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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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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면/학술동향

한국(어) ‘문학’의 미래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Jen25 2024. 3. 9. 16:08

한국() ‘문학의 미래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문명의 전환과 세계화의 바람 속에서, 한국() 문학 또한 다른 맥락에서 사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한국() ‘문학의 이론적 연구, 보다 새로운 문학을 상상하며 과거와 현재의 문명사적 전환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더 나아가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측해보자는 것이다. 그러한 취지 아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BK21 한국어문학 교육연구팀은 구보학회·이상문학회와 함께 한국() 문학의 미래와 그 가능성을 논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본 학술대회는 지난 1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4동 신양학술정보관(302호 국제회의실, 308호 세미나실2)에서 개최되었으며, 여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의 현장에 있는 비평가들까지 모여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국어학, 현대문, 고전문학 등의 한국어문학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연구의 최근 동향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한국어문학의 최전선세션을 시작으로, 한국의 현실에 대한 언어적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둘러싼 인간존재와 환경의 위기, 전쟁과 분쟁 등의 현안을 짚어본 문학적 상상력과 미래학세션, 그리고 신진 연구자들의 발표로 구성된 자유발표세션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본지에서는 본 학술대회에서 진행되었던 발표 중 일부를 뽑아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 연구자·비평가들이 모여 한국(어)문학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제국의 장기지속, 그 횡단과 초극

 

한국어문학의 최전선세션의 발표자 최현희는 최근 한국 현대문학 연구에서 주요하게 부상한 냉전문화론에 주목하여 그와 관련된 연구의 향방을 분석한다. 우선 문학 연구에서 냉전사()가 출현하게 된 이유는, 탈냉전기에 이르러 냉전기 동안 억압 되어 왔던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와 식민지/점령지에 대한 폭력이 재이슈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경향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즉 탈냉전기가 도래한 이후에도 또 다른 제국(미국) 중심의 전후 질서에 종속되었던 일련의 상황을 식민지성의 연장으로 보고, 그것의 복합적인 면면들을 탐구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 식민지성의 다층성과 그에 따르는 탈식민화의 난점을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것이, 2010년대 이후부터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냉전문화론의 기반을 이루는 문제의식인 셈이다. 발표자는 그 문제의식을 더 간단히 축약하면 제국의 장기지속이라 칭할 수 있다고 하며, 그것은 곧 근대 내내 식민지성이 본질이었던 한국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때 나타나는 세계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 때, ‘트랜스퍼시픽(transpacific)’한 비판, 다시 말해 일본제국과 냉전기 미제국의 억압된 연속성에 대한 태평양횡단적인 관점이 무엇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제국의 장기지속을 포괄한 트랜스퍼시픽한 비판은, 제국-식민지 체제가 붕괴되고 식민지의 저항적 내셔널리즘이 현실화된 듯 보이는 냉전기 아시아가 사실은 신제국에 의한 신식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트랜스퍼시픽한 관점에 설 때, 우리는 전후(戰後) 아시아의 국민국가들이 여전히 미완의 탈식민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음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다. 발표자 최현희는 그 점에 주목하여 한국문학연구에서 트랜스퍼시픽한 관점을 적극 도입하여, 식민-냉전으로 이어져 온 문화적 교환 관계를 파악해야 함을 주장한다.

트랜스퍼시픽한 비판은 냉전 아시아를 단순한 물리적 영토가 아니라 식민지성의 본질이 체현되고 있고 수행되는, 복합적인 이론적 현장으로 형질 변환시킨다. 다시 말해, 근대세계가 확립되면서 아시아는 국민국가들의 단순한 집괴가 아니라 언제나-이미 식민지성을 현실화하는 수행성의 내적 현현(顯現)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에 있어 냉전문화, 혹은 문화냉전의 연구가 한국이라는 네이션 단위와 세계적 보편성 사이에 아시아라는 중간 단계를 설정하는 구조를 취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냉전의 역사적 종언 이후 한국뿐 아니라 세계 전체를 하나로 묶는 세계화(globalization)된 세계상의 창출 과정에서, 한국의 언설공간이 아시아라는 기표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는 양상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아시아는 분명 제국의 장기지속으로서의 근대의 대안으로 한국 냉전문화론에서 중요하게 호출되지만, 한편으로 아시아의 이러한 대안성은 서양 근대의 보편성을 보충함으로써 제국의 지속성을 또 다른 방식으로 무한히 연장하는 데 동원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식민지-냉전으로 이어지는 근대 세계체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의 직접적 계기로서 네이션이 있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잠재성으로 아시아가 있는 세계상이 창출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본질적인 식민지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또 다른 네이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아시아는 분명 제국-식민 체제의 초극을 위해 구상된 개념이었으나, 그 역시 그 체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탈식민화된) 네이션을 강조하게 되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계는 탈식민화 과제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실감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네이션의 직접적인 탈식민화가 필요함을 방증해준다.

