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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문학장(場)의 길항과 이광수라는 동인 본문
문학장(場)의 길항과 이광수라는 동인
춘원(春園) 이광수(1892~1950)는 한국 근대문학의 시작을 연 문학자이자 평론가이며, 시대의 경랑 한 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그는 최남선과 더불어 신문학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문학이란 何오’라는 질문에 대한 탐구를 지속함으로써 문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구성했다. 『무정』(1917), 『재생』(1925), 『흙』(1933) 등 숱한 명작들은 그의 문학적 업적을 방증해주지만, 한편으로 그는 일제 말기 창씨개명, 학병 권유 등의 친일 행각으로 인해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온 작가이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광수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시사점들을 던져주며, 친일/반일의 이분법을 넘어 그의 삶과 문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을 마련하고 있다. 이에 춘원연구학회에서도 힘을 실어, 제국주의와 근대주의 사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광수의 좌표를 다시금 인식해보기 위해 지난 3월 16일(토)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어문회관 8층 강당에서 행해졌으며, 신진·중진 등 세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연구자들이 모여 이광수와 그가 거쳐 온 시대에 대해 논했다. 따라서 본지에서는 이 날 진행되었던 발표 중 일부를 뽑아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춘원 이광수의 고뇌 : 자아주의와 결단주의
발표자 양순모는 1920년대 이광수의 문학장(場) 내외의 활동들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살펴보고자 했다. 이광수의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동인지 세대는 개인(자아)와 개인(자아)들 사이의 경쟁이라는 구도를 통해 근대 문단이라는 문학장을 형성하여 근대문학이라는 객관적인 제도를 구축해오면서, 비로소 한국 근대 문학이 본격적인 역사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자아들 사이의 경쟁으로 구성되어 계몽의 일반적인 목소리만이 남게 된 당대 문단을 떠올려 본다면, 이광수와 그 세대의 방식은 타자적 역할을 찾아볼 수 없는 문학사적인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이광수는 ‘문단’이라는 제도와 ‘문학장’이라는 담론장을 개인/개인의 경쟁 혹은 대립이라고 보았던 것인지, 혹은 아예 당대의 ‘문단’이라는 제도 자체를 끝까지 ‘거부’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고유의 자율적 담론을 생산하는 그 장(場)을 과연 이광수는 받아들였던 적이 있었던가. 당대 문학장 내 이광수는 독특하고도 주요한 동인(同人)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가 ‘문단’이라는 당대의 제도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면, 즉 ‘경쟁’을 거부하고 ‘민족의 적’을 소탕하기 위한 기획을 수행한 것이라면, 1920년대 초중반 이광수의 활동을 두고 우리는 ‘퇴행’이 아닌, 매우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적인’ 활동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21년 3월 상해로부터 귀국 이후 이광수의 행보는 1910년대의 모습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근대 보편적 개인성 및 정의 자율성의 차원에서 「문학이란 何오」에 개진된 개인적 진정성의 영역은 1920년대에 이르러 민족 계몽이라는 공동체적 차원의 가치로 덮여 가려졌다. 그렇기에 이광수는 스스로 제기한 자유주의적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고, 서둘러 ‘도덕적 주체’에 위임하는 방식으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근대 보편적 개인성을 둘러싼 이광수의 주장들을 특정한 방향 안에서 나름대로의 변화를 이루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3·1운동의 가능성과 그에 대조되는 임시정부의 역량, 독립 전쟁론의 암울한 전망과 세계 질서의 냉혹함(이후 워싱턴 회의) 속 조선으로 귀국한 이광수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1910년대의 이광수는 사회에서 ‘비판’을 변화와 진보의 동력으로 보았으며, 그것이 발표, 교환, 토론, 비평의 과정을 거쳐 편견과 오류가 교정됨으로써 대다수의 신임을 받는 정치, 법률, 도덕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1920년대의 이광수는 민족 개조를 기획하는, 즉 목적을 정하고 방법을 선택하는 주체는 오직 한 사람뿐이라고 주장하며, 그 지도자만이 민족을 개조하는 힘을 펼칠 수 있다고 말했다. 사회와 여론은 통치의 주체가 아닌 지배의 대상이 되고, 1910년대 사회를 탄생시키고 그것을 지탱해 온 비판과 토론은 이제 민족 개조의 모든 단계에서 배제해야 하는 것이 된 셈이다. 1910년대 사회를 자기통치(자율)의 주체로 세우는 글쓰기를 통해 당대의 ‘사회’를 구축하고자 했던 이광수는 「민족개조론」(1922)에 이르러 정치문화의 ‘변화’를 불안해하고 그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비쳤다. 