의 욕망과 역사서술자 주체로서의 욕망이 김윤식과 김현의 내면에 중첩되어 있었고 그것이 끝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신성한 것형태를 위한 기획과 서구-근대적 보편성실체를 위한 기술까지도 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더욱 중요한 것은, 김윤식이 이 한국문학사를 기획할 시점부터 이 두 욕망의 조화불가능성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윤식은 이미 한국문학사서론 부근에서 역사 서술은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당위로서의 실천적 요구라는 점을 강조하며, 문학사의 서술 자체가 극복의 사명이 아니라 패배의 사명을 부여받은 작업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 기획된 실패를 통해 김윤식은 스스로를 문학사가로 정체화했으며, 그 패배의 흔적이나마 다음 세대에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곧 가르치는 문학사가로서 하나의 기준인 동시에 비판의 대상도 될 수 있는 문학사의 전범을 남기고자 한 그의 욕망일 것이다. 발표자는 이 욕망을 섬세하게 읽어내며, 예정된 실패를 향해 과감히 나아가는 그의 태도를 다시금 조명하고 있다.

▲ 제1회 김윤식 학술대회에서 신진 연구자들이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김윤식이 읽고 만난 일본과 일본의 현대지성

김윤식은 두 차례의 일본 유학(1970~1971, 1980~1981)을 경험했다. 일본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일본의 여러 현대 지성들과의 만남(읽기)를 통해 자신의 글쓰기를 정련하고 문학적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발표자 권성우는 오랜 인연과 학문적 우정을 나눈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와의 만남, 비평하는 주체의 고독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와의 만남, 글쓰기가 모든 것이라는 태도와 다양한 스타일의 글쓰기로의 확장을 선사해 준 에토 준(江藤淳)과의 만남, 실감으로서의 글쓰기를 감각하게 해 준 모리 아리마사(森有正)와의 만남 등을 통해 1970년대 중반까지 학술적 글쓰기의 영역에 한정되었던 김윤식의 글쓰기가 어떻게 변화·확장되어 갔는지 살펴본다.

김윤식은 글쓰기 인생을 영위한 거의 전 시기 동안 일본, 일본문화, 일본문학, 일본지성과의 진솔하고 열린 대화를 통해 한국 근대문학을 연구하고 해석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은 우리 문인들이 근대문학을 배우고 익힌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김윤식은 두 번에 걸친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만년의 걸작 내가 읽고 만난 일본(2012)에서 직접 밝히고 있듯, 김윤식은 일본 유학을 거친 우리 문인들의 발자취를 자신이 직접 따라가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연구로 나아갈 수 없다고 단언해왔던 것이다.

1970, 첫 번째 일본 유학 시절에 김윤식은 오무라 마쓰오를 만난다. 오무라 마쓰오는 조선에 대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라고 말하며, 평생 동안 조선 문학 연구에 힘쓴 학자이다. 김윤식은 일본에서 조선문학의 회의 멤버인 오무라와 교류하며 한일문학에 대한 지평을 넓혀나갔을 뿐 아니라, 그의 도움으로 인해 와세다 대학에 비치되어 있는 근대 문인의 자료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훗날 김윤식의 저작이 탄생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글쓰기와 문학연구, 비평적 관점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오무라는 김윤식의 이러한 유학 체험이 담긴 저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에 수록된 임화연구한일문학의 관련양상(1974)에 수록된 글들을 일본어로 번역·편집하여 상흔과 극복 : 한국의 문학자와 일본(傷痕克服韓国文学者日本)(新日新聞社, 1975)을 펴내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오랜 인연과 각별한 학문정 우정은 한일 지정의 오랜 학문적 유대와 신뢰, 그리고 깊은 우정을 상징하는 일종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문인과의 만남과는 별개로, 그 중에서 그의 글쓰기와 비평에 가장 밀도 깊은 영향을 준 문인은 단연 고바야시 히데오일 것이다. 김윤식은 일본 유학 시절 수많은 일본어책을 읽으면서, 고바야시에 매료되어 외경의 경지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그에 대한 논문까지 썼다. 그러한 과정에서 김윤식은 비평()’를 둘러싼 근원적인 질문, 비평()’의 본질와 존재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김윤식은 비평이 시나 소설 못지않게 또 하나의 창작이자 독자적인 표현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고바야시를 접한 이후부터 그는 비평의 자율성과 독자성, 비평적 자의식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김윤식에게 비평이란, “비평하는 주체의 생명의 표현(가치 창조)이라는 점이 그의 비평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런 비평에 대한 사유는 고바야시와의 만남, 자극, 영향을 통해 그만의 비평으로 진화해 나갔던 것이다.