앞서 언급되었듯 트랜스퍼시픽이라는 개념은 식민지-냉전을 일관하여 유지되는 미·일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적 지배에 대한 비판과 서양 근대 자체에 내재한 서양-잔여(殘餘)의 상호보충적 관계를 넘어서기 위한 전망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아시아의 대안이라는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처음으로 트랜스퍼시픽한 비판을 방법론으로 삼았던 리사 요네야마(Lisa Yoneyama)의 경우, 대안아시아라는 지리적·영토적 범주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의(justice)와 공동체라는 이념적 영역에 위치시킨다. 이때 정의란 식민지인으로서 제국의 폭력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의 편에서 구현되는 정의로, 일본의 전쟁범죄를 단죄하고 회복된 미국적 정의라는 냉전기의 이행기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일본 제국의 이름으로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피해가 남겨졌지만, 그 피해는 자기 이름의 회복을 통해 혹은 일본제국의 완전한 자기부정을 통해 구제되지 못했다. 일본 제국이 미국으로 대체되는 것을 정의로 포장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구제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내셔널리즘에 따라 구성된, 전후 세계의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국가가 형성한 이 체제는 제국의 트랜스퍼시픽한 지배가 은폐되는 과정에서 자연화된다. 요네야마는 그러한 이행기적 정의를 극복하는 것은 정의가 국민국가의 소관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들 사이에 역설적으로 성립되는 무조건적 형제의 공동체의 소관이라고 주장한다.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피해를 당한 희생자, 그리고 그 회복 불가능성을 철저히 인식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행위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한히 용서를 비는 가해자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공동체를 이룰 만한 공통성도 없다. 그러나 그 제국적 네이션에, 내셔널리즘에 포획되지 않는 언어를 유지하는 과정이야말로 냉전을 넘어서는 어떤 대안적 지평을 제시하는 것일 터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국민국가가 주권을 작동시켜 회복시켜주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지는 무조건적 형제애를 축으로 한 공동체에 순간적으로 함께 귀속가능하다.

하지만 물론 그 공동체 역시 냉전의 폐허에 나뒹구는 잔해들이 수동적으로 이루는 임시적, 일시적 연대에 불과하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요네야마가 그려 보이는 피해자의 정의에 기반을 둔, 용서의 불가능성을 축으로 하는 공동체라는 것도 대안으로서의 아시아방법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녕 식민지와 냉전기를 관통하며 장기지속하는 이 제국을 초극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다시 트랜스퍼시픽한 비판정신으로 돌아가서, 트랜스퍼시픽에서 퍼시픽은 제국 자체가 아니라 제국들의 사이, ‘트랜스는 그 사이의 횡단을 가리킨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트랜스퍼시픽한 비판은 제국을 넘어서는 어떤 긍정적 전체(entity)에 도달하기 위해 구상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장기지속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구조로서의 제국의 역사적 구체화 현상들 사이에서 불안정한 주체의 위치를 굳이 유지한 채로 유동하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그렇기에 식민지-냉전을 초극하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정체화할 수 있는 어떤 전체를 요구하는 식의 태도는 애초에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네이션이라는 장소에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정체화하기를 멈추고 네이션의 내용을 트랜스라는 형식으로, 그것을 위반하고 침범한다는 의미에서의 트랜스를 시도하며, 초극의 가능성을 타진하겠다는 과제 자체를 끊임없이 의문시해야할 것이다.

 

▲ ‘자유발표’ 세션에 모인 신진연구자들.

 

 

프랑스에서 바라본 한국문학의 전망

 

문학평론가·번역가·출판인으로 20여 년간 프랑스에 한국문학을 알리는 데 기여해 온 장클로드 드크레센조(Jean-Claude de Crescenzo)는 외부자이면서 동시에 내부자의 눈으로 한국문학의 현실과 전망을 꼼꼼히 분석한다.