그럼으로써 경쟁 자체를 부정하며 지도자의 정치와 카리스마의 정치를 수행하게 되었다. 1910년대 이광수의 계몽 담론이 민주적인 ‘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1920년대 이광수는 ‘단체-민족’을 중심으로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계몽 담론을 개진한 것이다. 대개 이러한 그의 변화는 일제의 헤게모니적 지배의 성공을 증거하는 것이자 그것과 궤를 같이 하는 기획으로서 ‘문화적 파시즘’의 일단으로 규정되곤 한다. 또한 이와 같은 부정적 규정은 앞서 말한 문학사적인 ‘퇴행’과 같은 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광수의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은 1910년대에도 잠재되어 있는 특징일 수 있겠으나, 1920년대에 이르러 그것이 이전과 확연하게 도드라진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쟁을 거부하고 ‘민족 내부의 적’을 설정하는 행위, 한 단체-민족의 주권자가 되고자 하는 행위, 그 정당화 과정에서 보여주는 신학적 행위 등은 단순히 이광수의 한계로만 규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위들은 정치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불가피한 것일 뿐 아니라 정당한 정치적 활동으로도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정치신학은 ‘정당한 적’을 올바르게 특정하여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벌이자는 것을 핵심 테제로 삼아, 끝없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요컨대 ‘전쟁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되었다. 따라서 정치신학론자들은 전쟁을 종식할 초월적 주권자를 요청하고, 만인의 갈등을 봉합시킬 수 있는 일반적 선(善)을 추구해 왔으며, 근본적으로 그러한 ‘결단’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식민지기 국가 부재라는 상황에서 그것을 대신한 것이 ‘민족’이었다고 한다면, 그 지도자 자리를 자처하면서 사회와 문화를 기획해 나간 이광수의 행보는 정치신학에서의 주권자적 행동과 겹쳐 볼 수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편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정치신학에서 설정한 ‘적’이 자유주의-보편주의 정치학에 의해 새로이 전유된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 실존을 습격하는 ‘외부의 적’과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내부의 적’이 결과적으로 식민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에 기반한 국제 정치 질서가 식민지를 ‘적’으로 삼아 정치적인 것을 수행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민족개조론」에서 드러나는 민족의 ‘적’이 조선 내부를 향할 때, 그 또한 식민지 통치 주체의 욕망을 내면화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물론 온전히 식민 통치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으나, 이광수가 민족 내부의 ‘적’을 분명하게 설정한 것은 ‘적’의 소멸로 인해 초래될 ‘우리’의 소멸을 방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로 충분히 독해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분명 그의 행위는 자국 언어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나, 제국 일본의 지식시장에 예속되지 않도록 토착지식을 재구조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식민지(성)이라는 ‘적’을 은폐하고 있다면, 그럼으로써 피식민 민족, 사회, 문화가 식민 세력을 내면화하며 스스로를 ‘절멸’시키는 과정에 무심코 참여하고 있다면, 반대로 ‘적’을 분명히 설정하고 그를 토대로 ‘우리’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한 절박한 노력을 수행하는 이광수의 기획은, 정치신학적인 행위로서 유의미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1920년대 초 다양한 미디어의 실험과 욕망들이 복수적으로 경합하는 문학장의 새로운 흐름은 1920년대 이광수의 권위적·정치적 행보를 보다 설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외부의 압제를 민족의 ‘적’으로 삼지 않는다면, 국가를 대신해 ‘주체’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와 문화는 끝을 모르는 내전적 분열으로 소멸되어 제국으로 흡수될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광수는 당대 문학장에서 세계문학을 각 국가의 ‘국민문학’ 단위로 소개하고, 작가에 민족 공동체를 대표할 수 있는 위상을 부여하는 등 당대의 ‘조선문학’을 세계문학의 보편성 속에서 정립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우리(민족)’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그 시도야말로, 이광수의 수많은 ‘결단’들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춘원이즘’과 인간성의 문학 : 여성의 ‘몸’ 재현 방식
발표자 홍덕구는 이광수에 대한 채만식의 ‘춘원이즘’이라는 언급에서 시작하여, 이광수의 삶과 문학이 채만식의 소설 텍스트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 서사적 유사성과 차이점을 밝혀내고 있다. 논의의 중심이 되는 텍스트는 1930년대 후반에 약 1년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두 장편연재소설, 이광수의 『사랑』(1939), 채만식의 『탁류』(1938)이다.
