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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제국 일본의 콜로니얼 아카이브 : 부스러기 아카이비즘의 투쟁과 지(知)의 재구축 본문
제국 일본의 콜로니얼 아카이브 : 부스러기 아카이비즘의 투쟁과 지(知)의 재구축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시작과 명령의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그리스어 ‘아르케(Arkhe)’를 토대로 ‘아카이브’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특정한 법칙이 ‘시작’되는 곳, 즉 물리적인 장소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권력을 의미하는 아카이브는 근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는데, 데리다는 이와 같은 현상을 기억의 부재를 보상하려는 프로이트적 징후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우리는 아카이브를 통해 이미 잃어버린 것, 사라진 것을 갈망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카이브는 그 부재의 흔적만을 보존할 뿐 과거의 기억 자체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러한 아카이브의 한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기억이 왜곡되거나 망각되는 상황 속에서도 망각에 대한 저항이 흔적처럼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아카이브하려는 충동(archiviolithic drive)”의 흔적이 남아 얼마 지나지 않은 미래에 도래하리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데리다를 필두로 이 아카이브의 문제를 쟁점화하여, 해방과 분단, 전쟁과 냉전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식민지 아카이브’를 다시 위치 짓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11일, 성균관대학교에서 한·일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아카이빙의 투쟁과 저항을 떠안고 어떻게 다시 지식의 실체를 재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날 진행되었던 발표 중 일부를 뽑아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콜로니얼 아카이브들의 포스트콜로니얼한 개조? -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서울대 도서관으로
현대사회에서 대학이 ‘지식 커뮤니케이션’의 독점적 미디어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게 됨에 따라, 대학 도서관은 커뮤니케이션의 매개물 혹은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기록물(책, 잡지, 문서 등)을 축적하는 필수적인 장치로 그 중요성을 더해갔다. 다시 말해, 지식과 학술을 매개로 한 인적 교류의 결절 지점에 대학이 탄생했고, 이러한 대학에서 산출되고 축적된 도서관의 지식과 학술은 다시 이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모아 교류시키는 촉매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대학과 대학 도서관은 그야말로 지적 교류의 장(場)과 교류의 축적물, 매개물로써 표리(表裏)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발표자 정준영은 이 대학 도서관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는 경성제대 도서관에 초점을 맞추어, 그 안에 일본 제국대학의 두 가지 과제―학술적인 전문지식의 창출과 국가 엘리트의 양성―가 관철되고 있었는지 밝혀나간다. 이식(移植)된 제국 일본의 제도와 관행들 속에서도 식민지의 맥락을 지우려는 욕망이 있지는 않았는지, 경성제대 도서관을 ‘식민지 아카이브’라는 차원에서 분석한다.
경성제대 창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초대 총장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는 대학 도서관 설립에 특별히 신경을 썼었고, 조선총독부의 후원에 힘입어 도서구입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한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도서구입 예산으로 80만엔을 지출했는데, 당시 경성제대의 1년 예산이 대략 138만엔 규모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3년간 매년 20% 가까운 예산을 도서 구매에 쓴 셈이었다. 막대한 자금과 식민권력의 후원을 기반으로 경성제대 도서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향으로 발전을 모색했다.
먼저 핫토리는 경성제대 도서관이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 뒤지지 않는 연구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학술활동의 도구가 되는 서양 학술서적의 구비였다. 실제로 경성제대가 제1차 세계대전 배상금 등을 통해 확보한 도서구매 비용의 상당 부분은 서양 학술서적의 구입에 할애되었고, 그 노력 덕분인지 경성제대 도서관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8만 8천권 가까운 서양 학술서를 확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1927년 준공된 도서관 건물의 공간 구조에서도 알 수 있듯, 경성제대는 교육보다 ‘연구’를 강조하는 방향을 택했다. 경성제대는 일관되게 각 연구실의 도서관에 자율성을 부과하는 분산주의, 교육적으로 필요한 책을 여러 권 구입해서 학생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보다는 다양한 주제의 전문적인 연구서를 한 권씩 구매하여 가급적 연구자에게 참고가 되려고 하는 단권주의를 고수했다. 경성제대의 건물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강의실 및 실험실이었고 학술활동은 도서관에 마련된 연구실에서 이루어졌으며 각 연구실은 서고의 도서와는 별개로 자주 활용하는 서적들을 연구실에 비치해놓고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렇듯 경성제대 도서관은 ‘아카이브’뿐만 아니라 아카이브에서 작업하는 사람들까지도 공간적으로 함께 품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핫토리는 식민지 조선에 산재한 수많은 전통적인 한적(漢籍)들의 수집, 분류, 연구야말로 식민지에 제국대학을 설립하는 이유가 될 뿐 아니라 당시 침체에 빠진 일본 동양학 학계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런 의미에서 경성제대 도서관은 교육의 교재, 연구의 도구를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관하는 참조도서관의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경성제대 도서관은 설립 직후부터 한국인 서적상, 일본 서점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한국 고서를 수집했으며,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강제로 인수하여 보관하고 있던 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각종 자료의 이전도 추진했다. 그 결과 대학 도서관이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선 최대의 공공 도서관이었던 조선총독부 도서관의 약 33만권을 훌쩍 능가했다. 사실상 식민지 조선 최대의 도서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지식의 확산’이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경성제대 도서관은 학술적 지식의 생산을 위한 재료를 집적한 장소라는 의미가 강한 곳이었다.