최근 한국문학번역원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한국문학은 전 세계(특히 일본·앵글로색슨 국가)에서 전례 없는 인기를 끌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나타나지만, 매출 차원에서는 대조적인 양상을 띠기도 한다. K-POP의 영향으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도 함께 증가하고 있으나, 아직 그 관심이 문학·번역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연간 발행되는 12,000여 종의 번역서 중 한국어 번역서는 50~60(0.1~0.3%)에 불과하며, 이는 영어 번역서 7,500여 종(59%), 일본어 번역서 1,500여 종(18%)에 비교했을 때 상당히 저조한 편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발표자는 세 가지 문제, ‘번역서 수’, ‘문학상 수상’, ‘판매량을 제시하며 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들이 하루빨리 해결되어야 한국문학이 더 적극적으로 번역될 것이라고 본다. 역시 번역서 수가 증가되는 것이 우선이고, 해외에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중심으로 번역되는 경향이 있기에 그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며(노벨문학상 수상 등), 출판 시장의 현황을 알려주는 지표인 판매 수치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근대문학(소설)종언이 거론되는 현재, ‘소설이라는 영토에서만 머문다는 것은 문학이 지닌 표현의 잠재성을 박탈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프랑스 내에서 읽히는, 혹은 알려져 있는 한국문학은 대부분 소설이며, , 수필, 시평, 철학 에세이 같은 다른 장르는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국문학은 풍부한 특징을 갖고 있는 문학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평가는 한국문학의 입지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에 소설에 국한되지 않은,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저서들이 우선적으로 소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언어를 실험하는 사명을 저버리지 않고 언어 고유의 증언, 즉 세계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증언을 다시 떠맡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대열에 합류하면서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반드시 이 문학의 역할을 떠올려야 한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이 목도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문학을 지향하고자 하는 열망과, 특정한 토양과 문화, 국가와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려는 성향 사이에서 흔들리는 어떤 문학, 그 문학의 발자취이다.

 

한국문학사에서 기후소설의 상상력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기후 소설(Climate fiction, Cli-fi)’이라는 말이 영미 문학계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지 10년 정도가 지났으나, 한국문학에서 이를 담론화하는 것은 이제 시작 단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상상력과 미래학세션 발표자 임태훈은 지구온난화와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본격적으로 의제화되기 시작한 기후 위기를 어떻게 문학적으로 사유할 것인가와 관련한 선구적인 논의를 펼친다.

기후 소설은 미래의 비/인간형을 발명하는 일과 관련된다. 재앙을 피하는 데 실패했더라도, 심각하게 변화한 기후에서 인류가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희망이나 절망에 간편히 휩쓸리지 않고 이전 시대와 다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인류가 폐허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을지, 놀랍도록 덤덤히 재앙에 적응해서 명랑과 유쾌를 이어가고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그 모든 가능성의 행로에서 우리는 최선의 지혜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문학이 마땅히 그 역할을 해야 하겠으나, 오늘날 한국에서 기후 소설은 그 자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재난 서사와 같은 맥락 속에서 묶이는 경향이 있다. 발표자 임태훈은 가장 먼저 이 점을 문제시하고, 기후 소설의 문제의식은 반드시 재난 서사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라는 양식이 인간 중심적인 프레임 워크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기후 소설은 인간이 아닌 비인간적 요소인 환경에 초점을 맞추고, 환경에 우선순위 혹은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은 일반적인 소설(인간의 재난 극복 서사)에서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비인간적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고와 자연과의 비지배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기후소설은 새로운 장르로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재난 서사가 재난의 인과관계를 좇아 기승전결을 구성하고, 영웅의 탄생을 찬미하거나 구원자로서의 국가를 요청하는 익숙한 결말을 택해왔다면, 기후 소설은 인간 중심성을 걷어낸 환경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에서 차별화된다. 현 시점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기후변화를 인식할 언어와 개념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생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시적 언어의 창안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Cli-fi’라는 새로운 개념부터 하나의 예시가 되는데, 이렇듯 확장된 언어-내러티브 구성의 장()을 형성한 기후 소설은 한국문학사에서 뜻밖의 파토스를 발산하며, 기후변화 담론까지 확산하는 더 강렬한 매개체로 거듭날 것이다. 아직 우리 문학사 내·외부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 감정 상상력은 무엇인가? 부재한 것을 새롭게 생성해내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고, 이 시도를 가로막는 억압의 힘이 있다면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훗날 이 질문들은 기후 소설이 새로운 비/인간형의 사회를 향한 혁명적 정서를 생성하는 정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리 : 조수아 기자 lovelove992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