1934년, 채만식은 조선의 문학평론가가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 “춘원 및 그 동일 계통의 제가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 “그러한 문학이 의거하여 발생된 당시 정치·경제·사회 및 세계사조에 대해 상식 이상의 탐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는 사회주의 성향의 신진 평론가들을 비판하기 위한 글이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조선의 신문학(사)에 대한 채만식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채만식은 이광수를 비롯한 그의 세대(김동인·염상섭 등)의 문학이 우리 문학사에서 무엇보다 필요했으며, 그 중에서도 이광수의 문학은 한 단계 더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광수의 문학을 ‘춘원이즘’이라 명명할 만큼, 채만식은 일반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이광수 식의 인도주의와 민족주의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채만식이 이광수의 문학에 대해 전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대 문학에 이데올로기를 강제로 주입했던 프로문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채만식에게, 늘 민족을 사랑하는 ‘선(善)’으로 일관하는 이광수의 문학 역시 “인간성을 도륙”한 이데올로기적 대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처럼 채만식은 ‘춘원이즘’과의 만남 혹은 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데올로기와 인간성의 양립을 고민하게 되고, 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경계에 선 채 자신의 문학적 여로를 탐색하게 되었다. 특히 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탁류』는 그 고민과 탐색의 흔적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우선 채만식의 『탁류』와 이광수의 『사랑』 사이의 서사적 유사성은 채만식 내부에 이광수적인 면모들이 새겨져 있음을 방증해준다. 그 유사성은 ①작품 내부에서 미인으로 설정된 여성(정초봉/석순옥)이 주인공이라는 점 ②여성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이 의사(남승재/안빈)이며, 이들이 사회사업을 펼치는 인격자로 묘사된다는 점 ③여성 주인공이 실제로 혼인하게 되는 사람은 도박과 주색으로 신세를 망치게 되는 투기꾼(고태수·장형보/허영)이라는 점 ④의사 남성에게는 여성 주인공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사정이 있다는 점 ⑤여성 주인공에게 친자매이거나 자매처럼 가깝게 지내는 여성 조력자(정계봉/박인원)가 있다는 점 ⑥여성 주인공 및 여성 보조인물이 의학·약학 관련 직업을 갖고 있거나 희망한다는 점이라 일별할 수 있다.
이렇듯 『탁류』와 『사랑』의 서사적 유사성은 여성 주인공들과 그들을 둘러싼 애정갈등(삼각관계)으로 인해 확립되지만, 각각 여성 주인공들의 외형(몸)과 성격을 형상화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탁류』의 초봉의 외형은 복스럽지 않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 선이 가늘어 위태위태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는데, 그러한 외형은 곧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성격과 직결된다. 형보와 살게 된 초봉은 과도한 성관계 요구와 스트레스로 인해 생명이 생리적으로 좀먹어 들어감을 느끼고, 태수가 죽은 뒤 박제호의 첩이 되었을 때도 되다 만 ‘사람’ 노릇을 하고 있다고 자조한다. 소설 중반부로 가면 초봉은 몸과 정신이 함께 병드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신체를 매개로 그를 욕망하는 남성 인물들에게 광기와 충동을 전파하기도 한다. 완전히 통제를 잃어버린 자신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며, 자기 내부의 ‘인간성’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사랑』의 순옥은 『탁류』의 초봉에 비해 상당히 평면적이다. 순옥 역시 매우 아름답다고 언급되는 미인이지만, 그의 외형이나 성격, 생각이나 욕망은 『탁류』에서처럼 직접적으로 돌출되지 않는다. 그녀의 외형에서 초점화되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인간의 신체가 아닌 근대 과학이 이상화한 여성의 신체, 즉 ‘이데올로기의 육화’에 가깝다. 이는 ‘인간성’을 감지하는 초봉과 인상적인 대조를 이룬다. 전작인 『애욕의 피안』(1936)에서 ‘욕망 없는 주체’를 희생제물로 내세웠던 이광수가, 『사랑』에서 그 테마를 변주하여 자신이 상정한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순옥이라는 인물의 서사로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맥락에서 순옥의 몸은 인간의 신체라기보다 ‘춘원이즘’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작동하는 ‘로봇’에 가깝다. 이광수에게 있어서 물질과 정신, 몸과 영혼은 철저히 분리된 것이었으며, 그 영향으로 인해 신체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서사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작에서부터 시도했던 과학(물질/몸)과 정신(영혼)의 이분법과 양자를 통합하려는 야심찬 기획을, 『사랑』에서 ‘과학적으로 이상화된 몸’과 ‘춘원이즘의 정신’을 가진 순옥이라는 인물을 통해 기묘한 형태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 정리 : 조수아 기자 lovelove99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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