이처럼 경성제대 도서관의 설계자들은 식민지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정보를 학술적 차원에서 선별하여 대상화하고, 이를 전문화된 실증적 지식으로 전환시키는데 필요한 시야와 개념, 방법론을 확보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시간대에, 다른 맥락 속에서 생산된 여러 가지 종류와 형태의 기록들, 정보의 파편들, 행정적 문서들을 긁어모아 ‘조선적인 것’이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는 탈맥락화된 지식들의 아카이브적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다. 엄밀한 개념과 방법에 의해 실증적으로 산출된 식민지에 대한 지식체계, 다시 말해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조선학’은 이처럼 경성제대 도서관을 위시해서 식민권력이 꿈꾸었던 사물의 콜로니얼한 질서 위에서 나타나는 효과이며, 따라서 콜로니얼 아카이브에 애초부터 배태되어 있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본래의 목표와는 달리 언제나 불순한 것들이 섞여 들어갈 여지가 다분하다. 그리고 이렇게 식민지기에 일차 가공을 거친 ‘한국적인 것’의 재료들은, 냉전 구도 속에서 새롭게 유입된 학술도구들과 또다시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한국학’으로의 개조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에서, 경성제대의 콜로니얼한 아카이브들은 서울대 도서관이라는 포스트콜로니얼한 아카이브로 변모해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발견된 수기(手記), 아카이브와 식민 기억
‘아카이브’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인 집정관(archons)의 집, 거주지를 뜻하며 공적인 문서 보관소를 의미한다. 집정관은 문서의 수호자들로, 단지 보관되는 문서들의 물리적 안전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그 문서들에 대한 해석적 권리를 갖고 있다. 발표자 이혜령은 해방기는 콜로니얼 아카이브와 관련해서 어떠한 상황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해방 직후 조선의 광경을 드러내 보인 김남천의 『1945년 8.15』(1945~1946)와 정비석의 『고원(古苑)』(1946)의 아카이브성에 주목한다.
해방 직후의 상황은 일본제국의 문서고의 외부성을 단번에 드러내고, 그 해석적 권력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의 경제 정치범 석방은 그 좋은 예이다. 정병준은 최근 『1945년 해방 직후사』에서 “8월 16일 여운형이 다시 서대문형무소를 찾았고, 2천여 명의 독립투사들이 석방되었다. 이들은 서대문에서 종로까지 행진했다. 독립투사들이 옥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대로를 활보하는 모습은 일제의 패망과 한국 해방의 직관적인 광경을 만들어냈다. 한국인들이 이들을 환영하여 해방 만세, 독립 만세를 외쳤지만 어떤 일본인도 경찰도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해방은 서대문형무소의 옥문이 열림으로써 찾아왔다.”라고 서술했다. 이처럼 석방된 범죄자들은, 식민지의 다양한 문서―일제가 생산한 인물의 신상 및 인치(引致)·수형(受刑) 정보 등을 기입할 수 있는 양식에 사진을 부착한 카드인 일제강심대상 인물카드의 기록문서―에 등장할 법한 사람들로, 그들은 역사의 문서고 속에서 봉인될 사이도 없이, 범죄자가 아니라 독립과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뚜렷이 투사한 집단적 존재였다. 그들이야말로 자신을 구속하여 감옥에 가둔 자들이 누구인지, 또 옥문이 열리던 날의 감개무량함을 증언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수형자 관리를 위한 기록체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된 2,000명이 누구인지를 밝힌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그들이 누구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는 아카이브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석방되어 해방의 직관적인 광경을 보여주었을 뿐, 그 한 명 한 명이 누구인지 신원을 알 수 없다는 사실, 즉 콜로니얼 아카이브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이 증발되었다는 사실은 해방의 성격만큼이나 식민화란 무엇인가를 암시해준다. 식민화는 이렇듯 그 반대자들을 진압하고 관리하는 기록의 생성과 동시에 기록의 파괴를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남천과 정비석의 소설은 바로 이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 이들의 소설은 기록될 수 없었던, 기록되지 않았던 나날들의 공백을 보충하고, 식민지화의 시간만이 아니라 공간을 분할해내는 규범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에 어디에 있었느냐는 물음은 그러한 맥락 하에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상한다.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서 사상범의 체포와 구금, 탈출, 재판의 기사들과 함께 소설의 서사를 구성한 김남천과 해방 이전 간도의 어느 농가에서 뒹굴어 다니는 대학노트를 발견하고 소설을 쓰게 된 정비석처럼, 원본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체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콜로니얼 아카이브임에 틀림없다. 특히 정비석이 발견된 수기를 통해 간절히 보충되기를 원했던 것은 해방기에 가장 문제시되었던 친일 또는 협력의 행적 그 자체가 아니며, 또한 그 원인이나 계기라기보다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친일 행적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가정되는 자가 친일 행적을 한 자에게 갖는 감정을 통해 친일 행위를 좀 더 다르게 인식하는 효과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친일/반일의 이분법적 귀결이 아닌 조선 공산당-친일파-중도파 모두가 ‘이 땅에서 살았다’는 사실이지 않을까. 발표자는 그러한 짧은 시간 동안 요동쳤던 해방기의 ‘식민지 아카이브’를 조명하며, 그 아카이브 밖으로 걸어나온 이들의 삶을 어떻게든 그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제국의 저항론 비판을 위하여 – 1950년대 일본문학과 저항 언설