반면 에토 준과의 만남은 극히 우연이었다. 그러나 김윤식보다 세 살 연상이었던 에토 준의 글쓰기 방법과 태도는 그에게 소중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김윤식은 에토 준의 저작을 살펴본 후에 그 글쓰기 태도의 핵심을 강아지 기르는 시간만 빼면 먹는 것, 자는 것, 말하는 것, 심지어 숨쉬는 것까지 오직 글쓰기뿐이라는 것. 숨쉬기조차도 글쓰기를 위해 있다는 것. 이 앞에서 아이는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글쓰기가 전부라는 에토 준의 생각은 김윤식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의 글쓰기 태도를 다잡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7310월에 작성한 한국근대문학의 이해책머리에 부쳐에서도, 혼신의 글쓰기, 혼신의 읽기(2011)라는 월평집 제목에서도 글쓰기가 모든 것이라는 태도가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인생의 모든 열정을 바친 글쓰기는 그의 생 전체를 관류한 명제이자 자의식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주로 학술적 차원의 근대문학 연구에 주력하던 김윤식의 글쓰기는 1차 일본 유학이라는 경험에서 얻은 자극을 되새기며, 점차 비평과 월평, 예술기행 등 다양한 글쓰기로 확대되었다. 또한 김윤식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1999)라는 제목과 관련하여, “나는 나쓰메 소세키 연구를 위해 런던의 풍속 및 정신사를 추체험한 에토 준의 학위논문을 연상하곤 했다. 이 제목이 에토 준의 소세키와 그의 시대에서 왔던 것으로 회고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관류하는 방법론은 에토 준이 채택한 나쓰메 소세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밟기, 추체험하기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에토 준은 이처럼 김윤식에게 연구적 방법론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애초에는 이광수를 비롯해 근대문인들의 일본 체험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 왔던 김윤식은, 고바야시 히데오와 에토 준과의 만남을 통해 비평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에게 비평은 생명에 가까운 글쓰기, 즉 주체의 실존과 내면이 좀 더 생동하는 글쓰기이자 그 자신의 존재 문제와 대면하는 글쓰기였다. 물론 그는 연구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글쓰기 형식과 스타일이 이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월평, 평전, 에세이, 예술기행으로 한층 다채로워졌다고 할 수 있겠다.

1980, 두 번째 유학 시절에 김윤식은 모리 아사마사의 저서 바빌론의 흐름의 기슭에서를 만나게 된다. 가족을 버리고 1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내면을 그리는 데 몰두했던 한 일본인 교수의 이야기는 그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밤마다 이 책에서 큰 위안을 받았으며, “외로움의 언저리를 맴돌던 내게 이 저술은 참으로 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고 회고한다. 혼자 도쿄에서 이광수를 연구하고 있던 김윤식의 내면에는 모리와 같은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는 그토록 모리의 저작과 에세이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파리를 둘러싼 문화적 감각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생성된 사상(글쓰기)사상적 철학적인 저술을 읽고 얻어낸 사사오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치밀하고 강인한 것이었다. 모리 아리마사의 글쓰기가 그러했고, 김윤식은 그의 감각을 온전히 내면화하며 자신의 글쓰기, 또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읽고 쓰는 데 평생의 시간을 할애한 그의 이러한 학문적 겸허함이야말로, 오늘날의 김윤식학()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씨앗이 될 것이다. 또한 그 씨앗이 자라는 데 일본과 일본의 현대지성은 귀중한 영양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 : 조수아 기자 lovelove992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