‘저항’이라는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시하에 있던 문학자들의 정신적 운동을 고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참조항 중 하나였다. ‘협력인가 저항인가’라는 것이 문학자들의 전쟁 책임을 묻는 것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시 체제에 대한 그러한 이항대립적인 평가축은 기나긴 ‘전후(戰後)’라는 시간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발표자 사카사이 아키토(逆井聡人)는 ‘저항’이라는 개념을 재검토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영토가 주권을 회복하게 되는 1952년 전후의 논의를 살피며 당시의 저항론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확인한다.
미·소 대립이 가시화되어 레드 퍼지나 공산당의 분열 등 정치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해 나가는 가운데,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지가 긴급한 과제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전시하에서 각국의 저항문학을 본보기로 일본의 주체적 ‘국민’과 그에 걸맞는 ‘문학’을 부흥해야만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가토 슈이치(加藤周一)를 중심으로 한 일본 문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 문학을 ‘전후문학’의 모델로 삼고, 나치의 프랑스 점령으로부터 ‘저항’한 프랑스인들의 행동들을 현재 일본의 상황과 연결시켜 사유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점령 하의 프랑스와 GHQ/SCAP에 의한 점령이 종료되려는 시점의 일본을 비교하고, 점령 이후 문학의 모델로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문학을 참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발표자는 프랑스의 상황이 일본에 겹쳐질 때 발생하는 모순을 지적하며, 그 모순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분석한다.
프랑스에서는 전시의 저항이 전후 휴머니즘이나 ‘새로운 인간관’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은 전시와 전후가 단절된 데다가 저항 또한 부재했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관’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당대 문학자들은 1950년 전후의 맥락과 접속하여 저항의 체험을 국민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을 창출하고 전후를 ‘현대’로 전환하는 ‘이중의 전회’를 시도한 것이다. 저항 문학의 필수 조건으로 ‘국민적인 것’을 드는 이들의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배제에 따른 하나의 사각지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의 영역이다. 물론 당시에도 전쟁 책임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식민지배에 대한 무감각함을 드러내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관점에 대해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등 당대 비평가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저항’의 영역을 국민의 운동으로 포섭해 나가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유지되면서도, 저항에 대해서는 “지식인만의 운동이 아니라, 전 인민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 저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일본 국민의 주체성의 회복이라는 맥락 속에서의 ‘저항’이고, 결국 그 저항의 주체로서 요청되는 것이 ‘국민’이라는 틀인 셈이다. 그 사이를 오가는 과정에서 식민지배의 문제의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일본 ‘국민’은 미국에 대한 공동투쟁(저항)을 해야만 하는 ‘피압박민족’으로서 편리하게 소환된다. ‘국민’이라는 개념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책임을 둘러싼 사고의 심화를 방해하는 커다란 장애물로서, 아니 오히려 그 책임의 방향을 돌리는 완충재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 정리 : 조수아 기자 lovelove99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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